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환의 코리아 프리미엄 프로젝트]

[오피니언타임스=이영환] 얼마 전 몇몇 시중은행이 직원을 채용하는 과정에서 국정원, 금감원 등 힘 있는 기관과 VIP 고객, 그리고 임직원 자녀들에게 특혜를 제공했던 사실이 드러나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켰다. 심지어 모 금융지주 회장마저 이런 의혹에 휘말렸다는 대목에서는 경악을 금하기 어렵다. 이것은 교묘한 형태의 지대추구(rent-seeking) 행위에 해당한다. 스마트폰으로 모든 사람들이 연결되고 소셜미디어를 이용해 실시간 소통하는 초연결사회에 진입했어도 이런 봉건적 관행이 여전히 광범위하게 존속한다는 사실은 우리의 의식이 어느 정도 경직되어 있고 파편화되어 있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여기서 잠깐 지대추구 행위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자. 한국 사회가 선진화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이 문제를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우리나라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미국에서도 이 문제가 심각하다고 지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데, 대표적인 인물로는 경제학자 조지프 스티글리츠를 들 수 있다. 그는 저서 『불평등의 대가』에서 지대추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지대추구는 여러 가지 형태를 취한다, 정부가 공개적, 비공개적으로 현금을 이전하거나 보조금을 지급하는 것, 경쟁을 촉진하는 기존의 법률을 느슨하게 집행하는 것, 기업들이 다른 사람들을 이용하거나 사회의 나머지 성원에게 비용을 전가하는 것을 허용하는 법규를 마련하는 것도 지대의 일종이다.”

이와 같이 지대추구는 매우 포괄적인 개념이기에 논란의 소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때로는 도덕적 해이와 혼동되기도 하는 등 실제 현실에 적용하는 데 조심해야 할 부분이 있다. 간단히 말해 지대추구란 “사회적으로 새로운 부(富), 즉 부가가치를 창출하지 않으면서 각종 로비나 정치적 유착을 통해 기존의 부에서 자신의 몫을 늘리려는 것”을 지칭한다.

새로운 부가 창출되지 않기 때문에 한 쪽이 더 큰 몫을 가지면 다른 쪽의 몫은 작아질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지대추구 행위는 제로섬 게임에 해당한다. 이런 특성을 갖는 지대추구 행위는 실로 다양한 상황, 다양한 관계에서 발생할 수 있다. 대표적으로는 독과점 기업과 정부기관 간의 관계에서 발생한다. 이른바 규제기관이 피규제기관에 의해 포획된다는 포획이론(capture theory of regulation)에 의하면 피규제기관인 독과점 기업의 로비에 의해 규제기관이 포획을 당해 그들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게 된다. 이로 인해 사회 전반에 비효율과 불평등이 더욱 악화된다. 예컨대 일부 기업들은 단기적인 이익에 현혹되어 연구·개발에 투자하기 보다는 지대추구 행위에 더 열을 올리는 경향이 있다. 이런 기업들이 많아진다면 경제 전반에 걸쳐 자원배분이 왜곡될 것이고 비효율이 증가하게 된다.

일부 시중은행들은 직원 채용 과정에서 VIP고객 자녀 등에게 특혜를 줘 물의를 빚었다. ©픽사베이

미국의 경우 지대추구 행위를 대표하는 인물로는 미국에서 두 번째로 큰 비상장기업인 코크 산업(Koch Industries)을 소유·경영하고 있는 코크 형제, 찰스 코크와 데이비드 코크를 들 수 있다. 이 기업은 미국 경제지 《포춘》이 매년 발표하는 글로벌 500대 기업의 리스트인 <Fortune 500>에서 대략 20위 안팎에 해당하는 규모의 기업이다. 이들은 엄청난 재력을 바탕으로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정치인들에게 거액을 후원하면서 막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으로 정평이 나있다. 심지어는 미국 대법원의 판결에도 영향을 미칠 정도로 이들의 영향력은 상당하다고 한다. 굳이 이들의 실명을 거론한 이유는 미국과 같이 개방적인 사회에서도 이들의 지대추구 행위는 상상을 초월하는 데 한국과 같이 폐쇄적인 사회에서는 어떨지 생각해보자는 취지에서이다.

