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겐 열등감이라는 오래된 친구가 있다. 평소에는 뭘 하고 지내는지 잊고 살다가, 어쩌다 연락이 닿으면 지지고 볶고 싸우는 친구다. 그때마다 다신 보지 말자고 절교를 선언하지만, 어느새 다시 나타나 하이에나처럼 내 곁을 빙빙 돈다.

솔직히 말하면 이 친구에겐 신세 진 게 많다. 날 떠나지 않고 주변을 맴도는 건 그래서인지 모른다. 아쉬울 때 또 자길 찾으리라는 걸 알기에, 언제까지 버티는지 보겠다며 기다리는 것 같다.

이미지 논객닷컴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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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땐 나보다 성적이 좋은 짝꿍을 이기기 위해 놈을 이용했다. 짝꿍은 운동도 잘하고 잘생겼는데 공부까지 잘했다. 그를 이기기 위해서 녀석에게 손을 내밀 수밖에 없었다. 야자를 하다 꾸벅 졸면 열등감은 내 뺨따귀를 찰싹 때렸다. 쟤보다 공부도 못하는 주제에 잠이 오냐며.

덕분에 원하는 대학에 들어갔고, 한동안 녀석과 연락이 끊겼다. 그러나 평화는 길지 않았다. 내가 결혼을 하자마자 놈은 활짝 웃으며 우리 집 대문을 두드렸다. “친구야. 직장이 지방 촌구석에 있는 주제에 잠이 오니?”

또다시 잠 못 이루는 날이 이어졌다. 하루에 4시간씩 자면서 공부를 했다. 결국 아내의 회사와 5분 거리에 있는 곳으로 이직했다. 이 정도면 한숨 놓아도 되겠지 싶어 침대에 누웠는데 카톡 알람 소리가 났다. 그놈이었다. “네 동갑내기는 이미 과장인데 신입으로 입사한 주제에 잠이 와?” 난 벌떡 일어나 자격증 공부를 시작했다.

닥터스트레인지의 타임루프에 갇혀 같은 상황을 무한히 마주하던 도르마무의 심정이 이런 것이었을까. 돌고 돌아 다시 제자리인 기분은 분노가 아니라 체념에 가까웠다. 이렇게 살다 죽는 건가 싶은.

열등감은 놀랍도록 강력한 동기부여가 됐고, 그 효과는 오래 유지됐다. 어떨 땐 느슨해진 마음을 채찍질하려고 일부러 내게 모난 말을 퍼부었다. 성과는 좋았다. 빠르고 효과적으로 원하는 걸 이룰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 넣어도 결핍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열등감에서 비롯된 노력은 나를 채워주지 못했다. 내가 이룬 값진 결과물에 뿌듯해하는 대신, 남들보다 부족한 또 다른 무언가를 찾게 됐다.

내가 이렇게 못난 사람이라는 걸 인정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여유 있는 척 미소짓고 있지만, 사실은 아내의 친구가 의사와 결혼했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가슴이 철렁한 사람이라는 걸 말이다.

이 글은 커밍아웃이다. 부끄러워서 소개하고 싶지 않았지만, 사실은 절대 떨어질 수 없는 친구가 있다는 고백이다. 이제는 안다. 어떤 아픔은 있는 그대로 견딜 때 나를 낫게 한다. 사회적 지위나 돈이 아니라, 초라한 자신과 마주해야만 얻을 수 있는 만족도 있다.

그러니 다음번에 네가 내 방문을 두드리면 조용히 열어주려 한다. 이번엔 너를 이용하지 않겠다. 무슨 일로 찾아왔냐고 묻고, 차분히 네 이야길 들어보려 한다. 그런 감정을 느껴서 아팠겠다고, 하지만 그건 네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다.

그 뒤엔 우리가 못 가진 게 아니라 우리가 가진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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