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종건 드라이펜]

사흘 뒤면 내가 태어나 76번째 맞는 설(구정)입니다. 76년의 세월 속에서 설의 세시풍속도 많이 바뀌었습니다. 내가 맞았던 설을 크게 나누어 보면, 고향 집 부모님 슬하에서 맞았던 설과, 객지에서 직장생활을 하다 부모님 품을 찾아가던 설과, 부모님이 세상을 떠난 뒤 성묘를 하기 위해 고향을 찾는 요즘의 설일 것입니다.

설을 기다리는 설렘으로 말하자면 나 또래의 사람들은 대개 어린 시절 부모님 슬하에서 맞았던 설을 꼽겠지요. 이불 속에서 손을 꼽으며 설날을 기다렸지요. 먹을 것, 입을 것이 넉넉지 않았던 그 시절, 설날은 새 옷, 새 신발이 생기고, 제사상에 오르는 온갖 음식과 과일을 먹을 수 있는 날이었기 때문이었겠죠.

설 떡국@사진 연합뉴스
설 떡국@사진 연합뉴스

동네 또래들과 어울려 위뜸부터 아래뜸까지 떼를 지어 세배순례를 다니며 집집마다 차려내시는 음식을 먹던 추억도 생각납니다. 아기의 울음소리가 끊어진 시골에서 지금 이런 풍경은 구경할래야 구경할 길이 없을 겁니다.

1970년대에서 2000년대 초까지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던 때는 아들 손자가 오기를 기다리는 부모님을 생각하며 밤새워 줄을 서서 귀성열차표를 샀고, 자가용 시대가 열린 뒤론 요즘 같으면 승용차로 2~3시간 거리를 12시간은 걸려서 갔습니다.

그 시절 귀성은 고향과 부모의 품을 찾는 열망이기도 했지만 다소간 의무감도 있었다고 해야겠죠. 1960년 1월 26일 서울역에선 그런 귀성의 열망으로 인해 31명이 압사하는 비극이 빚어지기도 했습니다.

아버지를 따라 눈 덮인 조상의 산소에 성묘를 다니던 기억도 납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조상 묘소는 납골묘가 함께 설치된 가족묘지로 모아져 눈길을 헤맬 일은 없어졌는데, 요즘은 가족묘마저 없애고 납골묘로 바꾸는 경우가 흔하다고 합니다.

그 때 설 분위기는 정월 대보름날까지 길게 이어졌죠. 대보름 무렵이면 동네마다 풍물패가 나와 집집을 돌며 액막이굿을 했죠. 풍물패를 따라다니며 푸짐하게 차려진 잔칫상에서 어른들이 나눠준 음식을 받아먹던 일도 생각나네요.

대보름 때 철사 끈이 달린 깡통에 못으로 구멍을 뚫고 불붙은 나무토막이나 마른 쇠똥을 넣어 빙빙 돌리면 깡통은 불덩이가 되었죠. 그 불덩이로 논두렁을 태우는 쥐불놀이와 연날리기가 설 명절의 피날레를 장식했지요. 이 역시 산불 위험 때문에 지금은 구경할 수 없는 풍경이 되었죠.

연 줄에 불붙은 솜 고리를 끼우고 줄을 세차게 흔들면 바람을 타고 줄의 끝부분까지 올라가 줄을 태워 연을 멀리 날려 보내죠. 이 역시 액막이라고 했는데 연을 멀리 보낼수록 액을 멀리 보냈다고 좋아했죠. 연싸움도 했었죠. 사기 가루로 연 줄에 풀을 먹인 다음 상대의 연 줄에 마찰시켜 누구의 것이 먼저 끊어지느냐는 싸움이었죠.

나의 나이가 부모 돌아가실 때 나이보다 많아진 지금 나는 귀성을 하지 않고, 옛날의 부모처럼 서울의 집에서 세배를 오는 자녀를 맞이합니다. 그동안 서울의 제 집에 와서 차례를 같이 모시던 지방에 사는 동생도 자녀들이 결혼한 뒤론 각자 가족과 함께 설을 쇱니다. 형제간의 모임이 부자간의 모임으로 자연스레 분화되어가는 과정인 거죠.

머지않아 수도권에서 태어난 사람이 인구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세상이 다가옵니다. 서울의 강남에서 사는 자녀가 강북의 부모를 찾는 것은 귀성이라 하기보단 일상이죠. 그것은 경기도나 인천에서도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지방인구의 수도권 유입은 지속되겠지만, 지방의 소멸현상으로 인해 개발연대의 유입규모나 속도에는 크게 못 미치죠.

오히려 수도권에서 태어나 지방에 생활근거지를 두는 인구가 더 많아질지도 모르죠. 지금은 서울의 자녀들과 명절을 함께 하기 위해 지방의 부모가 서울로 오는 것을 역귀성이라고 하지만 앞으로는 지방의 자녀가 서울로 오거나, 수도권 사이를 왕래하는 귀성이 많아지겠죠.

저처럼 지방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터를 잡은 세대가 가면, 서울에서 지방으로 향하는 귀성도 끝나게 될지 모릅니다. 화장이 대세가 된 오늘날 수도권 사람들의 장례는 고향의 선산이 아닌 수도권의 공원묘지나 납골묘에 안장됩니다. 시골에 있던 묘소도 후손들의 성묘 편의를 위해 수도권으로 옮기는 추세라고 하니까요.

고향은 부모가 살아계실 동안의 고향이라고 하듯이 시골의 부모세대들이 타계한 뒤에는 귀성의 양태도 바뀔 것입니다. 이미 귀성에서 경조(敬祖)의 의미는 약해져, 연휴의 하나로 간주되고 있죠. 명절연휴에 국내외의 관광지로 떠나는 여행객들로 붐비는 공항을 보면 알만한 일이죠.

이런 현상은 대한민국의 소멸이 우려되는 저출산, 결혼기피, 무자녀현상과 맞물려 가속화하는 모양새입니다. 나의 선대들은 대개 5명 이상의 자녀를 낳았습니다. 나의 대에 와서 ‘둘만 낳아 잘 기르자’였고, 그것이 오늘날 출산율 0.78%가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귀성과 동일시되던 제사의 풍습이 지속될 수 있을지도 의문입니다. 과거에는 다자녀 가운데 장남이든 막내든 형편에 맞춰 부모의 제사를 모셨습니다. 하나도 안 되는 자녀로 이 풍습을 지켜갈 방도는 없어 보입니다.

저도 그렇지만 주변에서도 자식한테 제삿밥을 얻어먹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보기가 어렵죠. 작년의 한 여론조사를 보면 ‘사후에 자녀가 제사를 지내주기 바라냐?’는 질문에 여성은 2.4%, 남성 16.7%만이 '그렇다'고 했고, 압도적 다수는 반대 또는 제사상을 차리지 않는 추도식을 원했습니다. 노년세대들이 제사를 원하지 않는 것도 이같은 세태변화에 미리 적응해 가는 과정이라고 봅니다.

반세기 전의 설 풍속 가운데 우리 주변에 남아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면 지금의 설 풍속이 앞으로 반세기쯤 뒤에 어떻게 변화될 것인지 궁금합니다. 설 풍속은 도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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