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역사를 돌아볼 때 가슴이 몹시 아린 시기가 있다. 바로 1800년에서 1860년대의 60~70년간이다.  그 사이 별다른 혁신이나 발전도 없었고, 지적인 논쟁이나 도약도 없었던 시기라고 생각된다.

당시의 세계사를 살펴보면 조선이 얼마나 미몽에 잠겨 있었고, 얼마나 암흑천지였었는지 새삼 드러난다. 유럽은 프랑스 혁명 후 나폴레옹 전쟁으로 인한 격동기를 거쳐 왕당파의 반동과 혁명을 겪으며 끝없이 용틀임했다. 증기기관차가 발명되고 산업혁명이 일어나 생산력이 비약적으로 신장됐고
, 선거권과 민주주의도 점차 확산됐다. 자본주의 경제의 발전에 따라 새로운 경제이론이 연이어 등장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사회주의 이론과 운동을 비롯해 새로운 사회에 대한 모색도 활발해졌다. 모차르트 베토벤 하이든 로시니 등 음악의 거장이 탄생했고, 칸트 헤겔 마르크스 등 철학의 발전도 두드러졌다. 분자와 원자의 실체가 발견되고 전파와 산소의 존재가 확인되는 등 과학도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찰스 다윈은 해군측량선 ‘비글’를 타고 세계를 일주하면서 진화론의 기초자료를 수집했다.

그러니 이 시기 조선은 그야말로 암흑 천지였다. 병자호란 이후 동아시아 정세가 대체로 안정돼 있었기 때문에 특별한 격동이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주변 청나라나 일본에 비해서도 조선은 더욱 정체돼 있었다는 생각이다. 영조와 정조가 세상을 떠나면서 조선은 마지막 불꽃이 사라지고 세도정치의 질곡 속으로 스스로 굴러들어갔다. 특별한 경제적 기술적 발전도, 학문적 사상적 변혁이나 논쟁도 없이 세월만 보냈다. 별다른 꿈틀거림도 나라의 장래에 대한 비전도 없이 ‘고요히’ 잠만 자고 있었다. 다만 특별한 것이 있었다면 세도정치 치하에서 저질러진 천주교도들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 뿐이었다.

바로 이 시기 유일하게 밝고 깨끗한 마음으로 탐구하고 모색한 인물이 다산 정약용이었다. 다산은 정조 시대에 수원성을 축조하는 등 여러 가지 역할을 했지만, 정조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자신의 뜻을 펼 수가 없었다. 도리어 천주교에 접했다는 이유만으로 18년간이나 유배생활을 해야 했다. 그야말로 불운한 시기를 맞이한 것이다. 그러나 다산은 불운한 시기를 불운하다고 여기지 않고 끈질기게 탐구하고 모색했다. 당시로서는 다시 돌아오지도 못할 것 같던 곳에 가서 부지런히 먹을 갈고 사색을 거듭했다. 오늘날 우리가 높이 받드는 목민심서 등의 골격을 짜낸 것도 바로 이 유배시기였다. 다산의 위대한 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겠다.

만약 이 시기 다산 정약용의 그런 노력과 그런 저술마저 없었다면 우리는 그 시기의 역사를 어떻게 그려해 했을까? 그야말로 까맣게 칠하거나 공백으로 남겨둬야 했을지도 모른다. 유럽의l 중세를 암흑시대라고 하듯이 이 시기의 조선이 암흑시대가 아닐까 한다. 그러므로 다산 정약용은 그 암흑천지에서 한줄기 빛을 낸 유일한 샛별이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 샛별도 시대적 어둠을 충분히 밝히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의 뜻을 이어받을 인물도 없었다. 그러니 다산의 죽음과 함께 조선의 마지막 샛별도 사라진 것이나 다름없다. 기원전 1세기 키케로의 죽음으로 서양에서 공화정의 마지막 수호자가 사라지고, 서기 5세기 보에티우스가 처형당함으로써 ‘철학의 여신’이 오랜 모습을 감추었던 것과 비슷하다.
 결국 조선은 다산 이후 아무런 각성도 혁신도 없이 무위도식하다가 타의에 의해 개항을 강요당했다. 그러니 개항 후에도 허둥지둥댈 수 밖에 없었고, 그러다가 나라를 통째로 빼앗기고 말았다. 조선이 나라를 빼앗긴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바로 19세기 전반기를 허송세월한 것이 큰 원인의 하나라고 나는 감히 생각한다. 만약 그 시기 다산 정약용 같은 인물이 몇 명만 더 있었다면 조선은 좀더 각성했을 것이다. 그리고 나중에 나라를 빼앗기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한 시기의 샛별 같았던 다산 정약용의 정신과 삶의 자세를 재조명한다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다산이 이룩한 업적과 아울러 한계까지 온전히 살펴보고 이 시대에 던져주는 것은 단순히 지적인 유희가 아닐 것이다. 이 나라가 나아갈 바를 정립해 나가는데 큰 자산이 될 것이다. 

 특히 탄신 250주년을 맞은 올해는 각별히 다산 정약용을 기려보기에도 좋은 해이다. 다산을 기리고 되살리려는 모임과 움직임도 여러 갈래로 진행되고 있다. 그런 가운데 시민단체의 노력도 결코 간과될 수 없다. 학술적인 연구를 통해 다산의 삶과 사상을 심도 있게 조명하는 것은 반드시 이뤄져야 하겠지만, 일반 시민과의 거리 또한 좁혀지지 않으면 안된다. 다산은 결코 학문을 위한 학문을 하지 않았다, 구체적인 현실과제에서 눈을 돌린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산의 업적과 유산은 비단 학자들 뿐만 아니라 이 시대를 사는 모든 시민들이 공유해야만 한다. 바로 그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 시민단체이다. 시민단체의 그런 노력을 통해 우리 사회를 더욱 성숙시키고 문화적으로도 더욱 풍성하게 가꿔나갈 수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올해 탄신 250주년을 맞이해 다산을 탐구하고 기리는 각계의 노력이 더욱 활성화되고 시민들의 관심과 참여도 높아지기를 기대해 본다.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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