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순의 그시절 그노래] 한겨레신문의 사설과 관련하여

살다보면 참 야릇한 일도 겪게 됩니다. 아무 잘못도 없이 뜻밖에 꾸지람이나 질책을 당하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이를 일컬어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라고 하지요. 무슨 뚜렷한 잘못을 범하고 호통을 당한다면 그것은 마땅히 수긍해야 하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는 과연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요?

2017년 1월17일자 한겨레 사설

2017년 1월17일자 한겨레신문 사설(社說)을 보다가 소스라쳐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너무도 문화파괴적이고 오만방자하며 집필자 개인의 치졸한 견해가 바탕이 된 논조(論調)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해당 사설제목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재용 구하기 위해 흘러간 노래 틀고 있나”

한겨레 사설의 본문은 얼마 전 이재용 삼성 부회장이 구치소에서 풀려난 것을 두고 냉소하며 비판하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최근의 현실 문제를 논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특정인의 석방명분으로 법원이 상투적 명분과 수법을 쓰고 있다는 문맥속의 까칠한 비판을 충분히 짐작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왜 비유의 도구로 얼토당토하지 않게 ‘흘러간 노래’를 마구 동원하고 있는 것입니까? 대체 ‘흘러간 노래’가 무슨 잘못을 그리 크게 했기에 사설의 집필자는 이런 방식의 서술을 하고 있단 말입니까? ‘흘러간 노래’쪽으로서는 참으로 억울하고 분통이 터질 노릇입니다.

필자는 ‘흘러간 노래’가 담겨 있는 고음반(古音盤)을 수집하여 가사를 채록하고, 그 작품에 담겨 있는 역사성, 문학성, 예술성, 민중생활사적 특성까지 주의 깊게 관찰 분석하며 연구하는 일에 오래도록 종사해온 대중음악사연구자입니다. 원래 전공은 한국현대문학사입니다만 시인 조지훈(趙芝勳, 1920~1968) 선생이 1930년대 대중가요에 대하여 그 소중한 가치를 기록한 논문에 커다란 감화를 받은 이래로 한국의 대중음악에 대한 남다른 학문적 관심을 줄곧 지니고 있습니다.

1990년대 초반부터 필자는 한국의 대중음악이 지니고 있는 놀라운 기능성, 작용력, 당대 현실과의 밀접한 맥락과 교류 등에 관해 주의 깊게 관찰하며 학술논문, 대중음악사테마 에세이, 학회에서의 발표와 세미나, 라디오나 TV에서의 가요관련 프로그램 진행이나 참여, 언론지면에서 가요관련 칼럼의 집필 등으로 바쁘게 살아온 지 그 세월이 무릇 기하(幾何)이리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가요란 장르가 당대주민들의 삶에서 미치는 영향력과 작용력이 대단히 막중하며 문화적 가치 또한 크고 소중하다는 사실을 소스라쳐 깨닫게 됩니다.

가요특집 TV 토크쇼에 출연중인 이동순 교수

2, 30년 전만 하더라도 학문에서 대중음악사가 차지하는 위상은 매우 초라하며 관심권 밖에 놓여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과연 그것이 학문의 대상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한 의구심까지 가졌었지요. 대학원에서 학위논문을 작성하는 연구자가 대중가요를 테마로 논문을 작성한다고 계획서를 발표하면 발표장에서 하나의 웃음꺼리가 되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대학의 전문적 연구자들조차 대중가요에 대한 편견과 무지로 가득하던 것은 하나의 일반적 경향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젠 엄청나게 달라졌습니다. 국내 대부분의 대학에서 대중음악사, 혹은 대중가요를 테마로 한 각종 학술논문들이 우후죽순(雨後竹筍)처럼 쏟아져 나오고 있는 실정이지요. 대중가요를 테마로 한 박사학위논문도 이미 상당수입니다.

