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요섭의 동호지필]

0. 지극히 개인적인 통계

올해 6월, 상반기가 끝날 무렵에 퇴사를 했다. 휴식기를 가지게 됐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 대책 없이 논 것은 사실 일주일 정도였다. 무더운 7월이 되어서는 땀 차는 엉덩이로 자리를 지키며 글 쓰는 일에 집중했다. 각종 문학상과 공모전에 출품할 생각이었다. 재밌었다. 하고 싶었다.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일들 중 하나였다.

여름에 내가 정했던 출품 원칙은 아래와 같다.
1. 전국 규모의 문학상, 공모전에 출품한다.
2. (당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보이면) 낼 수 있는 곳은 다 낸다.
3. (당선 가능성이 조금도 없어보여도) 내고 싶은 곳에 일단 낸다.

올해의 마지막 달을 맞아 갈무리하는 심정으로 노트북 속 ‘습작’ 폴더를 열었다. 가장 열을 올린 장르는 소설이었지만 시, 수필, 독후감과 같은 여러 형태의 글도 틈틈이 썼다. 폴더에 담긴 파일 수를 세어보니, 약 5개월간 대략 20곳의 공모전에 출품한 것으로 확인됐다. 결과는 참 애매했다. 참담하다고 할 순 없지만 그렇다고 괜찮았다고 할 수도 없는 애매함이 6번이라는 당선 횟수에 둘러싸여 있었다.

소설은 중편 1편과 단편 4편을 썼는데 단편 2편만 간신히 당선됐다. 그 결과로 상금보다 더 소중한 장관상을 받았고, 문학상 트로피도 하나 얻게 되었다. 문학 쪽을 전공하지 않은 것은 물론 마주하고 삼겹살 구울 글쟁이 인연 하나 없는 무족보문학도로서는 꽤나 기억에 남을 성취였다. 그러나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지금도 골방에 갇혀서 원고와 사투를 벌이고, 당선되지 못한 채 ‘복기’ 폴더로 자리를 옮긴 소설 3편만 때때로 열어 만지작거릴 뿐이다. 또한 시는 30편 가량 썼는데 고작 2편이 당선되었으니 폴더 안에는 복기해야 할 문장이 차고 넘친다.

©픽사베이

1. 계란으로 바위치기

한 신문사가 개최한 독후감 공모전에서는 입선을 했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정말 솔직히 말하자면, 최소 우수상 이상은 탈 줄 알았다. 오랜만에 꽤 잘 빠진 독후감을 썼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름 괜찮은 것 같았는데 입선에 그칠 정도였구나’ 하며 아쉬움을 느끼던 순간, 심사평에 나온 응모자의 수를 보고는 금세 납득할 수 있었다. 대학·일반부에만 552명. 그중 당선자의 수는 입선을 비롯하여 10명 남짓이었다.

환산하면 당선확률이 2%도 안 되는 것인데, 이는 신춘문예에 비하면 실로 고마운 수치가 아닐 수 없다. 시의 경우, 한 해 신춘문예에 응모되는 작품 수는 중앙지는 대략 5000편이고 지방지는 1000편가량이다. 또 대형 신인을 뽑아내는 각종 메이저 문학상의 경우도 경쟁률이 수백 대 일에 달하니, 말 그대로 바늘구멍 뚫기고 계란으로 바위치기다.

선자들의 문학적 취향이나 자의적 해석 또한 무시할 수 없는 요소다. 다시 말해, 심사위원으로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작품의 운명이 크게 갈릴 수 있다는 얘기다. 나의 경우도 그랬다. 이건 작년의 얘긴데, 자유 주제로 써 내는 공모전에 출품했다가 1차 예심조차 통과 못 했던 수필이 응모자 수가 500명가량 되었던 다른 공모전에서는 덜컥 대상을 타버렸다.(두 공모전은 공모기간이 겹치지 않았기에, 중복투고에 해당하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 몇 번을 다시 읽어봐도, 예심조차 통과 못 할 글이었나 하는 생각도 들지만 그렇다고 대상까지 탈 글이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결국 사람의 글을 사람이 심사하는 것이기에 ‘취향 타는’ 일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이렇듯 단순히 수적인 암울함만이 바위 앞에서 나를 계란으로 만드는 것은 아니다.

