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동 순(한국대중음악힐링센터 대표)

[논객칼럼=이동순]

제대로 기록된 역사가 없다면 우리는 그 시대의 실증적 정황에 대하여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길이 없습니다. 일본인이 만든 용어를 그대로 옮기기조차 역겨운 한일합방(경술국치, 1910) 이후의 경과에 대해선 각종 자료가 비교적 있는 편이나 그 직전인 20세기 초반 약 10년 동안의 내용에 대해서는 거의 자료가 없습니다.

일제는 한반도를 그들의 식민지로 경략하기 위해 온갖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기로는 제국주의자들의 식민통치가 조선총독부 시절부터 비롯된 것으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그 이전에도 이미 일제는 한반도를 완전히 장악해서 꼼짝달싹 못하도록 만들어놓았던 것이지요. 통감부(統監府)의 설치와 운영이 바로 그것입니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다음 단계로 한반도를 그들의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 몹시 부패했던 대한제국정부와 보호조약이란 것을 강제로 체결합니다. 매국노들만 모인 채 열렸던 대한제국 내각회의에서 당시 정부는 ‘제2차 한일협약’이란 것을 통과시켰고, 이에 따라 대한제국 주권행사의 실질적 책임자가 일본의 통감으로 결정되었습니다. 일본은 1906년 신속하게 서울에 통감부를 설치하였고,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가 초대 통감으로 부임했지요. 말하자면 통감부에 의한 통감정치가 실시된 것입니다.

안중근 의사에게 사살된 일본의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

허울뿐인 대한제국 정부는 외교권마저 일본에게 빼앗긴 채 일본의 실질적 지배를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조선총독부 이전에 이미 일본의 통치가 엄혹하게 시작된 것입니다. 이에 따라 일본은 경찰제도, 헌병제도 등 폭압적 무단통치(武斷統治)에 필요한 온갖 기반을 완벽하게 조성했습니다. 전국 각처에서 국권회복을 위한 시위와 저항운동이 산발적으로 일어났지만 조직과 세력에 있어서 일본의 위협이 되지 못했습니다.

앞서 언급했듯 1900년부터 1910년 8월 28일까지의, 제대로 된 구체적 사료는 그 어디에서도 찾을 길이 없습니다. 특히 대구와 같은 지방도시의 정황을 알게 해주는 자료는 거의 전무하다시피 했습니다.

그런데 이 시기 대구의 구체적 정황을 전해주는 뜻밖의 자료 하나가 나타났습니다. 그것은 바로 일본인 장사꾼 가와이 아사오(河井朝雄)가 쓴 ‘대구물어(大邱物語)’란 책입니다.

'대구물어'의 저자 가와이 아사오

가와이 아사오는 일본 남부지역 출신으로 일찍이 1904년 대구로 이주해 와서 유통업으로 막강한 세력가가 되었으며 대구 거주 일본거류민 대표가 되어 ‘조선민보(朝鮮民報)’라는 일본어판 신문을 만들어 그 사장까지 지내기도 했던 인물입니다. 그는 1931년까지 대구에 살았으니 무려 27년 동안 대구에서 펼쳐진 정황을 누구보다도 자세하게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가 대구를 떠나기 전 일종의 회고록 형식으로 기록해서 발간한 책이 바로 ‘대구물어’입니다. 일본식 독음(讀音)으로는 ‘다이큐 모노가타리’입니다.

‘모노가타리(ものがたり)’는 원래 일본 헤이안 시대에 발생한 문학 양식으로 가공인물이나 사건을 사이사이 와카(和歌)를 섞어가며 가나 산문으로 묘사한 것으로 10세기경 수많은 창작품이 출현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단지 지난 시절의 회고조로 쓴 이야기 형식의 산문이란 뜻입니다. 유카타를 입고 있는 가와이 아사오의 관상은 흔히 보는 사무라이 인상과는 다릅니다. 날카로움이나 잔혹함이 느껴지는 인상이 아니라 단지 장사꾼으로 성공하여 안정된 삶을 누렸던 일본인일 뿐입니다. 그의 기록에 의하면 1905년 당시 대구 인구는 약 2만 명가량이었고, 대구 거주 일본인은 7백~8백 명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은 수의 일본인은 전체 대구시민을 쥐락펴락하는 실권세력으로 압력을 행사했다고 하네요. 당시 한반도로 이주해온 도래(渡來) 일본인들은 거의가 퇴역한 일본군 하사관, 퇴직 경찰, 헌병 출신, 출소자 등이었고, 그들이 대구에서 주로 담당했던 직업은 요식업, 유통업, 매춘업(賣春業) 운영 따위였습니다.