지대추구 행위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오랜 역사적 배경을 갖고 있기에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고질적인 현상이 되었다. 중세 봉건사회에서 대표적인 지대추구 행위의 사례로는 장인들의 조합인 길드(guild)를 들 수 있다. 상인 길드, 수공업 길드 등은 조합원들의 이익을 확보하는 데 모든 수단을 동원했었다. 봉건적 위계질서의 정점에 있는 영주들도 영지 내에 있는 강에 쇠사슬을 설치한 후 통행세를 내는 배만 통과하도록 하는 등 지대추구에 탐닉했었다. 그러니 봉건사회에서는 지대추구 행위가 만연했으며 위계질서의 맨 아래 있는 농노들이 모든 부담을 감당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당시의 “존재의 거대한 사슬”이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과거 조선시대에 만연했던 가렴주구(苛斂誅求)가 여기에 해당한다. 그런데 오늘날에도 사실상 이와 유사한 전통이 유지되고 있다는 것이 문제이다. 예컨대 퇴직 공무원들이 결성한 각종 이익단체나 의사, 변호사, 회계사들로 구성된 협회도 어느 정도 이런 성격을 갖는다. 한 마디로 지금도 지대추구에 대한 인간의 열망은 조금도 수그러들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그만큼 인간은 남보다 우월한 지위를 이용해 쉽게 이익을 얻으려는 충동을 억제하기 어려운 존재이다. 도대체 인간의 의식 수준이 어느 정도 상승해야 이런 전근대적인 관행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 의문이다. 현 시점에서 시급한 일은 우리 모두 과거의 봉건적 의식 수준에 정체해 있어서는 급변하는 21세기 상황에 대처하기 어렵다는 점을 분명히 인식하는 것이다.

다시 채용비리 문제로 돌아가 보자. 이것 또한 지대추구 행위로 볼 수 있는가? 그렇다. 우선 이런 행위는 새로운 부를 창출하는 것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채용을 담당한 직원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부당한 방법으로 특정 지원자들에게 특혜를 주는 데 협조함으로써 능력 있는 사람들의 채용 기회를 박탈해 사회적으로 비효율을 초래할 뿐만 아니라 기득권층의 이익에 봉사함으로써 불평등을 악화시키는 데 일조(一助)한 셈이다. 물론 이것은 비교적 작은 문제에 속한다. 그럼에도 이를 언급한 것은 그만큼 사회 전반에 지대추구 행위가 만연해있다는 사실을 강조하려는 이유에서이다. 재벌과 권력, 대기업과 협력업체, 그리고 갑과 을로 대변되는 다양한 관계에서 언제라도 지대추구 행위가 기승을 부릴 수 있다. 채용비리는 이런 편재성(遍在性)이 드러난 작은 사례에 불과하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언급하고 싶은 것은 전직 대통령들을 둘러싼 여러 가지 의혹이다. 이런 의혹의 핵심은 이들이 우월한 지위를 이용한 부당한 방법으로 국가적 이익을 빙자해 사적인 이익을 추구했다는 점이다. 이들의 경우는 국민의 주권을 대변하는 대리인의 입장임에도 불구하고 사적인 이익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도덕적 해이의 극치를 보여준 것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지대추구 행위의 극단적인 형태를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권력을 이용해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는 가운데 공익을 앞세우면서 실질적으로는 사적인 이익을 도모했다는 정황이 너무 분명하기 때문이다. 대통령의 지위에 오른 인사들조차 이런 의식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한국 사회의 현주소이다.

권력의 정점에 있던 인사들이 이 정도의 권력을 행사했으니 주변에 있던 참모들의 행태는 불문가지(不問可知)이다. 이들이 법정에서 자신은 오로지 대통령의 지시에 따랐을 뿐이라는 식으로 변명했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측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들에게 지대추구는 당연한 것일 뿐 비난받을 대상이 아닌 것이다. 이것은 이들의 일상적인 의식 상태를 반영한 것이다. 그런데 과연 지대추구 행위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솔직해 말해서 거의 없다고 본다. 특히 높은 지위와 명성을 추구하는 데 목숨을 거는 사람들은 자기선택(self-selection)의 논리에 비춰 볼 때 지대추구의 덫에서 빠져나오기 어렵다. 이들은 애초부터 지대추구를 당연한 권리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사람들이기에 그런 행동을 하는 데 대한 죄의식이 없다. 반면 자기 성찰과 절제에 익숙한 사람들은 처음부터 권력을 추구하는 자리에 연연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설사 그런 기회가 있더라도 최대한 지대추구를 자제하는 경향이 있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는 전자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것이 문제인데 정권이 바뀌어도 변함이 없어 보인다.

한편 우리는 지대추구 행위를 하는 사람들을 일방적으로 매도하는 경향이 있는데 정작 중요한 것은 입장을 바꿔 자신이 어떻게 행동할지 생각해 보는 것이다. 지대추구 행위를 강하게 비판하는 사람일수록 이런 행동으로부터 더욱 자유롭지 않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이른바 투사(投射)의 전형적인 사례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오직 자신에 대한 성찰을 통해서만 극복할 수 있는 문제이다. 자신은 청렴하고 강직하므로 절대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오히려 더 위태롭다. 역사는 이들의 확신이 오만과 객기(客氣)였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겸허하게 인간의 나약한 면을 인정하고 이를 예방할 수 있는 제도적인 장치를 마련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이른바 포용적인 제도(inclusive institutions)를 통해 지대추구 행위의 가능성을 줄여야 할 것이다.

