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이의 어원설설]

[오피니언타임스=동이] “내 마음의 깊은 바닥에 들러붙어 있는 기억과 인상의 파편들을 엮은 글이다. 나의 등장인물들은 늘 영웅적이지 못하다. 그들은 머뭇거리고 두리번거리고 죄없이 쫓겨다닌다. 나는 이 남루한 사람들의 슬품과 고통에 대해서 말하고 싶었다.“(김훈 ‘공터에서’)

김훈 작가는 ‘공터~’에서 해방과 6.25세대의 ‘머뭇거림’과 ‘두리번거림’을 통해 질곡된 삶을 조명합니다. 소설을 관통하는 핵심단어가운데 하나가 등장인물들의 ‘두리번’입니다.

‘두리번’은 ‘두리번거리다’ ‘두리번 두리번’으로 자주 쓰이지만 정작 시원한 말뿌리는 찾기 어렵습니다. 유사표현으로 등장하는 말이 ‘도리반 도리반’입니다.

‘도리반~’이나 ‘두리번~’이나 사전풀이는 같습니다. ‘눈을 크게 뜨고 여기저기 자꾸 휘둘러보는 모양을 나타내는 말’. 두 단어의 뿌리가 하나임을 보여주죠.

‘도리반 도리반’은 어린애들의 동작 ‘도리 도리’에서 온 걸로 추정됩니다. ‘도리’에 ‘반’이 붙어 반복과 강조의 뜻으로 쓰이고... ‘두리번~’은 ‘도리반~’의 모음조화 현상일테죠. 그런 까닭에 도리반이 두리반보다 조금 앞선 단어로 보입니다.

‘도리 도리’ ‘두리 두리’는 유사동작이나 다소간 차이가 있습니다.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는 동작은 같지만 ‘두리번~’은 ‘도리반~’에 비해 좀 더 주의깊게 돌아본다는 의미가 있죠. 도리반은 주로 아이들, 두리번은 주로 성인의 동작이라는 점도 다르고...

‘번’은 ‘반복해서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핀다는 점에서 차례를 뜻하는 번(番)이란 의미까지 담긴 게 아닌가 합니다. 고개를 여러번 돌려본다는 뜻에서...

반복이나 차례를 의미하는 ‘번’자 돌림의 단어들은 꽤 됩니다. 한번 두번 세번 여러번 할 때의 ‘번’이나 당번 비번할 때의 ‘번’, 1번 2번 할 때의 ‘번’, 번지수를 나타내는 ‘번’도 다 같은 한자를 쓰죠. ‘번번이’ ‘번갈아’도 형제어죠.

한편으론 ‘돌려본다’에서 ‘돌려본’이 ‘도리본’으로 축약되고 ‘두리번’이 파생됐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말이란 게 한쪽으로만, 규칙적으로만 변하는 건 아니니까요.

군복무를 한 이들은 누구나 경험한 불침번(不寢番).야간 내무반 보초로 비(非)일과 시간을 인원수로 나눠 경계근무를 서는 것이죠. 맨 처음 불침번을 ‘초번’, 마지막 불침번을 ‘말번’이라 했습니다.

학교엔 주번이란 게 있었죠. 번호에 따라 순번제로 교실 일을 맡은 학생으로 주단위로 돌아오기에 ‘주번’이라고 했습니다.

‘번 갈다’ ‘번 서다’는 표현은 일찍부터 썼습니다.

“상왕(단종)을 창덕궁에서 금성대군 집으로 옮겨 모시고는 왕(세조)은 상왕의 거처 범절에 관하여 이렇게 규정하였다. 첫째, 삼군 진무 두사람으로 하여금 군사 열씩을 거느리고 번갈아 파수하여 잡인의 출입을 금지할 것. 상왕 전에는 주부내시 두 사람, 장번내시 두사람을 두되 반씩 갈라 번갈게 하고... 이렇게 되니 존호는 비록 상왕이라하여도 갇힌 죄인이나 다름없었다”(이광수/단종애사에서)

계유정난으로 군국(軍國)통수권을 장악한 수양대군이 왕이된 뒤 단종을 금성대군궁에 가두고 출입을 제한하면서 번을 서도록 했다는 내용입니다.

‘장번’이라 함은 오래 서는 번으로 밤을 꼬박 새는 불침번입니다, ‘번 가는’ 일이란 임무교대지요.

쿠테타로 집권한 세조가 혹여 단종이나 단종을 따르는 세력들이 어찌할까 걱정됐는지 단종을 유폐시키고 번을 세워 옴짝달싹못하게 했던 겁니다. 

칼럼으로 세상을 바꾼다.
논객닷컴은 다양한 의견과 자유로운 논쟁이 오고가는 열린 광장입니다.
본 칼럼은 필자 개인 의견으로 본지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반론(nongaek34567@daum.net)도 보장합니다.
저작권자 © 논객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