가와이 아사오는 일본에서 지인의 권유로 대구를 선택했고, 다량의 소비물품을 구입하여 연락선 편으로 부산항에 들어왔습니다. 그 무렵 경부선이 막 착공된 지 얼마 되지 않는 시점이라 부산에서 시작한 철도부설 공사는 밀양까지만 개통이 되고 그 다음 구간은 한창 건설 중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가와이는 부산에서 열차를 타고 밀양까지 왔고, 거기선 지게를 진 조선농민을 짐꾼으로 고용해 대구 근교의 청도 팔조령(八助嶺) 고개를 넘어 대구로 힘들게 진입했다고 합니다.

그가 대구에 와서 처음 본 광경은 아주 불결하고 비위생적 환경에서 살아가는 대구시민들의 미개한 모습이었습니다.

20세기 초반의 대구 시내 풍경

도로나 골목에서 공공연히 소, 돼지, 개 따위의 도축(屠畜)이 펼쳐졌으며 자녀의 분변(糞便)을 대문 앞 길가에 나와서 보도록 하는 부모들과 그 뒤처리를 개에게 맡기는 해괴한 광경을 보게 됩니다. 이 광경을 보면서 한국인의 불결성과 미개함을 비웃습니다. 20세기 초반 대구 시민들이 가장 즐겨 이용했던 식품은 설탕입니다. 설탕은 한국인들이 복통, 설사의 치료제로 여겨 가정상비약으로 구비해놓고 자주 복용했다고 합니다. 그것을 알고 일본인 장사꾼들은 설탕을 많이 갖고 와서 온갖 농간을 부렸는데, 설탕을 녹여서 만든 눈깔사탕을 ‘옥춘당(玉春糖)’이라 이름 붙여 팔았고, 알코올을 약간 섞어 희석한 설탕물을 ‘백로주(白露酒)’라 명명하여 팔았습니다.

일제가 '옥춘당'이라 이름 붙여 팔았던 눈깔사탕

이것이 당시 최고의 인기상품이었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일본인 상인들은 말라리아 치료제인 키니네를 ‘금계랍(金鷄蠟)’이라 이름 붙여서 팔았고, 놀랍게도 아편가루를 골목 상점에서 공공연하게 팔았습니다. 마약중독자가 나날이 늘어나도록 오히려 조장했던 일본의 음흉한 정책을 엿보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은 통감부의 승인 없이 불가능했을 일입니다.

금계랍을 소개하는 신문광고

대구에서 도착한지 며칠 되지 않는 어느 날, 가와이 아사오는 다른 일본인으로부터 서문시장 서쪽 구석에 있다는 사형장 구경을 가자는 제의를 받게 됩니다. 그곳에서는 거의 매주 사형수를 끌어내다가 공개적으로 교살형(絞殺刑)을 집행했는데, 그 처참한 광경을 보고 돌아온 가와이는 며칠 동안 역겨움으로 식사를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당시 대구 거주 일본인들의 최고 기호식품은 재두루미 고기였습니다. 그들은 쉬는 날 대구 근교 화원 쪽 낙동강변으로 가서 엽총으로 재두루미를 사냥했습니다. 지금은 천연기념물 203호로 지정된 이 가여운 철새는 일본인들의 술안주용으로 식탁 위에 올랐습니다. 재두루미 날고기로 만든 사시미, 재두루미 고기로 만든 스키야키(전골)가 인기식품이었다고 하네요. 먹다 남은 고기는 미소된장에 절여서 장아찌를 만들었다가 일본의 본가로 돌아갈 때 그들의 부모를 위한 진기한 선물로 썼다고 합니다.

