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수안의 동행]

청춘은 푸르른 봄이다. 푸를 청(靑), 봄 춘(春) 푸르다 못해 시퍼렇게 멍이든 것 같다. 또한 빛나는 여름이다. 하지만 이상기온으로 폭염에 시달리는 청춘은 시들어있다. 나의 휴대폰으로 요란한 경보음을 내며 ‘긴급재난문자’라며 폭염경보가 날아들었다. 너무 훤한 빛에 눈이 부셔 한치 앞을 내다보기 어렵다. 뜨거운 몸과 마음으로 살아감에 있어, 벌써 지친다. 갈증이 밀려온다. 청년들은 불빛을 보고 달려드는 벌레들처럼 몰려간다. 타죽을 수도 있는 건데. 포화(飽和)상태는 포화(砲火)상태를 불러왔다. 무력(武力)앞에 우리는 무기력해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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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F의 여파가 기저에 깔려있고, 세계적 경제 위기 속에 놓여있는 우리는 편리한데 편하지는 못한 삶을 살고 있다. 우리의 선배들은 해방과 독립을 꿈꿨고, 가난으로부터의 해방을 꿈꿨고, 민주화를 꿈꿨다. 하지만 우리가 영점조준을 해야 할 과녁은 실존하지 않아서 조준하기가 어렵고, 범위를 가늠하기도 어렵다. 깊고 어두운 터널을 우리는 지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터널 끝에 환한 저마다의 "무언가"가 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더위를 식히려는 선풍기가 돌아가는 소리만 안쓰럽게 들리고 있다. 시련은 견디기에는 여름이 낫다. 무더위에 묻어버릴 수 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사실은 가을은 반드시 온다는 것이다. 창문을 열자 찬바람이 얼굴을 스쳤고, 바람 맞은 내 얼굴은 조급해졌다. 

나는 젊음의 힘을 무기력으로 대체해서 쓰고 있다. 햇볕 아래 아이스크림처럼 녹아 줄줄 흐르고 있다. 햇볕은 무겁게 내리쳤다. 폭염 속에 열정은 없었다. 이미 다 타버린 듯 염증과 갈증만이 가득했다. 키위새가 생각났다. 마음은 간절한데 왜 무기력에 노예가 되고 마는지 퇴화되어버리고 날지 못하고, 날아야 하는 이유도 찾을 수 없었다. 내 꿈은 폭염 속 달걀처럼 터져 흐르거나 닭이 되거나 둘 중 하나가 되겠지. 제대로 서지 못하는 달걀에게는 결과가 이것뿐이다. 여름을 그냥 보내서는 안 된다. 서늘한 귀뚜라미 울음소리가 들리기 전에 시련을 끝내야 한다. 매미 울음이 그치고 귀뚜라미가 울기 시작하면 늦는다. 서둘러야 한다.

길바닥에 아무렇게 버려진 담배꽁초들을 본다. 누군가들에게 여러 번이고 짓밟히겠지. 담배처럼 불꽃이 타들어가며 크기는 작아지고, 연기만 자욱하고 재만 남겠지. 누군가의 꿈은 때로는 그렇게 스러진다. 집에 돌아와 화장을 지우니 초라하다. 비참한 기분까지 든다. 사회적 얼굴을 지운다. 왈칵 눈물이 쏟아질 것 같다. 무더위에 눌리듯 우울감에, 가위에 눌리듯 무력감에 눌린 나는 어느 날 문득 내가 일찍 늙어버려서가 아니라, 아직 젊어진 상태로 있어서, 내가 아직도 젊어서 많은 문제들이 야기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감각이 너무 예민하게 돋아있고, 피도 끓는 청춘이라 분노도 욕심도 차고 넘쳐서 의욕도 많아 흘러 넘쳐서 말이다. 폭염 속에 지치듯 피도 끓을 만큼의 뜨거운 열정에 사로잡힌 나의 열감 때문에 무기력해진 것이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시들시들해서가 아닌, 아니 공존일지도 모르겠다. 대립되고 모순되는 것들의 위험한 공존. 도대체가 화해할 줄을 모른다. 이 모순을 못 견뎌 내가 불편한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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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올챙이이던 때를 잊은 개구리인 어른들을 만난다. “옛날에는 말이야......” 그것은 말 그대로 ‘옛날의 말’이다. 요즘에는 ‘요즘의 말’이 필요하다. 하늘 아래 더 이상 새로울 것이 없어 보여 희망마저 없는 것 같다. 꿈꿀 수 있는 것도 이미 시중에 출시되어있는지도 모른다. 우리의 꿈도. 저당 잡힌 청춘들. 블로그와 스마트폰 어플로 맛집이 검색되어지는 요즘에는 간판이 없는 맛집에는 손님이 없다. 소문이 없으면 손님도 없는 법이다. 돈이 되지 않는 지식이나 지혜는 쓰레기가 되어버린다.

