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 논객에 글을 낸 게 8년 전이다. 청춘을 주제로 글을 써보라는 공모전이 시작이었고, 현대문학에 흥미가 떨어지며 에세이, 웹소설, 독립출판 등으로 시선을 돌렸던 내게 좋은 기회였다. 냅다 글을 써서 투고했다. 내용을 요약하자면 “청춘이 뭔진 모르겠는데, 그게 술자리의 ‘짠’이라면 죽어도 못 준다 이놈들아!”인 글이었다. 수상했다는 소리를 듣고서는, 대학교의 과제도서실에서 덩실덩실 춤을 췄다. 내 머리에 꽃만 꽂으면 완벽해보일 것 같았는지 심히 수상한 표정으로 쳐다봤던 후배들이 기억난다. 그리고 올해가 되면서 나는 스물 넷이 아닌 서른 둘이 되었고, 만나이로 쳐도 앞자리 3이 바뀌질 못한다는 걸 깨닫자 뭔가 억울한 심정이 들었다. 있잖은가. 잠깐 눈 좀 붙일까 하고 누웠다가 정신을 차리니 이미 축구 경기가 끝나있는 것 같은.

청춘은 끝났다. 금융권에서는 청년 전월세보증금 대출 가능연령을 만 35세까지로 설정해놨는데, 누군가에게 가서 이르고 싶다. 우리는 원한 적이 없고 출산율이 그런 겁니다! 사실 실토하건대 술을 애초에 잘 못한다. 건배를 좋아한다고 주량이 높은 건 아니니까. 다만 처음부터 ’짠‘이 없었는데 사기를 쳤다기보단, 이제 그런 이유도 없고 되지도 않는 ’짠‘을 하기에는 서로의 처지가 짠해졌다. 술 먹고 진상을 부렸다는 친구의 소식이 들려오면 나잇값 좀 하자고 저마다 한소리씩 했다. 다음날 해야 하는 일이 많으니 밤새도록 마시자는 건 환상같은 소리였다. 혹여라도 밤새며 술을 마시는 친구가 있다면, 나도 일행도 ’인생 끝났냐‘고 물었다. 애초에 밤을 새지도 못한다. 다이나믹 듀오의 고백(GO BACK)이란 노래의 가사에서는 ’하루를 밤새면 이틀은 죽어‘라고 했다. 근데 그 가사도 다이나믹듀오가 26살을 두고 꺼낸 노랜데 앞자리가 3이면 애초에 남은 술병이 아니라 남은 막차 시간을 체크하고 있다.

힙합을 좋아했고, [배치기]를 좋아했다. 다만 이제는 와닿는 노래가 좀 달라졌다. 예전에는 ’나 비록 도태된 삶이 버린 헌신짝이라도 / 이 세상살이 속에서 늘 밑진다 하여도 / 굳게 다문 입술에 품은 배짱 하나로 / 오늘도 내일도 간다‘라는 가사가 있던 「마이동풍」이 배치기의 전신같은 느낌이었다면, 요즘은 「아홉수」의 가사를 들을 때마다 가슴이 아프다. ’나이를 헛먹어서 그런가 나 자꾸 속이 타/못되게 사는게 지름길이란걸 알았거든/아 이기적인 사람 욕할 필욘 없더라/그게 삶의 지혜라니까‘ ’패기‘와 ’자신감‘이 현실의 벽에 부딪치자 내 주변은 ’오만‘과 ’근자감‘이라고 말을 바꾸기 시작했다. 대충 좌절하는 것은, 생각보다 나이를 먹어도 쉬이 고쳐지지 않는 고질병인가보다.

얼마 전 아웃소싱 도급사에서 같이 일했던 팀장님에게 연락이 왔다. 센터장으로 직급이 높아져 있었고 내가 괜찮게 일을 했던 게 기억이 났다며 관리자로 들어올 생각이 없냐고 물었다. 생각해보겠다고 말하자 당장에 뽑는 건 아니라면서 한달여의 시간을 주셨다. 편의점에서 대충 끼니를 때울 걸 사고 집으로 올라가는 길에 나는 관리자로 들어가면 편할까-라는 생각 대신, 내가 나이들고 있다는 걸 실감하고 있었다. 20대이기만 했어도 뒤도 안돌아보고 한다고 한 뒤 부딪쳐보고 안되겠다 싶으면 나가떨어져야지 생각했겠는데 조심스러워졌다. 이게 맞나. 결혼을 생각한다면 자리 잡아야 하는게 맞지. 내가 하고싶은 건 맞나? 아니, 사실 ’하고싶은‘ 건 언제나 바뀌어오지 않았나. 이제는 들어가면, 나오기도 힘들 것 같은데.

그럼 나 또한 과거의 내가 ’오만‘과 ’근자감‘이었음을 인정하는 건가 묻는다면, 그건 또 이상하게 아니다. 어떤 단어를 굳이 붙이기보단, 어떤 단어가 붙던 간에 그렇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현실‘을 말하는 30대의 내가 ’청춘‘에 있었던 20대를 보는 시선은 어쩔 수가 없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이 부자를 보고 이기심과 탐욕을 지적하고, 부자가 가난한 사람을 보고 나태함과 무지함을 지적하는 느낌에 가깝다. 시선의 차이는 입장의 차이다. 보이는 것이 있으면, 결국 사람은 보지 못하는 부분이 더 많다.

대학에 다닐 때부터 단어의 재정립이 몸에 배었다. 그래서 ’현실‘이 뭔지 계속 재정립을 하려는 오류를 범한 느낌이다. ’선악‘이 있고 ’득실‘이 있다. ’애증‘이 있고 ’호불호‘가 있다. 상반된 두 가지가 합쳐져야지만 우리는 이율배반으로 점철되어있는 생을 산다. 따라서 ’현실‘은 ’청춘‘과 붙는다. 물론 조금 다른 언어로 바뀌어서, ’이상과 현실‘로.

장담하건데 40대의 나는 또 30대를 보고서 어렸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50대의 나는 40대를 보고 그럴지도 모르지. 순진한 10대와 청춘의 20대, 현실의 30대 모두가 나의 모습이었기에 40대를 맞이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팀장에게 연락해서 나는 조심스럽게 관리자 제안을 거절했다. 3월 중에 다니게는 될 거지만 직원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나도 내가 관리직을 하게 된다면 잘할 거라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애초에 일에 내 스스로 만족하지 못하면 나는 내가 돈을 주고서라도 야근을 하는 사람이니까. 다만 하고 싶은 게 아직도 많다. 부딪히고 싶은 게 남았다. 40대에 가서 지금의 날 보고 또 늙은 소리를 할 바에는 아직 책임져야 하는 게 별로 없을 현재를 이상적으로 살고 싶다. 이게 나의 오만이라면 받는다.

얼마 전 후배가 자기가 미친 것 같단다. 구직활동을 하면서 사실상 몸은 편하고 싶은데, 엄청 힘들어 보여도 재미있을 것 같은 일이 보이면 가슴이 뛴댄다. 수상한 내가 미친놈마냥 춤 추고 있을 때 날 쳐다보던 후배 중 한명이었다. 많이 웃었다. 단언할 순 없되 바람을 담아서, 나는 당신이 앞으로도 그렇게 살길 기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얼마나 멋진 말이냐. 천길 낭떠러지로 굴러 떨어지는 와중에도, 눈은 저 위에 있는 빛을 바라보겠다는데. 체 게바라처럼.

“우리 모두 현실주의자가 되자. 그러나 가슴으론 불가능한 꿈을 꾸자.” - 체 게바라 -

자료사진 논객닷컴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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