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진의 소중한 사람]

철모가 조금 숙여져 있을 뿐이었다.
어깨에는 새까맣고 커다란 군장이 하나씩 매달려 있었다.
웅크리지도 않았고, 고개를 수그리지도 않았다. 그저 앞으로 약간 “기울었다”라는 편이 맞을 것이다. 마치 그 트럭이 완성되던 그 순간부터 거기에 앉아있던 사람들 같았다. 그리고 다시는 내리지 않을 사람들처럼 그렇게 미동조차 없이 앉아있었다.
비가 퍼붓는 아주 늦은 밤에.
자유로의 일산과 파주 사이 구간에서 나는 그들을 보았다.

경기도 연천 서부전선 GOP에서 육군 25사단 장병들이 야간 경계근무를 서고 있다. ©포커스뉴스

고속도로 출구가 한참 남았음에도 불구하고 왜 그랬는지 4차선으로 미리 차선을 바꾼 뒤였다. 비도 오고, 주위가 어두워서 안전속도보다 조금 천천히 가야했는데, 이제 곧 집에 도착해 따뜻하게 씻고 잠자리에 들 생각을 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라디오에 흐르는 노래를 따라부르다 가사가 헷갈려 마음대로 바꿔 부르고 있을 때였다. 저 멀리 트럭이 가는데 어찌나 느린지 슬슬 따라잡기 시작했다. 트럭에 탄 승객들이 보이기 시작했을 때, 나는 더 이상 노래를 이어갈 수 없었다.

군용 트럭에는 병사들이 양 옆으로 앉아 있었다. 왼쪽 오른쪽 각각 여섯, 일곱이었는데 하나같이 등에는 태산 같은 군장을 짊어졌다. 거센 비바람이 몸을 쉴 새 없이 때리는 데도 바위처럼 미동조차 없었다. 그저 아무 일 없는 것처럼 철모를 쓴 머리를 깊이 숙였다. 어두워 눈이 마주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 트럭에는 아폴론의 것과 같은 눈부신 젊음과 용맹함 그리고 패기, 모든 것이 다 실려 있었지만 단지 딱 하나, 천막(호루)이 없어서 내 마음에도 비가 내렸다.

빗물을 튀기며 쌩 하고 트럭을 앞지르고 싶지 않았다. 계속 군인들을 바라보기도 미안했다. 그들이 길을 지나오는 동안 마주친 사람들도 비슷했을 것 같다. 인근 초소에서 근무서는 장병들도, 나 말고 그들을 스쳐간 많은 운전자들도 마음이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누군가는 그들을 감싸안아 주고 있을 것이다. 저 트럭 위 매서운 비바람을 그들의 어머니와 형제, 친구들은 함께 견디고 있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고 싶었다.

군인 운송 트럭은 천막(호루)을 치지 않는다고 했다. 차량이 전복됐을 때 인명사고가 커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라는 설명은 수긍이 갔다. 하지만 깜깜한 빗속에서 장대비를 고스란히 맞던 트럭 위 군인들은 유난히 기억에 남았다. 머리로 아는 것과 실제로 본 장면은 거리감이 있었다.

©픽사베이

스냅사진처럼 정지된 군인들의 모습에는 희생이라는 단어가 함께 묻어났다. 그러고보면 우리는 그 단어에 무척 인색하다. 살다보면 누구나 희생해야 할 때가 온다. 노약자 자리 양보부터 남을 위한 작은 기부, 생판 모르는 이를 위해 철로에 뛰어든 의인, 사소하게는 동생을 위해 포기하는 치킨 한 조각까지…

어떤 희생은 사회와 국가, 인류의 구성원인 이상 어쩔 수 없을 때가 있다. 그래야 나도 살고, 우리도 산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희생을 결단하는 것이 대부분 힘들다는 것 또한.

물질적인 시간, 두려움에서 도망칠 권리와 현실의 안락함을 희생하여, 대부분의 젊은이가 군대에 간다. 사람을 향해 주먹 한번 휘둘러보지 않은 손으로 소총 사격을 하고, 어제까지 모르던 사람들과 24시간 내내 부대낀다. 이상한 놈이 되어서도, 튀어서도 안 된다. 몸이 아파도 참고 견디며 열심히 훈련받고 구른다.

그들의 희생은 당연히 여겨진다. 그들은 ‘너와 내가 아니면 누가 지키랴’라며 훈련을 받고 근무를 선다. 고생 끝에 제대하면 아저씨 취급 당하기 일쑤다. 여자친구는 군대 축구얘기 그만하라고 핀잔을 주고 사촌동생은 세상물정 모른다며 구박한다. 그래도 남자들은 군대를 간다. 우리의 아버지가 그랬듯이, 형, 동생이 그랬던 것처럼.

고속도로 출구를 나서며 군용 트럭이 보이지 않게 되자 비로소 멈췄던 노래가 다시 나왔다. 전보다 더 차분해진 흥얼거림은 묘한 안타까움과 고마움을 담고 있다. 그들의 희생 덕에 나는 마음대로 노래를 지어 부르면서 집으로 간다.

오늘밤도 근무를 서는 병사들. 스물 몇 살, 물먹은 솜처럼 고단한 네 하루를 베고 누워 우리는 꿈길을 간다. 어린 너는 어디에 멈춰서야 젖은 철모를 벗게 될까. [오피니언타임스=이수진]

 이수진

 영어강사입니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감사합니다.

 오피니언타임스 청년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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