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죽아’가 민족문화라면, 나는 이민족이다. 나는 뜨거운 아메리카노만 마셨다. 이유는 단순했다. 실내 노동자로서, 커피를 마실 때 날씨 영향을 받지 않았다. 추울 때 따뜻했고, 더울 때 시원했다. 실외에서는 커피 마실 일이 없었다. 여름에 실외에서 무언가를 마셔야 한다면, 시원한 탄산음료이지 커피는 아니었다. 물론, 탄산음료에도 얼음을 넣지 않았다. 얼음은 음료를 마실 때 걸리적거렸다.

사진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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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수도 미지근하게 마셨다. 물을 끓이든, 생수를 사든, 냉장고에 물을 넣지 않았다. 물을 마시는 이유는 수분 보충이었고, 찬물을 마시면 수분을 충분히 섭취하기 전에 뒷골이 찡해졌다. 찬물을 마셔야 시원한 것은 체온에 깃드는 냉온 편차 탓이다. 미지근한 물을 마셔야 벌컬벌컥 들이킬 수 있어 세포가 편차 없이 고르게 촉촉하고 시원해질 수 있다. 같은 이유로 찬물과 뜨거운 물 중에서는 찬물을 마시겠지만, 갈증이 심하지 않다면 뜨거운 물을 느리지만 꾸준히 마시는 편이다.

식당에서는 내 선호가 대체로 충족되지 않았다. 계절과 무관하게 찬물이 서빙되었다. 냉장고에서 갓 꺼낸 물통에는 물방울이 맺혔다. 그 물기가 내 손에 묻는 불편함과 찬물을 마셔야 하는 부담은 내가 일방적으로 감수해야 했다. 모두가 찬물을 선호할 것이라는 당연함 속에서 나는 ‘내가 당연하지 않은 존재’를 받아들여야 하는 사실이 낯설었다. 나는 물 소수자였다.

대한민국 남성으로서 나는 다수자에 속했다. 내가 한국인인 것도, 남성인 것도 한국에서는 당연했다. 남성이어서 차별을 당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내 정체성을 부정할 정도는 아니었다. 소소한 차별이 있었더라도 그 상황을 벗어나면 기본적으로 사회 구조가 남성친화적이었다. 먼지 털듯이 뭐 그럴 수도 있지 하고 나면, 나는 다시 다수자로서 있는 그대로 당연했다. 그래서 식당에서 꼬박꼬박 강제되는 소수자는 소수자를 실감할 수 있는 기회였다.

기시감이 들었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긍정 받지 못하는 세계의 벽’에 부딪쳐 본 적, 있었다. 취준생은 인간이 아니었다. 세계가 나를 요구하지 않으므로 나는 ‘틀린 존재’였다. 세계가 가하는 부정 압력에 저항할 근거가 없었다. 사회뿐만 아니라 나도 나를 비난했다. 인생 최악의 소외감이 일상 감각이었다.

이 당시 소외감과 요즘 식당에서 느끼는 소외감은 결이 달랐다. 당시 88만원 세대가 대량생산 되던 시기라서 나는 사회 현상 중 하나였다. 소수자가 숫자의 양이 아니라 힘의 개념이라고 하더라도 나는 스스로를 소수자로 인식하지 못했다. 삼각김밥과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우고, 공부를 핑계로 인간관계를 축소하는 사람들은 도서관에 득시글했다. 나는 틀린 존재이나, 틀림 군락 속에 있어서 표지되지 않았다.

취향이 권리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해 왔다. 식당의 식수 온도는 윤리가 아니라 시장을 따랐다. 손님 다수가 찬물을 선호하는 세상에서 찬물 서빙은 합리적이었다. 따뜻한 물이 있으면 운 좋은 것이지, 따뜻한 물이 당연한 것은 아니었다. 정상과 비정상의 이분법이 아니라 수요와 공급의 문제인 것이다. 한국에서 식(食) 소수자들, 채식과 할랄 음식도 수요 부족 문제로 대응 되었다. 수요만 충분하면 시장은 서비스를 공급한다. 자신의 특이 취향을 충족할 수 없는 것은 차별 문제가 아니었다. 시장에서는 다수가 당연했다. 그러나 그 당연함에서 내가 빠지자 나도 불만인 모양이었다.

식당에서는 나 혼자 멀뚱했다. 소외의 온도는 제대로 차가웠다. 다들 찬물을 당연하게 마시고 있어서 ‘나만 다르다.’는 감각이 목구멍에서 위장까지 냉기로 퍼졌다가 온몸으로 찡해졌다. 하루 한 번 이상 체감하는 소외감이 흥미로웠다.

내게 닥친 소외감을 관조할 수 있는 것은 내가 소수자가 아니라는 확신에서 오는 권력이었다. 조금 귀찮아질 뿐, 미지근한 물을 마시려면 정수기로 가서 뜨거운 물을 섞으면 되었고, 그냥 찬물을 마셔도 상관없었다. 그러나 채식주의자나 할랄 음식을 먹는 사람들은 대안이 없었다. 처음으로, 그들의 ‘당연하지 않음’을 생각했다.

비시장 영역에서는 소수자도 당연해야 했다. [한국인의 식판]이라는 TV 프로그램을 볼 때, 채식이 존중되는 급식 시스템에서 비효율부터 생각했다. 이 프로그램에서 한국인 요리사 팀이 외국 학교에 가서 급식을 제공했다. 누군가의 특이 취향 때문에 추가 비용이 발생하는 것은 부당했다. 채식은 위장된 편식으로 비하하고, 할랄은 꼬우면 너네 나라로 돌아가든가 하며 기계적 다양성의 망령들을 고깝게 봤던 내가, 겨우 내 물 한잔으로 납득한 것이다. 그곳은 학교였다. 최소한, 학교에서만큼은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한, 누구나 당연해야 했다.

식전에 찬 물을 마시며 생각하게 되었다. 학교 밖에서는 달라져도 되는가? ‘시장’은 차별을 합리화하는 도구는 아니었을까? 인간은 타인을 향한 상상력이 의외로 빈약하다. 내가 누군가의 권리를 가볍게 여긴다면, 내가 다수자이기 때문일 것이라는 데 생각이 미치자 뜨끔했다. 효율의 그늘 아래는 늘 노동 착취가 득시글대고 있었다. 바다 건너 커피와 면직물뿐만 아니라 당장 문 앞에 놓인 택배 박스에도 착취가 그득했다. 알고 있지만 비용을 지불할 때마다 망각했다. 그것이 시장 질서였다. 그러나 내가 찬물을 마시고 발견한 시장 질서란, 소수자를 향한 다수자의 가스라이팅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우리 영혼의 주소는 시장이 아니라 공동체다. 찬물을 마실 때마다 따뜻한 물을 마시고 싶은 만큼 소수자를 생각한다. 식당을 나오면 끝날 나의 체험이 누군가에게는 정체성 전체와 맞서야 하는 일상이어야 하는 부담감을 어림잡아 본다. 지금, 여기에 있다면 누구도 이민족이 아니다.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하지만 사실은, 아직도 효용부터 생각하는 다수자의 습성을 버리지 못해 ‘있는 모든 것이 당연하다’가 어렵다. 꼬박꼬박 찬물을 마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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