등단한 지 50년이 되는 소설가 윤후명 선생은 한 강연에서 이와 같은 말을 꺼냈다.
“나이를 먹어 신춘문예, 문학상 심사를 꽤 했다. 최근 심사했던 문학상의 경우 경쟁률이 1050대 1이었다. 이런 경쟁률에서 단 한 명의 수상자를 뽑는 것은 대단히 잘못된 구조다. 1등과 2등의 차이는 상당히 적다.”

문학계 어른의 말씀대로, ‘너무나 많이 버려지는’ 구조가 변화하길 바란다고 끝맺음하고 싶지만 쉬이 바뀌지 않을 것을 안다. 어떠한 형태로든 보듬음을 받아야 할 문청들은 결국 이렇다 할 둘레 하나 없이 시린 하루를 보낼 것이다. 골방에 갇힌 계란들처럼.

공모전 사이트에 올라온 수많은 공모전들. ©‘씽굿’ 홈페이지

2. 기성문인에게도 공모전은 기회

최근 한 시상식에 참석했다. 시, 수필, 소설 당선자를 두루 뽑는 문학상이었다. 식장에 비치된 수상작품집을 열어 다른 당선자들의 약력을 보는데 꽤나 이름 있는 상을 탄 문인도 있었고 신춘문예로 등단한 문인도 있었다. 특히 명단에서 한 문인의 이름을 보고는 낯익다는 느낌이 들어 그 자리에서 바로 검색을 해봤다. 그는 시조와 평론으로 신춘문예에만 무려 3번이 당선되고, 6권이 넘는 저서를 발표한 ‘메이저’ 시인이었다.

문학상은 크게 당선과 선정이라는 두 가지 형태로 수상자를 정한다. 전자가 흔히 말하는 전 국민 공모의 형태라면, 후자는 심사위원회를 열어 이름 있는 작가들의 신작 저서나 또는 작가 본인 그 자체를 대상으로 심사해 선정하는 것이다. 당연히 후자의 권위가 절대적인데, 메이저 시인은 후자의 형태로도 문학상을 수상했던 사람이었다. 나와 장르는 달랐지만, 그런 분이 전자와 같이 문청들을 위한 기회마저 굳이 앗아가야 했을까 하는 청승맞은 원망을 잠시 갖기도 했다. 그러나 ‘당선 문인들의 후일’이라는 슬픈 명제를 곱씹어보면 꼭 그를 원망할 수만은 없었다.

신춘문예 당선자는 흔히 사생아에 비유되곤 한다. 당선된 신인에게 지속적으로 투고 기회를 주는 문예지와 달리, 신문사는 당선자를 일단 뽑아놓고 철저히 외면하고 만다는 풍토를 바탕으로 나온 얘기다. 당선자들의 삶은 어떠할까. 동아일보가 2011년에 조사한 기록에 따르면, 2000~2000년 중앙 일간지 8곳이 배출한 신춘문예 시·소설 부문 당선자 50명 가운데 자신의 책을 한 권 이상 낸 이는 29명에 불과했다. 나머지 21명(42%)은 등단한 지 10여 년이 지났지만 책 한 권 내지 못한 것이다. 10여 년간 두 권 이하의 책을 낸 이의 수까지 합치면 무려 39명(78%)이었다. 신인에게 최고의 영예인 신춘문예 당선이 후일의 삶까지는 담보하지 않음을 여실히 드러내는 결과다.

비단 신춘문예 출신들만 이러할까. 순수문학을 추구하는 문인들의 생활은 척박하고, 겸직 없이는 창작은커녕 생계조차 어려운 게 현실이다. 기성문인에게조차 공모전이 기회라는 사실은 독식 욕망이라고 함부로 오판할 것이 아니라, 자본과 너무도 멀어져 메말라가는 순수문학계의 현주소로 읽어야 한다. 문청들의 꿈이나 열망뿐만 아니라 기성문인이 “나 아직 살아서 쓰고 있다”는 생존신고나, 상금을 생활에 보태려는 생계의 형태로도 공모전은 그렇게 아프게 소비되고 있는 것이다.