1905년과 1906년 두 해 동안은 온통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전한 감격을 누리는 분위기로 온통 요란했던 것 같습니다.

러일전쟁 승리를 기념하는 일본의 포스터

러일전쟁 대전첩(大戰捷) 축하회를 대구 거주 일본인거류민단 주최로 달성공원에서 열었고, 러일전쟁에 참전했다가 돌아오는 귀환 장정들을 환영하는 행사가 대구 시내 일대에서 사흘 밤낮 이어져 몹시도 시끌벅적했던 모양입니다. 모든 참석자들에게 아사히 맥주, 삿포로 맥주, 담배 한 갑씩을 선물로 주었을 정도였으니 어떤 분위기였던지 가히 상상이 됩니다.

하늘에서 찍은 대구 달성공원

이러한 분위기를 몰아서 1905년 11월 3일엔 천장절(天長節), 즉 일본 왕의 생일을 축하하는 의식의 하나로 달성공원 중앙에 일본신사(日本神社)까지 지어서 완공을 축하하는 성대한 행사를 펼칩니다. 일본의 건국신화에 등장하는 귀신을 모시는 이 신사에 그 이후 대한제국의 마지막 왕 순종이 이토 히로부미의 명령으로 직접 방문하여 정중히 절을 올리고 돌아간 적이 있지요.

이 내막을 전혀 알지 못하는 대구의 중구청장(윤순영)을 지냈던 얼빠진 자가 재직시절 달성공원 입구에 순종의 방문을 기념하는 거대한 동상을 세워서 그 몰지각한 처사로 양심적 시민들의 매서운 지탄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이른바 ‘순종어가길’이란 해괴한 이름으로 조성된 이 수치스런 조형물을 무려 국비 70억 원이나 들여서 만들었다고 하니 참으로 통탄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금도 과거의 기록사진들 중에는 달성공원으로 다가오는 순정의 어가행렬(御駕行列)이라는 광경을 볼 수 있습니다.

일본신사 참배를 위해 대구 달성공원으로 들어오는 순종

이 순종의 동상 앞으로는 일제가 그들의 한반도 수탈도구로 부설한 경부선을 마치 근대화의 소중한 도구로 찬미하는 듯 철도형상의 조형물을 조성해놓았습니다. 경부선은 결코 근대화의 산물이 아니라 일제의 식민지 수탈의 도구였지요. 경부선 부설에 대한 미화는 일제 식민통치의 당위성을 주장하는 일베들의 논리와 동일합니다. 1906년 대한매일신보 기사에 의하면 ‘철도가 지나는 열 집의 아홉 곳은 텅 비었고, 천리 길에 닭과 돼지가 멸종했다’는 글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경부선 부설공사에 강제부역으로 끌려 나간 조선농민들과 공사현장 부근에서 일본인 공사 감독관들의 악랄한 수탈과 횡포가 얼마나 혹심했던가를 보여주는 대목이라 하겠습니다.

철도가 개통되고 열차가 다니기 시작하면서 철도 주변 주민들의 반감은 더욱 커졌습니다.

경부선 철도 개통식날

철로 위에 큰 바위를 옮겨다 놓는 일, 한적한 철도역을 공격하여 폭파하는 일 따위가 벌어지기도 했는데, 일본 경찰과 헌병들은 끝까지 추적하여 그 일을 꾸민 조선 사람을 잡아다가 철도 주변의 후미진 골짜기에서 총살을 시키고 바로 그 자리에 묻었습니다. 그리하여 경부선 철도 주변에는 주인 없는 무덤들이 나날이 늘어나기만 했습니다.

이 경부선 부설공사와 관련해서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 발생했습니다. 원래 설계도면에는 대구의 남문 쪽에 역사(驛舍)를 짓는 것으로 되어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북문 쪽으로 옮겨진 것입니다. 말하자만 급작스런 설계변경입니다. 이것은 모두 대구거주 일본인 거류민단과 당시 대구군수였던 친일매국노 박중양(朴重陽, 1872~1959) 따위가 함께 비밀모의를 거쳐서 이뤄진 짓입니다. 

