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수안의 동행]

노인도 사람이다. 늙어버린 청춘일 뿐이다. 어쩌면 ‘마음이 젊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더딘 사회’라고 이름 붙여도 좋을 듯싶다. 록(rock) 음악을 좋아하는 40대가 있다. 하지만 록페스티벌에 가고 싶어도 젊은 사람들만 있는 곳에 자신이 가도 될지 고민을 거듭하다가 결국 포기하고 만다. 하물며 중·장년층을 건넌 노년층은 어떻겠는가. 나이가 들수록 입은 닫고 지갑을 열라고 한다. 돈이 있어야 어른 대접도 받는 것이다.

“젊을 때 뭐했어? 돈 좀 벌어놓지. 자기가 게을렀던 탓이지.” 아픈 청춘이라며 칭얼대면서도 이런 말을 쉽게 한다. “노인을 공경하지 않는 젊은이의 노후는 결코 행복할 수 없다”라고 탈무드에도 적혀 있지만 우리는 역지사지(易地思之)의 태도가 없다. 진심에서 우러나는 공감의 태도가 없다. 그저 형식적으로 공경하고 양보해야 하는 존재로 치부해버리지는 않나. 겪어보지 않으면 제대로 알지 못한다. 공감이 결여되어 있으면 어떠한 문제도 바르게 해결할 수 없다. 반대로 이야기하자면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보고, 이해해보고, 경험해보고 공감한다면 좋은 결과를 가져 올 수 있다는 것이 나의 믿음이다.

©픽사베이

그 좋은 사례가 ‘유니버설 디자인(universal design)’의 어머니로 불리는 산업디자이너 패티 무어(Pattie Moore)의 이야기다. 유니버설 디자인이란 장애의 유무나 연령 등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들이 제품, 건축, 환경, 서비스 등을 보다 편하고 안전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설계하는 것으로, ‘모두를 위한 설계(Design for All)’라고도 한다.

뉴욕에 살던 젊은 디자이너 패티 무어는 1979년부터 3년 넘게 노인으로 변장하고 거리를 활보했다. 패티는 ‘직접, 공감’을 하고자 노인의 모습으로 온갖 생활공간과 생활용품을 접했다. 무어는 어릴 때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그래서 노인들의 사정을 잘 안다. 코카콜라 병을 디자인한 레이먼드 로위가 차린 대형·유명 디자인회사에 다니던 패티는 아무도 노인을 위한 디자인에 관심이 없다는 사실을 절감한다.

패티는 TV방송국 분장사로 있던 친구의 도움으로 자신의 모습을 85세 할머니로 만들었다. 자신의 몸을 보조기구에 묶어 허리가 굽게 만들고, 진짜 노인처럼 느끼기 위해 자신의 귀를 막아 잘 들을 수 없도록 했다. 특수한 안경을 써서 앞도 잘 볼 수 없게 만들었다. 이렇게 자신의 실제 나이보다 세 배나 늙게 변신한 패티는 지팡이 하나를 들고 세상 밖으로 나갔다.

변신하자마자 세상의 많은 것들이 노인들을 위해 디자인되어 있지 않음을 느낄 수 있었다. 노인으로 변신하자 평소 친하게 지내던 이웃들조차 낯설게 느껴졌다. 그녀가 이런 경험을 하려고 마음먹은 것은 자신의 할머니 때문이었다. 패티는 할머니가 나이가 들면서 생활하는 데 많은 것이 힘들어져 즐거움을 포기해야만 하는 것을 보고 안타까웠다. 세상에는 할머니와 같은 사람들이 많은데 그런 사람들을 위한 제품을 개발하려는 디자이너들이 거의 없음을 깨닫고 자신이 그 일을 하기로 결심했다.

노인으로 생활한다는 것은 어렵고 힘들고 위험한 일의 연속이었다. 더욱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사람들이 노인이 된 그녀를 무시하고 때로는 농담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점이었다. 그녀의 실험은 3년 동안 캐나다와 미국 전역에 걸쳐 100개나 되는 도시에서 몰래 계속되었다. 그녀는 이런 경험을 통해 세상을 다른 시각으로 볼 수 있었다. 늙는다는 것은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었다. ‘장애’란 우리들이 만든 제품과 건축에 의해 충분히 극복될 수 있는 것이지 나이나 건강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깨달음이다. 하지만 현실은 문화마저도 젊은이들 위주로 설계되어 있는 것이 대부분이라는 약점을 안고 있다.