아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내가 알고 있다는 것을 남에게 알리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더위를 식히려 잠수를 했다. 내 위에는 지폐가 호패인 세상도 있다. 그곳에서는 돈이 지위와 품격을 만든다. 돈이 없으면 교양도 없는 것으로 간주해버린다. 예술품을 소장할 수 없으면 교양도 없는 것이다. 신분 차이를 느끼며 내가 하찮은 사람으로 느껴지고, 그들과 괴리감 및 이질감을 느끼기에 충분한 곳이다. 나는 많은 돈을 벌기에는 가진 게 너무 없고, 그런대로 살기에도 가진 게 너무 없다. 하지만 이룬 것은 없어도 얻은 것은 많다. 그러나 가치 있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으므로 무가치한 것이 되어버린다.

빠르게 흘러가는 요즘 세상에는 빠르게 자신을 보일 수 있는 증거가 필요하다. 사람은 확인을 하는 것을 믿고 좋아하기 때문이다. 나는 몰랐다. 뉴스에서 만나는 일은 뉴스에서만 일어나는 일이라는 착각을 했다. 내 주변에서 뉴스에서 본 그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지만 내게는 충격이었다. 정말 자기 밥그릇만 챙기면 윤리든 공익이든 다 상관없는 건가. 그런 사람들이 있다는 자체가 신기하게도 내게는 놀라운 일이었다. 잠수 중인 내가 있는 곳은 물속이라 숨도 막히고 춥고 말도 할 수가 없고 내 위에 떠 있는 기름덩어리들과 섞일 수도 없다. 물과 기름이니까.

기성세대와 신세대는 달라야 한다. 기성세대로 불리는 사람들이 가진 좋은 정신과 생각 문화 등은 본보기로 삼고 배워야하되, 나쁜 관습은 버려야 한다. 그들의 관습을 따라하며 그들의 그런 모습을 닮아버리면 그건 젊은이가 아니고 신세대가 아니다. 내가 사랑하는 말 중에 하나가 요기베라의 말이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아직 인생 다 산 것이 아니다. 더 살아보고 차근차근 따져보자. 누가 옳은지. 하지만 우선 나는 생각했다. 당장 이 세상을 바꿀 수 없다면 나를 먼저 바꾸자고. 세상과 내 생각을 연결 할 연결고리는 진실과 진심이다. 나는 주체적으로 내 삶을 살고 무엇보다 내 자신에게 떳떳하고 싶다.

어느 날 우연히 듣게 된, 이름 모를 중학생의 버킷리스트가 나를 자극했다. 그 친구의 1번에는 이런 내용이 적혀있었다. <1. 돈을 주고도 일하고 싶은 직장에서 일하기.> 나를 돌아봤다. 나는 스무 살이 되기 싫었다. 스무 살이 되면 어른이 되어 책임감과 신중함을 등에 져야만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뭔가 좋은 게 있겠지’하며 시간을 보냈고, 어김없이 나는 스무 살이 되었다. 스무 살의 어느 날, 침대에 앉아있다 일어서는데 갑자기 등에 화살이 꽂힌 것 같았다. ‘아 나도 이제 성인이구나. 내 말과 행동에 책임을 져야하고 신중해져야겠구나.’라는 막중한 화살이 내 등에 꽂혔다. 그리고 그 스무 살 무렵, 젊음도 처음 경험해보는 것이라서 처음에는 조급하기만 했다. 내 젊은 날들이 곱게 채워지기만 바랐다. 알콩달콩하고 풋풋한 연애도 많이, 사랑도 많이 하고 되도록 빨리 많을 것을 이루고 싶었다. 하지만 깨닫게 되었다. ‘젊음’이라는 기간은 연애나 사랑에서든 일에 있어서든 끊임없이 어설프고 서글프게 실패하고 도전하고의 반복이라는 것을. 도전하고 실패하면 포기하고, 포기가 되지 않으면 또 도전하고, 또 실패하면 또 포기하다가 포기가 되지 않으면 또 도전하고……. 그렇게. 조금씩 늙어가는 청춘을 맞이한 내 앞에는 결혼, 출산, 육아 등의 언덕 혹은 허들이 곳곳마다 서있을 것이다. 하지만 최소화하더라도 꿈은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많이 실패했다. 경험담은 온통 실패담이다. 하지만 도전을 계속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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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1학년 때, 입학하자마자 어떤 친구들은 말뚝 박기를 했다. 이상하게도 내 눈에는 그게 어색하고 어설퍼보였다. 꼭 털털한 이미지를 만들기 위한 놀이처럼 보였다. 결국 그 친구들은 말뚝 박기를 하다가 넘어져 다치고 코피를 흘려야 했다. 요즘에는 “왜 그것을 하느냐”는 질문에, “대세라서. 유행이라서.”라고 답하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 대세와 유행에서 도태되어버리면 안될 것 같다는 생각 또는 드러나지 않은, 남들에게 보이는 나의 모습에 대한 생각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내 눈에는 자꾸만 남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애쓰는 것 같아보였다. 놀 줄 모르고 남들 하는 대로만 하고 보이는 모습을 지나치게 의식해서 연기하는 것 같아 보이니까 어색하고 어설퍼 보이기만 했다.