경부선 철도를 습격한 의병들을 총살하는 일본군

박중양이란 자는 본래 한국인으로 태어났지만 일제침략이 시작되자 그 위기를 자신의 영달기회로 재빨리 포착하여 순전히 자기 방식의 입신양명을 거둔 흉악한 기회주의자였습니다. 그는 이완용(李完用, 1858~1926)과 이토 히로부미의 적극적 비호 속에서 중요지역의 군수 및 관찰사를 두루 거치게 됩니다. 그가 대구군수로 부임해서 저지른 범죄적 악행 중의 하나가 바로 대구읍성의 파괴 및 해체입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대구 거주 일본인 거류민들의 성화를 접수한 뒤 즉시 통감부의 이토 히로부미를 찾아가 간청으로 승낙받은 조치였지요.

당시 대한제국 정부는 이를 허가하지 않았지만 박중양은 대구읍성의 성곽에 몰래 치명적 손상을 끼쳤고, 성곽을 허문 뒤의 빈 공간은 고스란히 일본인 소유로 넘어갔습니다. 가장 우선적으로 대구거주 일본인들의 상권(商權)을 위해 박중양이 이를 적극 지원했던 것입니다. 원래 남문 방향이었던 대구역 위치가 북문 쪽으로 바뀌게 된 것도 모두 이러한 배경 때문입니다. 대구의 일본인들은 주로 북문 쪽에 밀집 거주하고 있었는데, 대구역이 북문 쪽으로 이동하게 됨에 따라서 북문 쪽 일본인 상권은 세력이 더욱 커지고, 부동산가격은 무려 10배가 넘게 폭등하게 되었습니다. 식민지시대 북성로 거리는 완전히 대구의 중심적 다운타운이었고, 미나카이를 비롯한 대형백화점이 생겨날 정도로 화려한 번성을 이루었습니다. 거대한 양품점, 목욕탕, 양복점, 장신구점, 철물점, 석유상, 양화점 등 각종 소비재 판매 중심의 상권이 형성되어 1970년대까지 성업을 이루었던 것입니다.

1920년대 대구 북성로 일본인 거리

당시의 기록사진으로 더듬어보는 대구 북성로 미나카이 거리는 일본의 어느 지방도시를 방불케 하는 분위기를 보여줍니다. 우아한 곡선의 가로등을 설치하여 밤을 휘황히 밝혔을 터이고, 일본어로 쓰인 상점의 간판들이 즐비하게 보이는데 제법 많은 통행인들로 붐비네요. 양산을 쓰고 기모노를 입은 일본여인들이 삼삼오오 거리를 걸어갑니다. 소나기라도 한 바탕 지나갔는지 도로 위에는 아직도 물이 흐르고 있습니다. 유카타를 입은 일본인 남성은 길에서 지인을 만나 담소를 나누고 있군요. 머리를 빡빡 깎은 일본인 소년들은 길 가장자리에서 저희끼리 희희낙락 놀고 있습니다. 미나카이 백화점 건물 옥상에는 일장기가 당당하게 펄럭입니다.

현재에도 철물 중심의 공구골목이 길게 형성된 대구 북성로 거리의 역사적 배경에는 바로 이러한 옛 사연이 숨어있는 것입니다. 대구의 연로한 세대들은 지금도 그곳을 ‘미나카이 거리’라고 부르는 경우가 있는데, 그 배경에는 바로 이러한 사연이 서려있지요. 백화점 미나카이의 상호 형성 유래는 다음과 같습니다. ‘나카에(中江)’란 성씨의 일본인 형제와 ‘나카무라(中村)’란 성씨 등 셋이 모였으니 ‘삼중(三中)’, 즉 ‘미나카’입니다. 여기에 ‘오쿠이(奧井)’란 사람이 하나 추가되었습니다. 그의 성씨에서 우물 정짜만 뽑아 끝에 붙였으니 그 최종명칭이 바로 ‘미나카이(三中井)’로 정리되었지요. 이 넷이 바로 미나카이 백화점의 창립출자자입니다. 이 백화점은 이후 워낙 사업이 번창해서 식민지조선의 전역은 물론 서울과 만주의 신찡, 일본 도쿄까지도 지점이 개설될 정도였다고 합니다. 물론 나중에는 본사를 서울로 이전했다고 하지요.

