“탕후루.”

실패했다면,

“마라탕.”

둘 중 하나에 웃을 확률은 90%가 넘어간다, 여학생은. 아무 맥락 없이 저 단어만 말해도 표정이 밝아지며 자신의 식사(食史)를 공유한다. ‘여중생’에게서 ‘임신한 아내’가 먹고 싶어 하는 음식을 대령해야 하는 이유를 발견한다. 여학생들은 옛날 목욕탕 아줌마들처럼 먹을 것을 가지고 와서 나누는 것으로 친밀감을 증명했다.

남학생에게 저 단어를 말했다면 ‘뭐 어쩌라고?’ 하며 한심한 듯 쳐다볼 확률이 높다. 음식을 소재로 대화가 이어지는 경우는 드물다. 남중생의 관심사는 19금이 절대적이고, 건전하면 게임이나 축구다. 남학생들은 육체적 활동을 공유하며 승부에 민감했고, 공사판 아저씨들처럼 욕설을 나누는 것으로 친밀감을 증명했다.

남녀는 생물학적으로 다르다. 이렇게 다른 생태를 지닌 개체가 공존하는 것이 신기할 정도로 다르다. 그런데 성호르몬에 폭발하는 10대, 젠더 감수성이 생물학적 차이를 무시한다. 차이를 차이라 말하면 성차별적이라서 조심스럽다.

젠더 감수성이 보편 윤리로 떠올랐지만 제도권 밖에서는 여전히 여성 차별이 존재한다. 제도의 경계에서도 알게 모르게 차별이 발생한다. 혹은 그렇게 여겨진다. 이를 부정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제도권 안에서 남성이 억압당하는 영역도 존재함을 이야기하고 싶다. 문학계에서의 남성성은 ‘내게 유해한 사람’으로 은유되며 우아하고 확실하게 부정 당한다. 머리 굵어진 성인들이야 안 보면 그뿐이라지만, 어린이/청소년은 아니다. ‘책’은 권위를 지니며, ‘독서’는 교육적 가치를 지녀 아이들 정체성 형성에 끼치는 영향력이 크다.

어린이 도서 [하늘을 달리는 아이]를 읽다가 문득 깨달았다. 내가 그동안 읽었던 어린이/청소년 소설이 말하는 ‘감수성’은 여성적인 것들이었다. [하늘을 달리는 아이]의 가출한 제프리가 동네의 전설 마니악이 되는 과정에 몰입했다. 지극히 남성중심적이었던 것이다. 여자 아이들이 공감하기 힘들 듯했다. 남자 아이들은 10살 전후에도 힘들고 위험한 일을 해낼수록 또래 사회에서 지지 받았다. 수렵채취 시대 사냥을 위해 필요했던 DNA였을 것이다. 내가 10살 미만이었던 시절, 동네 남자아이들은 계단과 담벼락에서 부단히 뛰어내렸다. 계단의 개수와 담장의 높이가 용기의 수치로 환산되었다. ‘남자가 일찍 죽는 이유’로 검색되는 위험하고 무모한 행위들은 어렸을 때부터 피를 끓게 한 것이다. 남자 아이를 움직이는 방법은 간단했다. - 쫄?(무섭냐?)

어린이/청소년 도서에서 ‘쫄?’의 감수성은 거의 처음 읽은 듯했다. 글밥 먹는 여성 비중이 높았고, 여성 작가들은 여성적인 이야기를 했다. 여성이 여성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자연스러웠지만, 여성이 인간 표준이 되는 건 문제였다.

어린이 도서 [푸른 사자 와니니]에서는 ‘여성이/도 할 수 있다.’를 말했다. 약한 사자 와니니는 남성적 카리스마의 강한 사자 할머니가 보스로 군림하는 무리에서 버려지지만 리더로서 구성원을 이끌며 새로운 공동체의 정점에 선다. 수컷이 프라이드를 이끄는 사자의 생태를 비튼 것은 동화적 상상력이라고 하지만, 와니니를 띄우기 위해 숫사자들을 사냥도 못하면서 먹이나 축내는 잉여로 묘사한 것은 남성혐오다. 이 작가의 청소년 도서 [호수의 일]도 여성의 일이었다.

청소년 도서 [체리새우 비밀 글입니다]는 작품 자체에 제기할 이의는 없다. 여중생들의 인간관계 이야기가 흥미롭게 그려졌다. 단, 책 뒤에 쓰인 서평에 ‘청소년들의 인간관계’라고 단언하는 것은 문제였다. 남학생들은 대체로 이 책에 공감하지 못했다. 남학생들은 자기 무리에 특별히 신경을 쓰지도 않거니와 갈등은 관계하지 않으면 그만이었고, 여차하면 힘겨루기로 풀었다. 무엇보다도 애초에 인간관계에 민감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여중생의 인간관계 맺기 방식을 청소년의 생태로 일반화하는 것은 20세기 이전, 남성을 인간의 표준으로 여기던 과오의 반복에 지나지 않았다.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문학에서 ‘감수성’은 여성성에 치중되는 듯하다. 남성성과 여성성의 구분이 거슬린다면, 마라탕친화성이든 쫄민감성이든 상관없다. 대충 그 어디쯤의 용어를 갖다 붙이면 그만이다. 학생들과 부대끼다 보면 남녀 차이가 직관되므로 일단 남성성과 여성성을 활용해서 말하자면, 문학을 통해 학습한 인간상의 표준은 여성이 되고 만다. 남자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남성성은 독서를 통해 자연스럽게 억압된다. 남자 아이들로 하여금 자신이 갖고 있는 본성이 ‘틀린 것’으로 인식하게 만드는 가스라이팅이 교육적으로 이뤄지는 것이다. 엄마들도 여성이어서 남자 아이들의 감수성은 공감 받기 쉽지 않다. 남자 아이들은 언어도 딸려서 제 상태를 설명하지도 못하고 멀뚱멀뚱하다.

물론, 남자 아이였던 나도 남자 아이들의 감수성이 이해되지 않을 때가 많다. 상대를 이겨야 직성이 풀리는 투쟁심, 무모한 도전에 성공했을 때의 전율, 몇 번을 말해도 기억하지 못하는 무성의, 울면 안 된다는 갑옷이 복합된 짐승성을 감수성이라고 불러도 될지 확신은 없다. 확실한 건, 소설은 활동적인 남자 아이들이 활용하기 적합한 양식도 아니고, 음미하기 좋은 내용도 아니어서 남자 아이에게 권할 만한 책이 아쉽다. 그래서 추천 받고 싶다.

『눈물을 마신 새』가 왜 문학이 아닌지를 따지고 싶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진취적이길 바라는 건 아니다. 그저 ‘남자 아이’를 이야기하는 문학을 만나고 싶다는 것이다. 정말이지, ‘소년을 위로해줘’의 기분이다. 파스타나 마라탕 맛 말고, 국밥이나 제육볶음 맛으로.

사진 필자 촬영
사진 필자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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