3. 더럽지만 놓을 수 없는 창(窓)

감히 써도 되나 싶지만 그래도 이만큼 적확한 단어는 없을 듯싶다. 공모전은 더럽다. 품격을 갖춘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공모전이 진행되는 행태는 꽤나 더럽고 저열하다. 참가자들의 열의와 정성이 다양한 형태로 짓밟히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문학 공모전은 아니었지만, 인천공항 자기부상철도의 명칭과 부산 서면지하도상가의 명칭을 정하는 공모전에서도 믿기 어려운 결과가 나오기도 했다. 자기부상철도의 명칭은 그대로 자기부상철도가 되어버렸고, 심지어 지하도상가의 경우 기존의 명칭과 혼동되지 않게 그리고 5자 이내의 명칭을 정하라고 공모 주제에 명시를 해놓았음에도 7자의 기존 명칭을 뽑아버렸다. 이는 대체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조요섭

인천공항공사와 부산시설공단이라는 주요 공공기관에서 벌인 촌극이라고는 믿기 어렵다. 어디 이들뿐이겠는가. 몇 차례 공모전에 참가해본 이라면 이런 우스꽝스러운 일이 곳곳에서 적잖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런 현실이 참 씁쓸하지만 그럼에도 또 놓을 수 없는 것이 공모전이다.

주최사 마음대로 세부사항을 변동시켜 뭇 참가자들에게 피해를 줌에도, 지자체 주관의 공모전은 심사 과정이 때론 투명하게 공개되지 않음에도, 당선작을 정책 관련 홍보에 적극 활용한다 해놓고 1년간 어떤 매체에서 찾아볼 수 없음에도, 발표일이 한참 지나도록 연기 공지 하나 띄우지 않음에도, 두 달이 지나도록 상금의 지급이 늦어짐에도 그리고 무엇보다, 당선되지 않고 무수한 낙선을 맞고 숱하게 패배하는 순간이 있음에도 공모전이라는 것은 내 존재를 증명하는 몇 안 되는 창이다.

올 한 해에 가장 좋았던 순간은 역시 결혼이다. 그러나 그 다음은 문학상과 공모전에 당선된 일들이 나의 2017년 행복 목록에 존재하고 있다. 작은 소통구가 비루하게나마 하나씩 열리고 조그만 둘레가 희미하게 만들어질 때마다의 성취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나는 그 성취감에 중독돼버렸고, 그러기에 계속 쓸 수밖에 없다.

이 공모전이란 판은 때론 더럽고 저열해서 흙탕물 같고, 때론 경쟁자가 너무도 많아 진흙탕 같기도 하다. 앞으로 숱한 공모전에서 또 다시 만날 수백의 경쟁자들 중 내가 올해 느낀 사실을 진즉에 깨달은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또 각자의 골방과 진흙탕 속에서 또 한 줄씩을 써내려가겠지. 나 역시 골방에서 이전투구(泥田鬪狗)의 삶을 계속 살아갈 것이다. 

주로 부정적인 뜻으로 사용되는 이 사자성어에 대한 안타까움은 청소년 때부터 있었다. 왜 세상이 자기 마음대로 뜻을 해석할까. 나에게는 참 눈물겨운 투쟁의 모습이 보이는데... 어찌됐건 계속 써야겠다. 진흙이 묻었다 해서 내가, 내가 아닌 것은 아니니까. 내 글이, 내 글이 아닌 것은 아니니까. [오피니언타임스=조요섭] 

 조요섭

어쩌면 미학이란 것은 노동자에게 주어진 빵과 우유보다 훨씬 못한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느낀 이후로 부끄럽지 않은 글을 쓰려 하는 사람입니다.

오피니언타임스 청년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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