경부선 철도개통으로 말미암아 대구의 식민지 예속경제는 한층 가속화되고, 대구는 마치 일본의 아주 후미진 지방소읍의 분위기로 전락하게 됩니다. 대구거주 일본인 장사꾼들은 나날이 세력을 확장하며 상권을 키워갔고, 대안동(향촌동) 입구에는 일본계 제일은행 출장소가 개설되었지요. 지금은 당시 건물이 헐려 사라지고, 그 자리엔 대구의 문화적 역사를 알려주는 향촌문화관이 세워져 있습니다. 현재 롯데백화점이 들어서 있는 과거 대구역 터전은 오로지 북성로 거주 일본인들을 위해 만들어졌던 곳입니다. 중앙로와 태평로가 만나는 지점으로 역전 광장은 20세기 대구시민들의 영광과 오욕을 함께 했던 사연 많은 공간입니다.

20세기 초반의 대구역 풍경

가와이 아사오의 ‘대구물어’에는 20세기 초반 대구군수였던 매국노 박중양에 관한 서술이 제법 많이 등장합니다. 그가 아름다웠던 대구 성곽을 파괴한 주범이었다는 사실은 이미 앞에서 말했지요. 대구 거주 일본거류민들의 요청과 이토 히로부미와의 밀약에 근거하여 대구 읍성을 완전히 파괴시켰습니다. 이것으로 크게 자본을 증식하게 된 일본인들은 박중양을 대구 개발의 은인이자 자신들을 부자로 만들어준 은혜로운 사람으로 추앙하기도 했습니다. 박중양이 대구를 떠날 때 일본인 거류민들과 친일적 대구시민들은 성금을 모아서 매우 고가(高價)의 금시계를 선물로 주었다고 하네요. 대구읍성 복원도에 의하면 당시 성곽 파괴 이전의 대구엔 동서남북에 각각 출입문이 있어서 동성, 서성, 남성, 북성이라 했습니다. 지금은 동네의 지명으로만 그 흔적이 어렴풋이 남아있을 뿐입니다.

대구읍성 파괴를 주도한 매국노 박중양

사진으로 만나는 박중양의 외모는 얼굴이 좁고 길며 눈썹의 길이가 비교적 짧습니다. 그 아래로 자리 잡은 눈매는 날카롭고 상대방을 매섭게 쏘아보는 듯합니다. 광대뼈는 다소 튀어나온 느낌이지만 콧대는 아래로 가파르게 내려뻗었습니다. 짧은 인중 위로는 카이젤 팔자수염을 기르고 있지만 양쪽 끝을 여덟팔자로 꼬아서 올린 모습과 더불어 숱이 그리 많지 않은 수염 모양이 몹시 경박하게 느껴집니다. 평생을 일본의 앞잡이로 살아온 탓인지 어느 일본인보다도 더욱 일본적인 강퍅한 인상이 강렬하게 풍겨납니다. 그것은 을사오적(乙巳五賊)이었던 매국노 이완용, 이근택, 이지용, 박제순, 권중현 등과 함께 이용구, 송병준 등의 일진회(一進會) 계열 악질매국노들의 관상에서 나타나는 느낌과 한 통속으로 비슷하게 다가옵니다.

박중양은 1897년 관비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으로 갔다가 일본의 근대화된 문물과 제도에 깊이 매료되었습니다. 일본 경찰제도 연구생으로 들어가서 경찰체계 및 감옥 제도를 깊이 연구했습니다. 당시 박중양은 일본에서 조선 이름을 버리고 ‘야마모토 신(山本 信)’이라는 일본식 이름으로 살았습니다.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유창한 일본어 실력을 바탕으로 일본군에 종군하는 통역관으로 활동했습니다. 평양, 진남포, 용암포 등 여러 격전지를 다니며 활동했습니다. 이후 서울로 와서 통감부 소속으로 통역활동을 하던 중 이토 히로부미의 눈에 들어서 각별한 비호를 받게 됩니다. 진주 판관, 대구군수, 경상북도와 충청남도 관찰사, 황해도 지사, 충청북도 지사 등 고위직을 두루 거쳤습니다. 이 모든 임명의 배경에 이토 히로부미의 배려와 입김이 항시 작용했으므로 세간에서는 그가 이토 히로부미의 양자(養子)였다는 소문마저 돌았지요.