'요즘 청춘들은 멘토만 찾고 메모만 해' 그런 생각을 한 적도 있다. 그만큼 뭘 어떻게 해야 될지, 왜 해야 하는지 모르는 것 같았다. 이 모든 게 다 불안이다. 남들에게 어떻게 보여질까하는 불안감, 뭘 어떻게, 왜 해야 하는지에 대한 의구심이 드는 불안감. 또 그들은 자신을 드러내는 것으로 무언가를 해소하려는지도 모른다. 청춘은 불안의 아이콘이다. 사람은 불안하다. 그게 정상이다. 청춘이 불안한 것은 더욱 더 정상이다. 앞으로 어떻게 펼쳐질지 모르는 미래를 목전에 놓고 있는 상태에서는 그게 정상이다. 현실의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불안해하고 도전하고 실패하고 그게 정상이다. 애석하게도 불안을 지우는 일은 오늘을 마지막 날인 것처럼 열심히 사는 것이다.

공부하는 것도, 일에 있어서도, 노는 것도 사랑하는 것도 제대로 해야 한다.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열심히, 제대로 하는 것은 칭찬받을 일이 아니다.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다. 감수성도 감수해야 한다. 기쁘면 기뻐하고, 슬프면 그대로 슬퍼하고, 아프면 그대로 아파하고 그런 과정을 거쳐야한다고 나는 감히 주장한다. 해야 할 일이 많은 청춘은 바쁘다. 청춘은, 젊음은 어설프다. 그래서 어여쁘다. 나는 나의 길을 간다. 꿋꿋하게, 누가 뭐래도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길을 가려고 한다. 꿈이라는 것을 항상 마음 안 책장에 꽂아두고 잊힐 때쯤이면 꺼내보며 언젠가는 온전히 내 것으로 밖으로 꺼낼 수 있도록 감수하고 포기할 것들은 포기해가면서라도.

어릴 적에 나는 모두가 종이학을 접고 있을 때 종이학에 관심이 없었다. 내 눈에는 예쁘지도 않았으니까 아무런 도움도 안 된다는 듯이 외면했다. 그때의 내가 몰랐던 것을 불과 몇 년 전에 알게 되었다. 아이들은 마음을 접고 있었다. 접혀있었기에 못 봤던 것이다. 내 눈에는 다 똑같은 모양과 크기의 종이학들이었기 때문에. 사실 아이들은 각자의 마음과 소원을, 그리고 꿈을 다 똑같은 크기와 모양으로 접어놨던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종이학 접는 방법의 설명서밖에 들어 있지 않아서 학을 접을 수밖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아이들 모두가 종이학이었고, 나 역시 종이학 중의 하나였다. 지금도 아이들은 종이학을 접고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부디 날개가 젖지 않기를. 그리고 어른 놀이 중인 우리는 종이학 접는 방법도 잊었거나 관심이 없을 수도 있다. 조금은 씁쓸하다.

요즘 ‘금수저’와 ‘흙수저’라는 말이 자주 쓰이고 들린다. 나도 엄연히 ‘흙수저’다. 나는 내가 ‘흙수저’라는 것에 대해 자부심이 있다. 흙은 모성적이다. 자양분이다. 큰 잠재력과 가능성을 가지고 있고, 생명력의 근원으로 볼 수 있다. 결국 모든 것을 키우는 것은 흙이다. 돌아가는 곳도 결국 흙이다. 미리 본질에 와 있는 것일 뿐. 금이 해낼 수 없는 일들을 흙은 해낸다. ‘금수저’에게는 “‘금수저’로 태어나신 것을 축하합니다.” 라며 축복하면 그만이다. 아직 나의 현실은 방 안에서 망상 같은 꿈만 꾸는 중이지만, '좋은 날이 올 거야' 라는 희망은 너무도 가느다란 가닥이라 손에 잡히지도 않고 보에 보이지도 않는 상태지만 "오직 살아있다"라는 것만이 모순적이게도 내게 희망이다. 살아가면서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는 불안이 곧 희망인 것이다. 나의 좌표 상의 위치는 어디쯤인지. 어떻게 나의 값이 커지고 작아질지 모른다. 아직 나는 미지수다. 내가 다음에 내릴 정류장은 어떤 곳일까. 그리고 우리는 제대로 가고 있는 걸까.[오피니언타임스=최선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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