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순의 그 시절 그 노래]

[오피니언타임스=이동순] 때로 한 편의 시작품보다 유행가 가사가 더욱 절실한 느낌으로 가슴속에 다가올 때가 있습니다. 그 까닭은 무엇에 기인한 것일까요? 좀 더 나은 삶을 향해 오늘도 안간힘을 쓰며 땀 흘리는 인간의 삶은 온갖 힘겨운 부담과 피로가 덧쌓여서 한날한시도 마음 편할 날이 없습니다. 

우리의 지난 시절은 험난했습니다. 봉건 왕조의 우울한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려던 시점에서 우리 겨레는 제국주의 침탈이라는 새로운 질곡에 신음해야만 했습니다. 그 제국주의는 고무신과 안경, 혹은 석유와 스스로 시간을 알려주는 자명종(自鳴鐘)의 얼굴로 우리 앞에 다가왔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끝없는 유혹이자 바닥 모를 늪이었습니다. 알게 모르게 슬금슬금 불안의 밑바닥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도 모르고 우리는 삶의 중심과 갈피를 모조리 잃었습니다.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과연 올바른 삶인가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하기도 전에 가혹한 수탈과 모진 유린이 시작되었지요. 자고 나면 밝은 아침이 와야 마땅한데 광명은 그 어디에서도 찾을 길 없고, 눈앞엔 여전히 고달픈 암흑천지였습니다. 

고복수(高福壽, 1911~1972)가 처연한 성음으로 불렀던 '타향살이'와 '사막의 한'은 바로 이러한 세월의 암담함을 상징적으로 빗대어 표현했던 노래였습니다. 두 곡 모두 뛰어난 작사가 김능인 선생과 작곡가 손목인 선생의 손으로 만들어진 작품이었지요. 세상에서는 이 대단한 가요작품을 만들어 식민지백성의 서러움을 달래주었던 훌륭한 작사가, 작곡가, 가수 셋을 일컬어 ‘손금고(孫金高) 트리오’라고 불렀습니다.

LP음반으로 제작발매된 고복수걸작집(왼쪽), 영화 ‘타향사리’ 포스터 ⓒ이동순

가수 고복수는 1911년 경남 울산에서 출생했습니다. 부친은 잡화상을 경영하는 영세한 상인이었습니다. 유달리 음악을 좋아했던 고복수는 교회 합창단에 들어가 각종 악기를 익혔고, 뒷동산에 올라가 저물도록 노래를 불렀습니다. 선교사들로부터 드럼과 클라리넷을 배웠습니다. 이 솜씨를 인정받아서 울산실업중학교에 특별장학생으로 입학하게 되었지요. 1930년대 중반 고복수는 경남 울산에서 전국가요콩쿨 예선에 뽑히긴 했지만 서울로 갈 여비가 없었습니다. 가수로서 출세를 꿈꾸던 청년 고복수에겐 이것저것 물불을 가릴 틈이 없었지요. 마침내 아버지가 잠들었을 때 금고에서 60원을 몰래 꺼내어 달아났고, 1933년 콜럼비아레코드사가 주최한 서울 본선에서 기어이 1등으로 뽑혔습니다. 이때 고복수의 나이 22세였습니다. 

1934년 오케레코드사로 옮겨간 고복수는 자신의 최고 출세작이자 우리 민족의 노래라 할 수 있는 '타향살이'로 엄청난 히트를 했고, 잇따라 '사막의 한'이 또 대박을 터뜨렸습니다. 

'사막의 한'은 경쾌한 템포의 노래이지만 '타향'처럼 망국의 설움을 사막에서 방황하는 나그네에 실어서 표현했습니다. '타향살이'의 원제목은 '타향'이었는데, 이 음반의 또 다른 면에 수록된 노래는 '이원애곡(梨園哀曲)'이었습니다. 떠돌이 유랑극단 배우의 신세를 슬프게 노래한 내용이었지요. 이 두 곡이 수록된 음반은 발매 1개월 만에 무려 5만장이나 팔렸고 단번에 만인의 애창곡이 되었습니다. 