지난 8월5일 세종시 금남면에서 독거노인이 부채로 더위를 식히고 있다. ©포커스뉴스

노인복지에 관한 문제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노인들의 자아실현 및 문화·여가생활 저변의 결여와 이를 확대하는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빈곤 노인의 쓸쓸한 삶에 대한 진심어린 관심을 담은 진정한 복지 체계 마련이다.

나의 옆집 할머니는 70대지만 나보다 더 곱게 화장하고 ‘또각또각’ 힐을 신고 다닌다. 다른 76세 할머니는 꾸준한 영어 공부를 통해 영어 성경을 필사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많은 어르신들은 6·25전쟁과 가난 때문에 젊은 시절 배우지 못한 한을 풀기 위해 학업에 대한 열정과 도전 의지를 불태우지만 그 간절함에 비해 교육의 문턱은 높다.

당장 먹고 사는데 모든 것을 걸어야 했기에 초등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한 어르신들에게 바로 EBS 강좌를 들려주는 건 무리한 요구일 수 있다. 그 전에 문해교육이라는 중간계단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문해교육을 가르칠 교육자 수는 현저히 부족하다. 다들 임용고시를 치르고 교사가 되려하지 문해교육이라는 길을 걸으려 하지 않는다. 문화센터도 상황은 비슷하다. 문화센터 강좌 등록을 위해 새벽부터 줄을 서는 어르신들이 많지만, 그들이 즐기고 자아실현을 할 공간은 좁고 주변의 시선은 따갑다.

노인 빈곤 문제도 심각하다. 우리나라 노인빈곤율(49.6%)과 고령자 자살률(인구 10만명당 55.5명)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1위다. 노인 1인당 월 소득은 100만원을 밑도는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우리나라 50세 이상 국민이 노후에 최저 생활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월 생활비는 부부 기준 160만원, 개인기준 99만원으로 추산된다.

국민연금연구원 이은영 주임연구원은 “노인 빈곤지표들이 기초연금 시행 이후 개선되고 있지만, 급격한 고령화로 노인인구는 급증하는데 상당수 노인의 노후준비는 미흡한 실정”이라며 “노인빈곤은 당분간 심화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공적연금을 강화하는 등 지속적인 개선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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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주 육아를 둘러싼 갈등도 어르신들의 주름살을 늘어나게 하고 있다. 2012년 기준 조부모가 손주 육아를 맡는 가구는 250만 가구로, 맞벌이 가구 510만 가운데 50%에 이른다. 2015년에도 전국의 맞벌이 부부 절반 정도가 부모에게 자녀 양육을 맡기는 것으로 나타났다. 심지어 황혼 육아 시대에 할머니를 위한 맞춤형 유아용품까지 등장했다.

맞벌이를 하며 육아와 직업 사이 위태로운 줄다리기를 하는 워킹맘은 부모에게 의존하게 된다. 맞벌이할 수 밖에 없는 현실 속에서 워킹맘이 기댈 곳은 친정과 시댁 어르신들이다. 그러나 연로한 어르신 입장에서 하루종일 뛰어다니는 손주를 키우는 건 여간 부담스러운 게 아니다.

2013년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수도권 여성 노인 300명을 대상으로 손주를 돌보는 노동시간을 조사한 결과, 이들은 하루 평균 8.86시간을 사용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사실상 손주 육아가 직업인 셈이다. 조부모들 사이에서는 ‘손주병’을 ‘직업병’으로 부르는 웃지못할 상황도 생겨났다. 뭇사람들은 용돈 벌이도 하고 좋지 않으냐고 하지만 여린 몸과 마음에 육체적 정신적 스트레스가 더해져 병이 깊어진다.

육아를 개인과 가정의 문제로 환원시키는 사회구조적 시스템을 해결하지 않는 이상 ‘손주병’은 사라지기 어렵다. 경제적 부담 없이 아이를 믿고 맡길 수 있는 보육 시설을 늘리고 자유롭게 육아휴직 등을 사용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를 조성해야 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주장이다.