창씨개명 후에는 이름을 박충중양(朴忠重陽)으로 고쳤습니다. 일본식 이름 속의 ‘충(忠)이 일본을 향한 충성이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일제말에는 매국노들의 조직인 중추원에서 참의와 고문 직책을 받았으며 마침내 일본 귀족원의 칙선의원으로 임명되었습니다. 항상 우쭐거리며 위세를 부리는 용도로 지팡이를 즐겨 짚거나 휘두르고 다녔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박작대기’라고 불렀습니다. 1935년 조선총독부가 발간한 ‘조선공로자명감(朝鮮功勞者銘鑑)’에는 박중양의 이름이 앞 부분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그만큼 일본으로서는 조선강점에 빛나는 공훈을 세운 중요서열 인물이었다는 뜻일 테지요. 해방 이후에도 대구 침산동과 오봉산(五峯山) 부근에 대저택을 짓고 살았는데, 지금도 그 유족들은 박중양이 불법으로 축적했던 막대한 유산을 지닌 채 풍요를 누리며 살아가고 있다니 참으로 기가 막힐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1950년대 후반 저의 소년시절, 대구 침산 언덕을 동네아이들과 올라가면 산꼭대기에 세워진 그 유명한 박작대기의 송덕비(頌德碑)를 볼 수 있었습니다. 그때는 그 비석이 어떤 의미를 지닌 것인지 전혀 분간을 못하던 시절이었습니다. 4월혁명이 일어난 뒤에 박중양 송덕비는 뜻있는 대구시민들이 부수었습니다. 박중양의 모든 생애와 활동은 오로지 일본을 섬기는 신념으로 초지일관(初志一貫)이었습니다. 일본의 충견(忠犬)으로 일생을 살았던 박중양은 평생 일본정부로부터 받은 훈장만 ‘한국병합기념장’ 등을 비롯해서 무려 10개가 넘었다고 하네요.

박중양이 대구군수를 지내며 대구읍성을 파괴해체하던 시절, 성곽에서 나온 엄청나게 많은 흙과 자갈을 소달구지에 실어서 읍성 북쪽의 달성습지로 옮겨 메웠습니다. 그곳은 여름 장마철에 비가 많이 오면 빗물이 흘러내려 모이는 곳이었지요. 저지대라 항상 물이 고여서 미나리가 자랐고, 미나리깡이라도 불렀습니다. 그곳을 성곽 해체에서 나온 토사로 메꾸었으니 이후 지명마저 자갈마당으로 바뀌었던 것입니다.

성곽 해체과정에서 나온 성곽 외벽의 큰 화강암은 계성학교 본관 초석(礎石)으로 쓰였거나 동산병원 내부의 청라언덕에 세워진 서양인 선교사 저택의 주춧돌로 사용되었습니다. 지금도 그곳에 가면 대구 성돌을 손바닥으로 만져볼 수 있습니다.

그 습지를 메운 자갈마당은 광대한 부동산이 조성되었고, 이것을 아주 헐값에 불하받은 이는 대구 거주 일본인 실력자인 이와세(岩瀬)였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큰돈을 벌 것을 염두에 두고 유곽(遊廓), 즉 매춘굴로 조성했습니다. 대한제국정부에서 이를 알고 금지공문을 내려 보내었지만 이토 히로부미의 방해로 묵살되었다고 합니다. 기회주의자 이와세가 시도한 매춘 영업이 부진해지자 다무라(田村)란 자가 이를 재빨리 인수해서 막대한 이익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당시에 만들어졌던 자갈마당 유곽은 해방과 6.25전쟁을 거치며 20세기 후반까지 성업을 이어갔습니다. 최근 대구시에서는 자갈마당 유곽을 완전히 철거하고 문화공간과 아파트 건설로 바꾸게 되었다고 하네요.

