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0월에 시작된 가자전쟁은 중동의 풍경은 물론 세계 지도마저 바꾸고 있는 느낌이다. 물론 그 지역의 국경선이 바뀌는 것은 아니지만 매스컴에는 그 전쟁을 둘러싸고 이스라엘을 지지하는 지역과 하마스를 지지하는 지역을 색깔로 표시하는 세계지도가 자주 등장하고 있다.

그런 지도에서 하마스를 지지하는 지역이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 색깔과 함께 변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인류에게 비친 유대인의 인상이다. 그것이 날로 험상궂게 바뀌고 있다.

그래서 되돌아보면 인류에게 비친 유대인들의 모습은 명(明)과 암(暗) 그리고 선(善)과 악(惡)의 양극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줘 왔다.

물론 세계 어느 나라 어느 민족이나 선과 악의 대조적인 인간들은 있기 마련이다.

미국의 경우 흑인들의 노예생활에 마음이 아파 그들의 참상을 ‘톰 아저씨의 오두막’이란 소설로 써서 노예해방에 앞장 선 해리엇 비쳐 스토우 같은 작가가 있는가 하면 남북전쟁에서 패했음에도 노예 해방을 받아들이지 못한 채 흑인을 해치기 위해 결집한 쿠 클랙스 클랜( Ku Klux Klan, KKK)처럼 무서운 인종차별 단체도 있다.

독일인이라면 아직도 2차 대전의 영향으로 많은 인류가 유태인을 대량학살한 주범 아돌프 아이히만을 떠올리지만 ‘세기의 성자’라는 찬사를 받았던 알베르트 슈바이쳐도 독일계다. 원래 음악가였던 그는 아프리카에 병원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의학을 공부해 의사가 돼서 가난하고 고통받는 흑인들을 돌보았을 뿐 아니라 철학자로도 유명했다.

하지만 그것은 어느 민족 가운데 특이한 개인들의 문제일 뿐 대체로 세계인들에게 비친 어느 민족은 엇비슷할 뿐 두 개의 얼굴로는 보이지 않는다. 물론 한국인들이 6.25전쟁에 참전한 우방이라 해서 터키인들을 열렬히 환영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아르메니아인들의 경우 무슬림들인 터키인들이 기독교도인 자기네 민족을 200만이나 학살했다 해서 악귀처럼 치를 떠는 예외적인 경우는 있다.

대체로 한국인에게 비친 이집트인이나 일본인에게 비친 이집트인이 별로 다르지 않고 네덜란드인에게 비친 중국인이 독일인에게는 딴판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유대인의 경우는 특이해서 한 얼굴로 지킬박사와 하이드의 모습을 한꺼번에 보여주는 느낌이 들 때가 많다.

‘유대인’이라는 말에는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에 나오는 샤일록처럼 피도 눈물도 없는 모습과 함께 천재적 핵물리학자이면서도 ‘20세기의 성자’같은 인도주의자 앨버트 아인슈타인의 모습이 뒤섞여 있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이라면 핵무기 개발의 원조로 통하지만 그것은 그가 여러 과학자 가운데 대표 격으로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에 서명한 데서 온 오류다.

핵무기의 파괴력에 놀란 그의 말년은 영국철학자 버트런드 러셀과 함께 핵무기 반대를 위해 서명한 ‘러셀-아인슈타인 평화선언문’으로 장식된다.

유대인의 그런 대조적 모습은 ‘자본주의 vs. 공산주의’ 라는 세기적 대결 판도에서 가장 극적으로 드러난다.

오늘날 가장 자본주의에 충실한 민족을 묻는다면 대부분은 유대인을 첫손가락으로 꼽을 것이다.

자본주의와 유대인의 관계는 새삼 가자 전쟁을 통해 생생히 드러났다. 자본주의의 선두주자이자 주 엔진 같은 미국의 최고 대학, 아니 세계 최고 대학인 하버드대의 학생들이 가자 전쟁의 책임이 이스라엘에 있다는 식의 발언으로 월스트리트에서 취업 금지 한다는 반응에 사실상 무릎을 꿇었다.

그뿐 아니라 이스라엘을 확실히 지지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하버드 역사상 첫 흑인 총장이자 두 번째 여성 총장이었던 클로딘 게이가 취임 5 개월 만에 쫓겨나 가장 빨리 물러난 총장의 기록도 세웠다.

그런 상황을 반증하듯 미국의 거부 명단은 유태인 거부 명단을 보는 것 같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공산주의의 주역이기도 했다.

공산주의의 원조 격인 칼 마르크스가 유대인 혈통이라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어려서 기독교로 개종했지만 그의 할아버지까지는 랍비(유대교 율법학자)였고 외가도 마찬가지였다. 마르크스의 이념을 받들어 볼셰비키 혁명을 이룩한 레닌의 외할아버지도 러시아 정교로 개종한 유태인이었다

그의 혁명 동지로 스탈린과 경쟁했던 레온 트로츠키(레프 다비도비치 트로츠키)도 유대인이었다.

그 뿐이랴. 여성 공산주의자로써 가장 치열하게 활동한 끝에 가장 참담한 죽음을 맞아 ‘붉은 장미’나 ‘공산주의의 대모’로 불리는 로자 룩셈부르크도 폴란드 태생의 유대인이었다.

그러던 유대인들이 가자 전쟁으로 또 하나의 대조적인 두 얼굴을 갖게 됐다. 그것은 유대인의 대명사 같은 ‘피학대자’의 얼굴에 ‘핍박자’의 얼굴이 첨가된 것이다.