필자와 동일한 관심을 갖고 있는 여러 학자, 연구자들이 모여서 한국대중음악학회(韓國大衆音樂學會), 한국고음반연구회(韓國古音盤硏究會) 등 학회까지 조직해서 자료수집 및 실증적(實證的) 연구에 골몰하고 있지요. 뿐만 아니라 필자는 수년 전 ‘옛가요사랑모임 유정천리(有情千里)’란 이름의 민간단체를 조직하여 ‘남인수전집’ ‘이난영전집’ 등 다수의 음반발간, 가요사유적지 답사, 대중가수의 평전 및 대표곡집 발간, 노래비 건립, 축음기음반 감상회 등 관련기관들조차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커다란 사업을 묵묵히 해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활동에 대하여 언론이 격려는 해주지 못할망정 이렇게 찬물을 끼얹는 몰염치한 처사는 도저히 용납도 묵과(默過)도 해낼 도리가 없습니다. 이런 일에 종사하는 연구자들에게 이번 한겨레 사설의 논조는 얼마나 의욕상실에 빠지게 하며 가히 청천벽력(靑天霹靂)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말 그대로 문화파괴적 망언(妄言)이라 하겠습니다. 실수는 사설의 타이틀에서 그치지 않고 본문에서 다시 더 큰 실수로 이어지며 집필자 개인의 천박성과 관점빈곤 및 망발까지 드러내고 있네요.

“더는 낡은 레코드의 노래로 국민을 속이려 해서는 안 된다”

이 사설을 집필한 한겨레신문 논설위원의 한심하기 짝이 없는 비천한 관점에 대하여 우리는 혹독하게 문책하고자 합니다. ‘흘러간 노래’와 ‘낡은 레코드의 노래’가 왜 이렇게 사설집필자 개인의 비천한 관점과 해석으로 마구 유린되어 난도질당해야 합니까? ‘흘러간 노래’는 대개 지난 일제식민통치기와 6·25전쟁 시기를 거쳐 1980년대까지 제작 발표된 SP, 혹은 LP음반과 그에 담긴 가요작품을 일컫는 말입니다.

옛가요사랑모임 유정천리에서 제작한 이난영·남인수 전집(위). 유정천리 회원들의 부여·목포 답사. ©이동순

민족사에서 가장 힘겹고 고통스러웠던 시간을 통과해오는 동안 죽음과도 같은 시간을 묵묵히 견디며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준 가장 커다란 힘이 바로 대중가요였던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작사가 반야월(半夜月, 1917~2012) 선생께서는 ‘흘러간 노래’보다 ‘흘러온 노래’가 더욱 적절한 용어라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갈파하셨습니다. 그토록 힘든 시기에 노래라는 다정한 벗이 있었으므로 진정한 위로와 격려가 되었던 역사적 진실을 어찌하여 한겨레는 외면하는 것입니까?

그 소중한 음원이 담겨진 음반들이 지난 시절 격동기를 배경으로 많은 숫자가 파괴 망실되어 음반의 희귀성(稀貴性)은 점점 드높아만 갑니다. 이젠 구하고 싶어도 구할 도리가 없습니다. 아주 사라져서 우리 앞에 현재까지 그 모습을 나타내지 않는 음반들도 점차 늘어납니다. 1950년대에는 엿장수, 고물장수가 음반을 거두어서 한꺼번에 파괴하고 그것을 백열등과 결합하는 전기소켓 제작이나 만년필 제작의 재료로 썼다고 하니 참으로 그 무지(無知)가 안타깝기만 합니다. 너무도 귀한 음반들이 이런 시련 속에서 소멸되고 말았을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저립니다.

옛 영화필름들이 밀짚모자, 보릿짚 모자의 테를 만드는 재료로 상당수가 덧없이 사라진 것과 그 과정이나 경로가 몹시 유사합니다. 불세출의 배우 나운규(羅雲奎, 1902~1937)가 직접 출연하고 제작했던 영화 ‘아리랑’ 필름이 아직도 우리 앞에 나타나지 않고 있다는 사실, 불과 1950년대에 제작된 이규환(李圭煥, 1904~1982) 감독의 ‘춘향전(春香傳)’ ‘심청전(沈淸傳)’ 같은 근년의 영화들조차 그 필름의 행방을 여전히 찾아내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은 과연 무엇을 말해주는 것일까요?

다시 한겨레신문 사설의 이야기입니다.