110년만에 헐리는 대구 자갈마당 집창촌

대구 성곽 해체의 혼란한 분위기를 틈타 대구에 있었던 각종 문화재가 파괴 도굴되는 일도 일어났습니다. 덕산동의 석빙고(石氷庫)가 파괴되었고, 영남문(嶺南門)과 측우대(測雨臺)도 무참하게 헐려 사라졌습니다. 대구 남문 부근에 거주하던 후쿠나가(福永)란 자는 대구 근교와 경주 및 부여 공주 일대의 고분들을 찾아다니며 집중적 도굴을 감행하여 무수한 매장문화재를 불법적으로 약탈 반출시켰습니다. 식민지시대 때 도굴범으로 손꼽히는 자들은 고려청자 최대의 장물아비였던 이토 히로부미, 니혼대학 교수로 백제 고분 1천기 이상을 도굴했던 가루베 지온(輕部慈恩), 대구 남선전기 사장으로 고령 합천 등지의 가야 고분을 집중적으로 도굴해서 일본으로 밀반출했던 오쿠라 다케노스케(小倉 武之助) 등을 들 수 있습니다.

가와이 야스오의 책에는 1909년 10월26일, 만주 하얼빈 역두에서 일어났던 안중근(安重根, 1879~1910)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격살사건(擊殺事件)에 대해서도 일본인의 관점에서 언급, 서술되고 있어서 흥미롭습니다.

중국 여순감옥에 수감된 안중근 의사

가와이는 모든 일본인들의 생각과 동일하게 자신의 책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호탕(浩蕩)한 개세(蓋世)의 영걸(英傑)’로 높이 추앙하고 있습니다. 안중근 의사의 저격에 대해서는 ‘한 조선인의 흉악한 독탄(毒彈)’으로 표현하고 있네요. 쓸쓸한 하얼빈 역두에서 쓰러진 그들의 영웅 이토 히로부미의 사망을 이렇게 애도하고 있습니다.

가와이 야스오의 책에는 대구 거주 일본거류민들이 즐겨 불렀던 일본 가요에 관한 서술도 보입니다. ‘대구행진곡’ ‘대구소패(大邱小唄)’, ‘대구부민가’ 따위가 있습니다. 대구에서 만들어진 콜럼비아레코드사와 빅터레코드사에서 정식으로 음반까지 제작되었을 정도였다고 하네요. 이 노래들은 완전히 일본의 전통적 음률체계에 기초한 일본풍 음악구조를 지녔다고 합니다. 당시 식민지조선의 민중들은 ‘희망가’, ‘부활’, ‘낙화유수(강남달)’, ‘암로(暗路)’ ‘휘파람’ ‘방랑가’ ‘학도가’ 등의 창가풍 노래를 비롯해서 포스터 작곡의 미국 노래 ‘기럭이’ 등이 불리던 시절이었는데, 대구 거주 일본거류민 집단에 의해 지역성을 담보한 음반까지 제작했을 정도이니 그들의 세력과 정치적 배경을 능히 짐작하게 합니다.

대구가 배출한 민족시인 이상화 선생

이상화(李相和, 1901~1943) 시인은 당시 대구의 이런 분위기에 거부감을 느끼며 ‘대구행진곡’ 가사를 지어 잡지 ‘별건곤(別乾坤)’에 발표했었지요. 1926년에 발표된 그의 대표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는 대구의 남쪽 앞산 자락의 긴 보리밭을 깔아뭉개고 거기에 일본군 비행장 활주로를 건설하는 광경을 보면서 격분을 못 이겨 쓴 시로 알려져 있습니다. 시인의 아우 이상백(李相佰, 1904~1966) 선생이 동아일보 칼럼에서 이런 사실을 증언한 바가 있습니다. 이와 같은 당시의 분위기를 배경으로 민족시인 이상화의 존재성은 더욱 뚜렷하게 부각이 됩니다. 지금 대구에는 민족시인 이상화 시비가 세워지고, 상화 시인이 살던 고택까지도 복원되었지만 정작 상화 시인의 주체적 시정신은 소멸되고 전혀 보이질 않습니다.

