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진의 법으로 사는 세상]

결국 파면될 모양이다. 나향욱 교육부 정책기획관 얘기다. 민중은 개, 돼지 발언이 있기 전까지 그의 존재를 몰랐으나 말 한마디에 짐을 싸게 됐다. 보도에 의하면, 그는 행정고시 출신으로 전 정권에서 교육부 장관 비서관, 청와대 행정관으로 일했다. 교육부 대학지원과장, 교직발전기획과장, 지방교육자치과장을 거쳐 지난 3월 정책기획관으로 승진했다니 엘리트코스를 밟은 유망주였다.

그런 그가 이런 엄청난 말을 기자들 앞에서 떠든 것을 보면, 상당히 경솔하고 가벼운 사람이라는 것은 알겠으나 그래도 의문이 생겼다. 행정고시를 패스하고 거기까지 올라간 것을 보면 바보는 아닐 텐데, 혹시 진의가 왜곡됐거나, 아니면 아예 그야말로 다른 맥락에서의 취중실수를 너무 확대한 것이 아닌가라는 마음에서다. 여론의 몰매를 맞고 있는 그를 위해 해명할 요소는 전혀 없는 것일까?

11일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전체회의에 나향욱 교육부 정책기획관이 참석해 의원들의 질의에 답하고 있다. ©포커스뉴스

개·돼지 발언, 어차피 다 평등할 수는 없다는 현실인식?

막말 파문을 처음 보도한 경향신문 기사(7월8자)에 따르면, 그는 경향신문 기자들과 상견례를 겸한 저녁식사 자리에서 대화 도중 “나는 신분제를 공고화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기자들은 처음에는 농담으로 생각했으나, 그는 내부자들이라는 영화를 거론하며 99%에 해당하는 민중을 개·돼지로 보고 먹고 살게만 해주면 된다고 주장했다. 또한 자신은 1%가 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지만, 어차피 다 평등할 수는 없기 때문에 현실을 인정해야 하고 “신분이 정해져 있으면 좋겠다”는 발언도 덧붙였다.

이 몇 마디의 말을 가지고 나향욱이라는 사람 전체를 평가하는 일은 불가능할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이것이야 말로 그의 핵심과 본질을 논하기에 충분할 것 같기도 하다. 어느 쪽이든 자신 없다. 그 이유는 그를 위해, 되도록 그의 입장에서, 왜 그런 말을 했을까 생각해 보았지만, 별로 떠오르는 변명거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가령 그가 즉각적으로 도대체 사람들이 너무 시끄럽고 말이 많다. 위에서 알아서 잘하고 있는데 주제넘게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것이 보기 싫다 라는 뜻에서 말했을 수도 있다. 신분제 사회라면서 그가 예로 든 미국의 히스패닉이나 흑인은 먹고 살게만 해주면 위로 올라가려고 하지 않는다고 했기 때문이다. 위로 올라가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은 나향욱의 입장에서는 현 상태에 만족하며 더 이상 불평불만이 없다는 뜻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 부분에서 사고(思考)의 혼란은 계속된다. 미국이 노예해방 이후 신분제 사회가 아니라는 것은 초등학생도 아는 사실이므로, 그가 말하는 신분제란 보이지 않는 장벽, 사실상의 차별과 이에 대한 그들의 좌절과 포기, 복종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과연 나향욱이 의미한 것이 그런 뜻이었는지, 히스패닉이나 흑인이 현실에 체념하고 위에 있는 사람들이 지시하는 대로 조용히 따르고 있다고 정말로 믿었던 것인지 의심스럽다.

나향욱이 바라는 신분제 세상? ©서울역사박물관

‘신분제 공고화’ 발언은 아는 척하는 민중에 대한 반발심?

그렇다면 그가 신분제를 공고히 해야 한다고 했을 때, 신분제의 어떤 점에 주목했을지 생각해보자. 신분제는 어떤 사회의 구성원을 다수의 민중, 소수의 엘리트 혹은 다수의 백성과 소수의 귀족으로 나누고, 주로 가문이나 혈통에 근거한 세습에 의해 직업, 권력, 사회적 역할, 부를 차지하는 제도를 말한다. 신분제가 사회발전의 걸림돌이 되어 프랑스혁명처럼 내부의 폭발을 통해서나 우리나라 같이 외부의 침략에 의해 사라진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분제를 주장한 것은 공자 맹자 시대의 이상, 어버이 같은 관리와 자식 같은 백성, 말하자면 대동사회의 질서와 평화를 그리워한 것일 수도 있다.

예기(禮記)에 의하면, 큰 도가 행해지면 전체 사회가 공정해져서 현명한 사람과 능력 있는 사람이 지도자로 뽑히게 되며 신의가 존중되고 친목이 두터워진다. 그렇기 때문에 권모술수가 필요치 않게 되고 도둑이나 불량배가 사라진다. 이리하여 집집마다 문을 열어 두고 닫는 일이 없다. 이러한 사회를 가리켜 대동이라 한다고 한다. 상당히 아름답고 목가적인 그림이다.

그러나 이런 모습은 역사에 있어 한번도 실행된 적이 없다. 무엇보다 능력 있는 지도자와 세습에 의해 물려받은 지위는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고, 귀족세력의 탐욕과 무능, 시대착오적 반동이 자유와 평등의 꿈을 실현하는데 방해가 되었을 뿐이다. 그러므로 신분제는 그 자체의 도덕적, 규범적 결함에 의해 소멸해간 것이지, 누가 일부러 막고 있는 것이 아니다. 신분제의 정연한 질서, 대동사회의 소망이 허구라는 것은 역사와 사회에 조금만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쉽게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나향욱이 굳이 신분제를 말한 것은 자기와 같이 유능한 관리가 잘 하고 있는데도 아무 것도 모르는 민중이 정도 이상으로 아는 척을 한다든가, 이의를 제기하는 현실을 질책하려는 것이 아니었을까.