해당 사설의 집필자가 ‘흘러간 노래’와 ‘낡은 레코드의 노래’를 부정적 비유로 동원한 심리적 배경에는 대중가요를 상투성(常套性), 진부성(陳腐性), 저급성(低級性) 따위의 부정적 관념 환기의 도구로 활용하고자 하는 의도가 엿보입니다. 우리는 이런 집필자의 관점에 대해서 부분적으로는 이해를 전혀 하지 않는 바는 아닙니다.

한국의 대중음악사 100년 광음(光陰)이 흐르는 동안 참으로 많은 가요작품들이 제작 발표가 되었는데요. 그 가운데는 작사, 작곡, 가창(歌唱)의 3대 구성 요소가 절묘하게 조화와 일치를 이루어 민족의 사랑을 받는 절창(絶唱)으로 발돋움한 사례들도 적지 않지만 반대로 아주 허술하게 급조하듯 날림으로 만들어져서 마치 수수깡으로 지은 집과 같이 허약한 구조와 양상으로 대중들에게 다가갔던 소름끼치는 소모적(消耗的) 가요작품도 많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일제 식민통치기에는 제국주의자들이 그들의 정책과 경영에 맞추어서 가요작품의 성격과 형태를 강제하는 고통과 불편도 있었습니다. 일본식 창가풍(唱歌風)의 노래들, 일제말 군국가요(軍國歌謠), 일본에서 유행하던 저속한 엔카(演歌, 艶歌)를 아무런 여과 없이 그대로 유입시켜 모방하거나 유사한 울림으로 급조해내던 비양심적 대중음악종사자들도 여기에 한몫을 했지요.

하지만 상당수의 작사가, 작곡가, 가수들은 제국주의자들의 문화적 혼혈정책(混血政策)에 버티어 맞서는 길항의식(拮抗意識)을 지니며 한국인의 민족적 향취가 생기발랄하게 살아있는 민요, 잡가, 판소리사설, 서사무가(敍事巫歌) 등 여러 양식의 전통음악을 활용하여 대중가요를 제작하였던 것도 사실입니다. 식민지시절에 발표된 신민요(新民謠) 작품 가운데 ‘노들강변’을 비롯한 다수의 가요작품들에서 이러한 민족적 바탕과 정신을 감지해낼 수 있습니다.

한겨레사설의 집필자가 사설의 표제에서 ‘흘러간 노래’를 비판해대는 것은 제대로 만들어지지 못한 경솔하고 무책임한 가요, 문화적 품격조차 갖추지 않은 가요를 한정해서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싶습니다. 그러한 가요작품들은 실제로 부박(浮薄)하고 불안정하며 일정한 격조를 유지하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경과와 특성 때문에 서양음악전공자들이나 일부지식인들이 대중음악에 대하여 그것은 문화적 등급으로 저급(低級)이며 매우 비천한 존재에 불과하다는 우월자(優越者)로서의 모멸적 편견을 갖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대중음악종사자들에 비해 자신들이야말로 고상하고, 우아하며 높은 문화적 품격을 지녔다고 착각을 합니다. 이런 관점들이 워낙 장기간 지속되다보니 대중음악종사자들은 스스로를 낮추어 비굴한 표정과 처신을 하게 되고, 마침내 ‘딴따라’라는 매우 모멸적이고 자조(自嘲)의 눈물이 묻어있는 계급적 비칭(卑稱)까지 쓰게 된 것으로 추정을 하게 됩니다.

지금은 세상을 떠난 유명 대중음악인과의 회고 대담에서 이런 사실과 현황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대중음악인들과 어울려 단골술집에 가더라도 만약 실내에 서양음악종사자들이 먼저 들어와 자리하고 있다면 슬금슬금 뒷걸음쳐 물러나와 다른 주점으로 옮겼다고 합니다. 어쩌다가 함께 같은 실내에 앉게 되면 어김없이 날아오는 참으로 듣기 거북한 조롱과 냉소, 비아냥거림이 있었다고 합니다. 서양음악종사자들과 대중음악종사자들은 이렇게 서로 양립될 수 없는 태생적 갈등과 분열이 처음부터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일까요?