타향살이 몇 해련가 손꼽아 헤여보니
고향 떠나 십여 년에 청춘만 늙고

부평 같은 내 신세가 혼자도 기막혀서
창문 열고 바라보니 하늘은 저쪽

고향 앞에 버드나무 올봄도 푸르련만
호들기를 꺾어 불던 그때는 옛날

타향이라 정이 들면 내 고향 되는 것을
가도 그만 와도 그만 언제나 타향

-'타향살이' 전문

 

SP음반으로 발매된 고복수의 노래 ‘타향’과 가사지 ⓒ이동순

고복수의 타향살이 공연 영상. ⓒ유튜브 KTV 문화영화

나날이 인기가 쇄도하자 레코드사에서는 제목을 '타향살이'로 바꾸고 위치도 B면에서 A면으로 옮겨 다시 찍었습니다. 쓸쓸한 애조를 머금은 소박한 목소리, 기교를 섞지 않는 창법이 고복수 성음의 특징이었습니다. '타향살이'는 한국가요의 본격적 황금기를 개막시킨 첫 번째 작품이라 하겠습니다. 만주 하얼빈 공연이나 북간도 용정 공연에서는 가수와 청중이 함께 이 노래를 부르다 기어이 통곡으로 눈물바다를 이루었다고 합니다. 공연 전에 이 노래에 대한 자료를 결코 알려준 적이 없었지만 관객들은 이미 다 알고 조용히 따라 부르고 있었습니다. 청중들의 요청에 의해 4절이나 되는 노래를 몇 차례나 반복해서 불렀다고 하니 그날 극장의 뜨거웠던 분위기를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용정 공연이 끝난 뒤에 무대 뒤로 고복수를 찾아온 30대 중반의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부산이 고향이라며 자신을 소개한 그 여인은 고향집의 주소를 적어주면서 혹시라도 부산 쪽 공연을 갈 일이 있을 때 고향집에 자기 안부를 전해달라는 부탁을 했습니다. 고복수에게 타향살이의 신세한탄을 하던 그 여인은 격해진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마침내 그날 밤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고복수는 자신이 마치 그 여인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듯한 죄책감에 빠져서 고통스러워했습니다. 작곡가 손목인 선생이 옆에서 고복수의 어깨를 안고 위로해 주었습니다. 세상을 떠난 그녀를 위해서 가수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성심성의껏 '타향살이'를 부르는 것이라고 달래주었습니다. 그날의 공연은 가수와 관객들이 하나가 되어서 눈물로 이 노래를 불렀다고 합니다. 

이철 사장은 무려 2천 원이란 거금을 전속축하 격려금으로 지급했습니다. 당시 소학교 교사의 월급이 42원이었으니 참 대단한 액수라 하겠습니다. 고복수는 이 돈을 들고 고향집으로 돌아가 아버지 무릎 앞에 엎드려 울면서 죄를 빌었습니다. 하지만 고복수의 부친은 돈을 훔쳐 달아난 아들에게 괘씸한 마음을 참을 길이 없었지만 가수로 크게 성공해서 돌아온 아들이 속으로 너무나 흐뭇했습니다. 광대가 되려면 부자간의 인연을 끊어버리자고 노여움을 표시했던 부친은 아들의 모든 잘못을 용서하고 송아지를 잡아서 동네잔치를 열었습니다. 얼마나 자랑스럽고 흥겨웠던 모꼬지였을까요?   

고복수의 대표곡들로는 '휘파람', '그리운 옛날', '불망곡(不忘曲)', '꿈길천리', '짝사랑', '풍년송(豊年頌)', '고향은 눈물이냐' 등입니다. 거의 대부분 잃어버린 민족의 근원을 다룬 내용들입니다. 손목인이 곡을 붙인 '목포의 눈물'도 원래는 '갈매기 항구'란 제목으로 고복수 취입이 예정되어 있었는데, 이를 이난영에게 양보를 해서 만들어진 가요곡입니다. '짝사랑'에 등장하는 노랫말 ‘으악새’는 억새라는 식물인지 왁새라는 이름의 조류인지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습니다. 