자녀 양육을 조부모에게 의존하는 현실은 베이비부머 세대에게는 특히 억울하다. 그들은 젊은 시절 모진 시집살이를 하며 혼자 도맡아 살림과 육아를 하고, 황혼에 접어든 지금은 쉬거나 놀지도 못하고 일명 며느리 시집살이를 하는 실정이다. 그들은 말한다. “우리가 제일 불쌍하지. 젊어서는 시집살이에 여자니까 참고 살아야 하는 줄 알았고, 이제는 며느리 눈치 보며 살아야지. 괜히 음식 해준다고 해도 싫어해. 그냥 관심을 갖지 않는 게 도와주는 거지.” 그 독백 속에는 한탄이 가시처럼 숨어있다.

육아 갈등으로 가정의 불화를 겪기도 한다. 경기도가족여성연구원에서 300가구를 대상으로 조부모의 양육 현황에 대해 설문조사한 결과 맞벌이 주부는 부모에게 의존하면서도 불만이 있다는 응답이 48.4%에 달했다. 43.1%가 육아 방식의 불일치를 문제 삼았다. 이것이 깊어져 곧 우울증까지 불러 온다. 실제로 육아 스트레스로 인해 우울증에 걸린 시어머니가 며느리가 둘째를 임신하자 만삭인 며느리를 목 졸라 살해하고 자신도 자살 시도를 한 사건도 있었다. 양육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며느리가 시어머니의 뺨을 때린 사건 역시 유명하다.

왜 모두가 아파야 하는 걸까. 가족이라는 아군끼리 싸우는 내란을 초래하는 지경까지 이르렀을까. 서울 서초구나 강남구처럼 이른바 손주 양육 수당을 지급하는 지방자치단체도 등장했고, 여러 지자체에서 ‘조부모 육아 교실’이라는 이름으로 교육 프로그램 등의 지원을 하고는 있다. 그러나 모든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미미한 수준이다.

온기 어린 손길로 노인들의 메마른 손을 잡아 주는 것이 필요하다.©픽사베이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다.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다. 누가 어떤 자리에 있든 그 사람의 역사에는 많은 사람들의 손길이 있었을 것이다. 외로움과 그리움도 질병이다. 아픔으로 조용히 신음하는 노인들이 살아가기엔 우리 사회는 너무도 버겁다.

노인에 대한 관심과 보살핌의 손길이 절실하다. 그들도 젊었을 때가 있었다. 인권을 내려놓고 가난을 참으며 나라에 공헌했고, 우리는 그들의 희생 위에 서 있다. 이제는 뒷방 늙은이로 밀려난, 바람 빠진 풍선과 같은 그들은 탄성을 잃어 날지 못하고 회복이 어렵다. 바늘 끝만 닿아도 터질 듯 위태롭다.

봄에는 젊은 날의 자신을 그리워하고, 여름에는 폭염에 시달리며, 가을이면 찬바람에 또 한해가 지나감을 서러워하고, 겨울에는 현실처럼 얼어붙은 빙판길을 조심해야 한다. 어르신들의 사계절은 그러하다. 탄탄하고 현실적인 정책을 기본으로 그 위에 마음의 따뜻한 온도로 데워진 온기 어린 손길로 그들의 세월로 주름진 메마른 손을 잡아 주는 것이 필요하다. 나이가 들면 다시 아이가 된다는데 어쩌면 그들이 육아 돌보미를 하는 것보다 누군가가 그들의 돌보미가 되어주어야 할지도 모른다.

늙은 호박 겉은 단단하게 메마르고 생기도 없지만 속의 빛은 곱고 여리다. 여문 씨는 진주알처럼 영롱하고 달큰하며 부드럽고 깊이가 있다. 애호박은 물기를 머금어 풋내가 난다. 저마다의 가치가 있다. 모든 사람의 인권은 존중받아야 한다. 감격으로 가득 찬 노을로 물들어야 할 황혼의 어른들은 가난하고 높으며 외롭고 쓸쓸하며 위태롭다. 아프다. 아프니까 노인이다.

얼마 전 ‘백세인생’이라는 노래가 사방에 울렸다. 100세 시대란다. 노인의 몸으로 오래 살아야 한다. 늙고 가난한 몸으로 견뎌야 한다는 것은 어쩌면 형벌이다. 내 부모님을 봉양하듯 다른 어르신들 봉양하라는 격언도 고리타분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다만 세상에 변하더라도 변하지 않는 진리가 있다. 우리도 늙는다. 우리 모두 늙는다.[오피니언타임스=최선희]

 최선희

 오피니언타임스 청년칼럼니스트

 건축회사 웹디자인 파트에서 근무 중인 습작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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