그런데 정말 유감스러운 것은 포용적인 제도를 도입하더라도 지대추구 행위를 원천적으로 근절하기는 어렵다는 사실이다. 미국은 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글로벌 기준에 비추어 미국이 상대적으로 포용적인 제도를 갖춘 나라라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럼에도 교묘한 로비활동을 통한 지대추구 행위가 끊이지 않는 대표적인 나라이다. 미국이 이 정도라면 다른 나라는 어떨지 불문가지이다. 따라서 우리가 추구할 목표는 지대추구 행위를 최소한으로 억제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런 목표를 달성하는 데 표용적인 제도가 일정 역할을 해왔지만 한계가 드러났다는 사실을 인지해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극복 불가능한 한계에 봉착했는가?

©픽사베이

이 문제에 대한 돌파구가 정보기술 분야에서 등장했다. 최근 주목받고 있는 블록체인 (blockchain) 기술이 그것이다. 비트코인을 비롯한 가상화폐 투기 광풍으로 인해 오해의 소지가 있지만 블록체인 기술은 비트코인의 기반 기술로서 비트코인과는 구분해서 이해되어야 한다. 비트코인과 블록체인을 동시에 소개했던 익명의 인물인 사토시 나카모토(Satoshi Nakatomoto)가 2008년 10월에 발표한 논문에서 강조했듯이 블록체인 기술은 중앙 집중적인 중개기관을 배제하고 개인과 개인(peer-to-peer)간에 안전하고 신속하게 비트코인을 비롯해 다양한 가치를 거래할 수 있는 기반 기술이다.

블록체인은 한 마디로 “공개되고 분산된 공공 장부(public ledger)”라 할 수 있다. 여기서 “공개”란 블록체인 네트워크에 참여한 모든 피어(개인 또는 개별조직)에게 모든 데이터가 공개되어 있다는 것을, “분산”은 이런 공개된 데이터가 네트워크에 참여한 주체들 모두에게 동일하게 분산 저장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원장”은 문자 그대로 복식부기 원리에 의해 작성된 장부를 말한다. 네트워크에 참여한 주체들 모두 이런 동일한 원장을 보유하고 있다면 누군가에 의한 사기, 위변조, 해킹, 일방적 악용 등 사회적으로 지탄 받는 행위는 불가능해진다. 따라서 과거에는 쉽게 이루어지던 지대추구 행위도 사실상 어려워진다. 이와 같이 블록체인 기술은 모든 거래를 투명하고 신속하게 그리고 안전하게 처리할 수 있는 기능을 갖고 있기에 혁명적이라고 평가되는 것이다.

지금까지 모든 데이터는 중앙 집중식으로 관리되어왔다. 예컨대 금융거래에 관한 데이터는 은행이 보유 및 관리하고 있으며 개인은 접근 불가능하다. 정부 부처가 수립·집행한 정책과 관련된 데이터는 해당 부처의 직원들만 접근이 허용되며 미디어를 통해 일부만 공개될 뿐이다. 이런 경향은 빅데이터 시대에도 그대로 유지되어 왔는데 블록체인 기술은 이에 대한 효과적인 대안을 제시한 셈이다. 네트워크에 참여한 모든 개인들이 동일한 데이터를 분산·공유함으로써 데이터의 조작이나 훼손을 방지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무슨 일이 진행되고 있는지 공개적으로 확인하고 감시할 수 있다. 따라서 정보 독점, 데이터 독점에 의한 지대추구 행위는 더 이상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블록체인 기술은 지대추구 행위를 최소한으로 줄이는 데 크게 기여할 것으로 예상된다.

사회구성원 대부분이 성인(聖人)이나 군자(君子)로서의 품위를 유지한다면 굳이 블록체인 기술에 의존하는 일 따위는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현실은 정반대이다. 그렇기에 블록체인 기술과 같은 비인격적인 수단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목표는 블록체인 기술을 접목시킨 포용적인 제도를 정착시키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대통령을 위시해 어느 누구도 감히 지대추구 행위를 도모할 엄두가 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이런 경지에 도달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현실적으로는 무리이다. 그렇지만 이런 기술에 바탕을 둔 포용적인 제도가 시행되고 일정 기간이 경과하면 사람들의 뇌 신경망 회로에 변화가 생길 것이다. 이런 변화는 곧 사람들의 관행적인 행동에 변화를 초래하는 생리적 기반으로 작용할 것이다. 그러면 지대추구 행위가 오히려 수치심과 불쾌한 감정을 유발하는 날이 올 수 있다. 그때 우리는 이 땅에 더 이상 기술에 의존하지 않고 인간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새로운 사회를 건설할 수 있을 것이다.

 이영환

  동국대 경제학과 교수

  지식협동조합 경계너머 아하! 이사

  미시경제학 등 다수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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