아 으악새 슬피우니 가을인가요
지나친 그 세월이 나를 울립니다
여울에 아롱 젖은 이즈러진 조각달
강물도 출렁출렁 목이 멥니다

아 뜸북새 슬피우니 가을인가요
잃어진 그 사랑이 나를 울립니다
들녘에 떨고 섰는 임자 없는 들국화
바람도 살랑살랑 맴을 돕니다

아 단풍이 휘날리오니 가을인가요
무너진 젊은 날이 나를 울립니다
궁창을 헤매이는 서리 맞은 짝사랑
안개도 후유 후유 한숨집니다

-'짝사랑' 전문

SP음반으로 제작·발매된 고복수의 노래 ‘짝사랑’ ⓒ이동순


가수 고복수의 삶은 비교적 순탄했던 편이지만 불운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6·25전쟁이 일어나고 북한군에 납치되어 끌려가다가 구사일생으로 탈출했던 일, 악극단 경영과 영화제작, 운수회사의 잇따른 실패는 늙은 가수의 몸과 마음을 극도로 지치게 했습니다. 기어이 저급한 전집물(全集物)을 들고 서울 시내 다방을 떠돌며 “저 왕년에 '타향살이'의 가수 고복수입니다”라면서 눈물 섞인 목소리로 애걸하며 서적외판원 노릇을 하던 슬픈 장면을 되새겨 봅니다. 그는 자신의 은퇴공연 무대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가수생활 26년 만에 얻은 것은 눈물이요, 받은 것은 설움이외다” 당시 우리의 문화적 토양과 환경은 이처럼 훌륭했던 민족가수 한 사람을 제대로 관리하고 지켜내지 못했던 것입니다.

1957년 서울시 공관에서 열린 가수 고복수 은퇴공연 ⓒ이동순

선배가수 고복수 선생이 가요계를 아주 떠나던 날 서울 시공관에서 열린 고별공연에는 무려 100여명의 동료, 후배 대중연예인들이 작별을 아쉬워하면서 우정출연으로 무대에 올랐습니다. 가수 이난영은 자신의 대표곡 ‘목포의 눈물’을 울먹이는 목소리로 불러서 관객들의 슬픔과 서러움을 자아내기도 했습니다. 이난영이 곧 울음이 터질 듯한 애처로운 목소리로 아슬아슬 노래를 이어갈 때 마지막 마무리를 후배가수가 제대로 마칠 수 있도록 고복수 선생이 마이크 앞으로 다가와서 끝까지 보조하는 아름답고 흐뭇한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손목인 작곡으로 대표가수가 된 고복수는 연하의 작곡가 손목인에게 평생 ‘선생님’으로 호칭하며 깍듯한 예의를 갖추었습니다. 세상을 떠나기 1년 전 병상으로 문병을 갔던 손목인에게 고복수는 “보고 싶었습니다. 선생님!” 하고 흐느끼며 손목인을 안고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가수 고복수는 1972년 서울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1987년부터 가수의 고향 울산에서는 고복수가요제를 열어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는데 1991년 제4회 고복수가요제가 열렸을 때 울산시 중구 북정동 동헌 앞에 대표곡 ‘타향살이’가 새겨진 고복수 노래비가 세워진 것은 참 반갑고 다행스런 일입니다. 가수가 태어난 울산시 병영동에는 ‘고복수 마을’, ‘고복수 길’도 지정되었고, 이후 서울 노원구 상계동 당현천에는 고복수 황금심 부부를 추모하는 부부가수 노래비도 세워졌습니다. 

한국가요사에서 이젠 민족의 노래이자 불후의 명곡이 된 '타향살이'의 애잔한 곡조를 나직이 흥얼거려 봅니다. 1927년까지 만주로 쫓겨 간 이 땅의 농민들은 무려 백만 명이 넘었습니다. 관서 관북지역의 험준한 산악에서 화전민으로 살아가던 사람들은 120만 명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오늘은 이런 역사적 사연과 아픔을 생각하면서 '타향살이'를 일부러 잔잔히 불러보면 어떨까 합니다. 더불어 옛 노래는 가사에 나타난 시대를 음미하며 마치 읊조리듯 불러야 한다는 사실을 꼭 가슴에 담아두시기 바랍니다.

 이동순

 시인. 문학평론가. 1950년 경북 김천 출생. 경북대 국문과 및 동 대학원 졸업. 동아일보신춘문예 시 당선(1973), 동아일보신춘문예 문학평론 당선(1989). 시집 <개밥풀> <물의 노래> 등 15권 발간. 분단 이후 최초로 백석 시인의 작품을 정리하여 <백석시전집>(창작과비평사, 1987)을 발간하고 민족문학사에 복원시킴. 평론집 <잃어버린 문학사의 복원과 현장> 등 각종 저서 53권 발간. 신동엽창작기금, 김삿갓문학상, 시와시학상, 정지용문학상 등을 받음. 영남대학교 명예교수. 계명문화대학교 특임교수. 한국대중음악힐링센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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