‘개돼지’ 발언 이후 인터넷커뮤니티에서 화제가 된 셰퍼드 사진. ©배성재 아나운서 트위터 캡쳐

관리가 정말 유능한 지는 국민이 판단할 몫

사실 능력 있는 지도자, 어버이같이 백성을 사랑하고 아끼는 지도자라는 관념은 여전히 유효하긴 하다. 실제로 무능하거나, 서민을 통치의 객체로만 인식하고 있는 지도자와 관리가 태평성대를 만들어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인류의 정치사는 훌륭한 지배자와 헌신적인 관리를 뽑는 투쟁과정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습왕조를 몰아내고 보통선거에 의해 대통령을 선출하고, 고시제도나 공무원시험을 통해 똑똑한 사람을 관리로 충원하려는 것도 우리의 생명과 재산을 안심하고 맡길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도자와 관료제도에 대한 신뢰는 제도만 갖추어졌다고 해서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다. 가령 우리와 국토의 크기가 비슷한 일본과 영국을 들어보자. 일본은 명치유신을 통해 지도층이 위로부터의 혁명을 완성하고, 논란의 여지가 없지는 않지만 어쨌든 국가를 열강으로 이끌었고 지금도 세계의 부국으로서 한 축을 차지하고 있다. 영국도 엘리자베스, 빅토리아 여왕을 비롯한 저명한 총리들의 지도하에 19세기에는 유일한 강대국이었으며, 지금도 학문, 경제, 문화, 예술의 모든 분야에 있어 탄탄한 인프라가 갖추어져 있다. 소위 브렉시트도 그에 대한 향수일 것이다.

그들에게는 나라에서 시키는 대로 하면 민중의 이익이었지만, 이에 비해 우리는 국가에서 하라는 것과 반대로 해야 살아남는 전통이 있었다. 임란, 호란은 물론이고 가까운 6.25 때도 서울사수라는 말을 믿은 시민은 끊어진 한강다리를 바라보며 죽음의 눈물을 삼켜야 했다. 관리가 정말 유능한 지와 국민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고 있는 지, 국민의 신뢰를 얻을 만한지는 피치자인 백성이 판단할 몫이지, 공무원들 스스로 자찬할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인가? 이것저것 닥치고 좌우지간 백성들이 너무 떠들고 설친다고?

‘함량미달’ 관리를 걸러내지 못하는 시스템©픽사베이

‘함량미달’ 못 거르는 시스템이 더 문제

우리나라 사람이 좀 시끄러운 것 같기는 하다. 솔직히 걱정되는 면이 많다. 딱히 무엇이라 찍어 지적할 수는 없지만, 의무는 방기한 채 권리만 찾는 이기적인 행태, 뇌물을 욕하면서도 갈비나 굴비선물세트는 김영란법 적용대상에서 빼야 한다고 주장하는 농어민 등의 행동에서 예시되는 바와 같이 특정집단에 한정되지 않는 각계각층의 모럴해저드, 깊이와 논리적 반성 없이 즉물적 반사적으로 일어나는 반응과 행동, 입으로는 ‘세월호를 잊지 않겠습니다’ 라고 떠들지만 여전히 무심한 안전과 규율, 규칙에 대한 태도, 법과 제도를 무시하는 대범함(?) 등등 이루 열거할 수 없을 정도이다.

그러나 결점 없고 약점 없는 국민이 어디 있으랴. 만약 그런 부분이 있다면 계도하고 선도하는 것은 바로 관리의 몫이다. 더군다나 백성들이 떠들고 항의한다는 것은 그만큼 교육수준이 높아졌고, 아는 게 많아졌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관점을 달리해서 보면 이는 기뻐할 일이지, 시끄럽다고 귀찮게 여길 일이 아니다. 정말 유능하고 겸손한 공복이라면 이렇게 똑똑한 백성들을 다스리기 위해 열 배 스무 배 더욱 분발하고 노력해야겠다고 생각했어야 한다.

헬조선이든 흙수저든, 우리는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이고, 한류가 유행의 척도가 되는 것을 목도하고 있다. 국민도 노력했지만, 어떻게 폄하하든, 공무원들과 지도자도 괜찮게 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신문 보도만 가지고는 지금까지 그런대로 잘해왔던 관리들 중 한 명인 나향욱을 아무리 편들어 변호해 주려고 해도 불가능했다.

만일 그가 원래 이렇게 변명이 불가능할 정도의 인물이었고, 그럼에도 공무원 시험을 통과해 교육부의 요직을 차지했다면, 이는 그의 과오보다는 그런 사람을 걸러내지 못한 우리 시스템의 잘못이 더 크다고 본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얼마나 슬픈 일이랴. 나는 우리나라를 위해 차라리 여기에는 뭔가 오해가 있다. 지금은 다짜고짜 여론의 뭇매를 맞고 있지만, 그는 결코 그 만큼까지 수준 낮은 인물이 아니다. 그가 하고 싶은 얘기는 제대로 꺼내지도 못했다 라고 믿고 싶은 것이다. 결국 나향욱을 위한 변론이 아니라 우리나라를 위한 슬픈 변론이 되겠지만 말이다.[오피니언타임스=김형진]

 김형진

  변호사

  전 대우전자 법률고문

  전 대한주택공사 법률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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