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수안의 동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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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타임스=최수안] 친구에게 유명 아이돌 가수의 자살시도 소식을 들었을 때만 해도 별 관심이 없었다. “네 건강부터 챙겨~”라는 말로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시간이 지난 후, 포털사이트 실시간 검색순위에 그의 이름과 빈소 등이 오르내리자 안타까움이 찾아왔다.

사람이 사라진다는 것은 한 세계가 사라지는 것이다. 하나의 세계를 또 잃었다. 평소 연예계에 관심이 없던 나에겐 그 정도 의미였다. 그러다 늦은 밤 뉴스채널에서 고인의 자살 전 글들을 보면서 우울증과 관련된 기억이 되살아났다.

너무도 조용한 곳, 예약시간이 한참 지난 후에도 의사는 나타나지 않았다. 간호사가 책상 위에 가져다 놓은,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커피와 하얀 벽을 가득 채운 학위 증명서며 임명장이며 상장들이 인상적이었다. 느긋하게 위층 자신의 집에서 내려온 의사는 거만한 자세로 앉아 내 얘기를 미동도 없이 들었다. 그러더니 필자를 다그치고, 자신이 기획한 사이코드라마 홍보하기에 이르렀다.

논리적으로 따박 따박, 하나 하나 지적하고 반론을 제기하며 진실된 대화를 나누고 싶었으나 당시 나이가 어렸던 필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괜히 부모님 이름에 먹칠하는 일밖에는 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헛웃음치며 그만두었다. 환자를 손님으로 대하는 하얀 가운 입은 상인, 내겐 그런 의미로 다가왔다. 수많은 환자들을 경험하고 사회생활을 통해 대인관계를 겪었을텐데 왜 그런 행동밖에 할 수 없는 것인지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

우울증환자에게 가장 문제되는 것은 인지에 대한 문제다. 우울증환자는 인지능력이 떨어진다. 우울이라는 우물 속에서만 울 수밖에 없는 개구리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또한 기억력이 저하되는 것은 치료제로 쓰이는 약들 속의 특정성분의 영향이다. 당사자의 잘못이 아니다.

특히 어설픈 응원의 말들은 역효과가 나기도 한다. “네 탓이다”, “너의 책임이고, 너는 강하니 이겨낼 수 있다”, “이겨내야 하고 노력해야 한다”라는 등의 말은 무기력하고 그렇지 않아도 자책하며, 우울증의 또 하나의 증상인 죄책감을 짐처럼 지고 있는 사람에게는 죽으라는 소리나 다름없다. ‘나는 한없이 무기력해서 그런 의지도 만들려 해도 생기지 않고, 아무리 노력하려고 해도 그 노력조차 잘 되지 않는, 하찮고 한심한 인간이며 곁에 아무도 없구나’라고 결론나는 것이다.

주변 사람들이 하나같이 내게 이 가수의 자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필자는 이렇게 답했다. 보통 우울증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6개월에서 1년 6개월 사이에는 자살 충동이 수시로 일어나는데, 그런 충동으로 죽음을 택한 것 같지는 않다. 노래의 가사와 SNS을 통해 참 많은 신호를 보냈더라. 살릴 수 있었다. 살아가도록 할 수 있었다. 주변에 본인과 본인의 상황을 온전히 이해하고 공감하여 우물 안에서 차갑게 얼어버린 손을 따스한 온기의 손으로 잡아줬더라면, 너를 아끼고 믿고 지지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알려줄 사람이 있었다면 달라지지 않았을까.

우울증 같은 질환은 마음의 병이 아니다. 뇌의 병이다. 티도 나지 않는 억울함과 진실을 말하는 것이 구차한 변명과 핑계만 늘어놓은 모양이 되어버리는 몹쓸 병인 것이다. 이럴 땐 소통의 문이 되어줄 사람, 마스터키가 되어줄 사람이 필요하다.

예전에 어떤 노트의 제목으로 쓰인 카피가 눈을 사로잡았다. “자살할까, 커피한잔 할까?” 또 어느 친구는 예전에 필자가 죽음을 말했을 때 이렇게 말하였다. “너 죽으면 난 너 보고 싶을 때 어떡해?” 또 이런 질문이 효과적이라고도 한다. “자살할거야?” 어쩌면 이상하고, 별 것도 아니고, 이기적이거나 가벼워 보이고 위험해 보이는 말들이 한 사람을 살릴 지도 모른다. 그게 미미하지만 필사적으로 이 글을 쓰는 필자의 마음이다. 어느 날은 자살시도를 하거나, 할 뻔한 위기의 순간을 잘 넘기고 살아남아 준 사람들에게 문득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하나의 세계라도 사라지는 것은 아무리 나와 물리적 거리나 심적 거리가 먼 사람이라도 슬픈 일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런 질문을 하고, 이런 생각을 해볼 것이다. 당신에게 던진 질문은 “자살할거야?” 필자가 생각해볼 문장은 “자살할까, 커피 한잔 할까?” 이것이다. 지금 이 순간. 따듯한 커피 한잔을 마시고 싶다. 언젠가 만났던 의사의 책상 위에 놓인 혼자 자랑스러운 커피 말고, 따듯한 온기가 차가운 날씨를 잊게 해줄 커피 한잔.

 최수안

 오피니언타임스 청년칼럼니스트

 건축회사 웹디자인 파트에서 근무 중인 습작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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