점점 극단주의로 치닫는 대구의 보수적 기질 형성은 20세기 초반 대구 거주 일본인들과 각별한 친교(親交)를 갖던 일부 친일적 한국인들에 의해 광범하게 조성된 부정적 잔재로 지적되기도 합니다. 당시 대구의 경제계, 사교계를 온통 주름 잡았던 친일파 이병학(李柄學,1898~1963) 같은 인물과 그 추종자들이 바로 그런 기질의 소유자였지요. 대구 출신의 시인 고월(古月) 이장희(李章熙, 1900~1929)는 이병학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그런 부친을 혐오하다가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이병학이 보여준 그런 기질들이 지금까지도 단절되지 않고 더욱 확장되어 하나의 지역적 현상으로 줄곧 이어져오고 있다는 생각마저 듭니다.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과 관련된 문제만 해도 그렇습니다. 일본에게 진 빚을 갚겠다며 대구에서 시작된 그 운동의 뜻은 참 좋았습니다. 하지만 이를 발의하고 이끌어간 책임자들이 전체 국민들로부터 모았던 성금을 과연 어떻게 처리했는지 그 이후의 경과는 전혀 밝혀져 있지 않습니다. 시작은 요란했지만 결말이 흐지부지된 채로 대중들의 관심에서 아주 덧없이 사라지고 말았네요. 국채보상운동 주역 중의 한 사람인 서상돈(徐相敦, 1851~1913)의 경우는 그의 막대한 자본을 전혀 국채보상에 쓰지 않고 상당한 부동산과 현금을 대구의 가톨릭재단에 기부했습니다. 가톨릭 신자로서 신심(信心)이 깊었던 것 같습니다. 이 때문에 대구가톨릭계에서 서상돈은 성모당 내부에 흉상까지 세워주며 대단한 선각자로 추앙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부친의 상당한 재산을 물려받은 서상돈의 아들 서병조(徐丙朝, 1882~1952)는 골수 친일파로 전락하여 몹시 비루한 삶을 살았으니 이러한 변화과정이 시사해주는 안타까운 부분은 결코 적지 않습니다.

20세기 초반 식민지 직전 혼란기의 구체적 사정을 전해주는 제대로 된 역사적 서술이 전무한 환경 속에서 대구에 살았던 한 일본인 장사꾼 가와이 야스오가 쓴 회고록 ‘대구물어’를 통해 우리는 당시의 정황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비록 일본인에 의해 일본인 중심으로 기록된 저술이라 결정적 한계가 있긴 하지만 사실 자체를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음미하고 다시 재해석하며 읽어갈 때 이 자료는 매우 소중한 내용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이 책에 서술된 여러 다양한 사람이나 사물 따위의 부정적인 내용을 통해 얻는 깨달음은 물론 반면교사의 가르침이 분명히 있는 것입니다. 그 가르침과 깨달음은 우리에게 대단히 소중합니다. 오늘은 일본인이 대구에 관해서 쓴 특이한 자료 ‘대구물어’의 이모저모에 관해 여러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보았습니다.

이동순

 시인. 문학평론가. 1950년 경북 김천 출생. 경북대 국문과 및 동 대학원 졸업. 동아일보신춘문예 시 당선(1973), 동아일보신춘문예 문학평론 당선(1989). 시집 <개밥풀> <물의 노래> <강제이주열차> 등 18권 발간. 분단 이후 최초로 매몰시인 백석 시인의 작품을 정리하여 <백석시전집>(창작과비평사, 1987)을 발간하고 시인을 민족문학사에 복원시킴. 평론집 <민족시의 정신사> <잃어버린 문학사의 복원과 현장> 등 각종 저서 60권 발간. 신동엽문학상, 김삿갓문학상, 시와시학상, 정지용문학상 등을 받음. 충북대학교,영남대학교 명예교수. 계명문화대학교 특임교수. 한국대중음악힐링센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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