유대인들의 수 천 년에 걸친 유랑의 역사를 언급한 모든 글에는 바늘에 실처럼 ‘박해’나 ‘핍박’이라는 말이 뒤따랐으나 그 표현에서 ‘핍박하다’는 말은 찾아 볼 수 없고 반드시 ‘핍박 받았다’나 ‘박해 당했다’였다.

가자전쟁 @사진 연합뉴스
가자전쟁 @사진 연합뉴스

그러나 이제 유대인들은 ‘핍박’의 대상에서 주체로 바뀌고 있다. 요즘 가자 전쟁에 관한 뉴스에서 유대인들이 박해 당했다는 말은 찾아 볼 수 없는 반면 ‘박해했다’는 식의 소식은 널려 있다. 아니 가자 전쟁 보도가 유대인들의 박해행위 르포처럼 보일 정도다.

어찌 보면 이제 100여일에 이른 가자전쟁은 유대인들이 오랜 세월에 걸쳐 걸어온 ‘피박해자’에서 ‘박해자’로 변신하는 과정을 집약한 모습이기도 하다.

2023년 10월7일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기습해 1천여 명의 주민을 살해하고 2백50여 명을 인질로 끌고 갔을 때의 이스라엘은 피해자였고 특히 인질로 끌려간 이스라엘인들은 처참한 수준을 넘어 사형수 비슷한 피박해자들이었다.

그러나 이내 이스라엘이 보복에 나서자 세계여론은 양비론으로 흐르며 조기 종전을 외쳤다.

그러다 가자 주민들의 사망자가 1만 명을 넘어 최초의 이스라엘 피해자의 10배 수준을 넘기면서부터는 이스라엘을 질타하는 목소리뿐이다. 하마스 측은 26일 팔레스타인인의 총사망자가 2만6000명을 넘었다고 발표했다.

이스라엘 외에 또 비난 받는 나라가 있다면 이스라엘의 그런 ‘만행’을 말리는 듯도 하고 부추기는 듯도 하는 미국이다.

실은 하마스가 ‘평화롭던’ 상황에서 느닷없이 끔직한 기습공격을 가했을 때도 그들을 가해자로 보지 않고 “오죽했으면...” 이라며 그들의 오랜 피박해자 상황을 떠올리는 이들도 많았다. 그래서 아예 하마스의 그 기습을 ‘정의롭고 과감한 거사’라는 식으로 찬양하는 여론도 팽배했다.

다시 말하면 유대인들은 75년 전 그곳에 나라를 세울 때부터 가해자의 길에 접어든 셈이다. 그럼에도 더욱 큰 국제사건에 묻혀 주목을 끌지 못했던 그 사연들이 이번 가자전쟁을 통해 인류에게 생생히 드러났다고 볼 수 있다.

이번에도 이스라엘이 ‘피해자’에서 ‘가해자’로 전환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세계적 강대국인 이스라엘을 상대로 지하터널에 의지해 싸우는 하마스의 대결이니 10월7일의 기습공격 다음날 공격 주체는 하마스에서 이스라엘로 바뀌었다. 그 순간부터 가자의 팔레스타인인들은 지옥생활에 들어갔다.

먹을 것도 마실 것도 없고 약도 구하기 힘든데다 폭격으로 사람들이 죽어나는 괴상한 감옥이나 수용소 생활에 들어간 것이다.

가자지구에서 어린 손자의 손을 잡고 백기를 든 채 대피하는 민간인이 총에 맞아 숨진 영상이 26일 공개돼 논란이 일게 된 것이 좋은 예다.

드디어 26일에는 국제사법재판소(ICJ)가 이스라엘에 가자지구에서 집단 학살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를 취하라고 긴급 명령했고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이스라엘에 그 ICJ의 명령을 준수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하지만 ‘유대인의 나라’는 이 명령을 당장 거부했고 ‘유대인에 의해 움직이는 세계 최강 대국’은 찬성인지 반대인지 애매한 반응을 보이고 있어 가자 주민들의 고통이 언제 끝날지는 기약이 없다.

그래서 새삼 인류에게 가자전쟁 보도에 비친 주민들의 모습은 홀로코스트나 그런 대량학살을 당하기 전 독일의 수용소에 갇힌 유대인들의 참상을 떠올리게 할 수도 있다.

그리고 하마스의 기습을 기화로 하마스 박멸을 주장하고 있는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증오하던 안토니오의 실수를 기화로 “너 잘 걸렸어!” 하며 가슴부위의 살 1파운드를 도려내려 했던 샤일록을 떠올리게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매일 무시무시한 지시를 내리는 네타냐후는 그런 국제사회의 시선에는 아랑곳없다는 표정이다.

그리고 그 뒤에는 가자전쟁을 말리는 지 부추기는 지 아리송한 세계 최강 대국이 있는 것이다.

한 가지 기대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미국 대선 전에 이 전쟁을 끝내리라는 전망이다.

그뿐 아니라 이스라엘 국민들이 100여명이나 인질로 잡혀 있는 채 그 가족들이 빠른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는 것도 조기 종전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 밖에도 많은 주변국들이 막후에서 협상을 하고 있어 가자 전쟁이 시작처럼 갑작스레 끝날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인류의 눈에 박힌 ‘박해자 이스라엘’의 모습은 인류의 기억에서 가벼이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

이제 유대인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새 역사를 이끌어 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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