비교적 근년의 일로 기억되는데요. 대중가수 이동원이 서양음악을 전공하는 테너가수인 서울대학교 음대교수인 박인수와 함께 뜻을 맞추어 ‘향수’(정지용 작시, 김희갑 작곡)를 무대 위에서 불렀고, 음반까지 제작 발표했는데요. 이 사실 때문에 박인수 교수가 학계의 지탄을 받고 국립오페라단 가수직에서 축출되었다던 후일담(後日譚)도 생각이 납니다. 아직까지 우리의 현실은 대중음악과 대중음악종사자에 대한 편견에서 여전히 자유롭지 못한 형편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세월이 흘러 대중문화에 대한 시각이 많이 달라지고 이론적 바탕까지 갖추어져 한겨레사설이 구사하고 있는 ‘흘러간 노래’와 ‘낡은 레코드’에 대한 썩어빠진 인식은 점차 사라지고 엄청난 변화를 이루었습니다. 흘러간 노래와 음반을 민족문화사의 소중한 자료로써 자리매김해야 한다는 관점은 이미 보편화된 지 오래입니다. 더 이상 ‘흘러간 노래’와 ‘낡은 레코드의 노래’를 모조리 싸잡아 한꺼번에 평가절하(平價切下)하거나 깔보는 태도는 버려야 할 진부한 문화의식입니다.

이런 현실과 환경 속에서 이른바 진보적 정론지의 선두주자라고 자평하는 한겨레신문의 사설이 낡고 비루한 봉건적 사고와 비민주적 관점을 그대로 드러내며, 집필자 개인의 저속한 사고와 민낯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말았으니 참으로 한심하기 짝이 없습니다. 신문지면에서 사설은 해당신문의 이념과 논점을 대변하는 매우 중요한 공간입니다. 주필을 비롯한 논설위원들의 합의로 그 견해나 주장을 결정한 다음 논설위원 중의 한 명이 무기명으로 집필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한겨레신문 사설의 논조는 무기명 뒤에 비굴하게 숨어서 마구 문화파괴적 붓방망이를 함부로 휘둘러대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소중한 대중가요에 대한 몰상식한 테러요, 무교양(無敎養)이 철철 흐르는 잔인한 린치(lynch)가 아닐 수 없습니다.

사설은 어디까지나 신문사의 공적인 의견이지 집필자개인의 견해가 아닙니다. 이 때문에 집필자의 개인적 의도와 주관을 드러내는 것은 결코 있어선 안 될 위험천만한 일입니다. 사설의 주제는 대개 시대의 공동관심사로 등장하면서 지속적 의미를 지니는 문제가 그 대상입니다. 사설이 미치는 영향력과 파장은 실로 막강합니다. 그래서 사설을 전문적으로 집필하는 논설위원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기자로서의 경력과 경륜(經綸), 활동의 여러 부면을 감안해서 신중하게 임명을 하게 되지요. 이런 점에서 망발(妄發)의 사설을 게재한 한겨레신문은 집필자개인에게 책임을 전가하지 말고, 신문사 전체 뜻으로 옛 가요를 사랑하는 국민들과 가요연구가들에게 정중히 사과를 해야만 할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한겨레신문은 19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 등장한 새로운 일간신문으로 자유언론 수호운동과 정부의 언론 통폐합 조치로 해직된 기자들을 중심으로 창간된 진보적 언론의 대표성을 표방합니다. 장애인, 노동자, 농어촌, 도시영세민을 포함한 민중의 입장을 대변하기 위해 창간되었다는 한겨레신문이 고난의 세월 속에서 바로 그들 서민대중의 진정한 벗이자 사랑의 대상이었던 ‘흘러간 노래’와 ‘낡은 레코드의 노래’의 존재성을 어찌 이다지도 무참히 박살낼 수가 있단 말입니까? 대중문화에 대한 관점의 빈곤을 고스란히 드러낸 한겨레신문의 한심한 작태에 대하여 우리는 다시 한 번 호된 질책과 추궁을 보내고자 합니다. [오피니언타임스=이동순]

 이동순

  영남대 명예교수   

  계명문화대 특임교수

  한국대중음악힐링센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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