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도 없는 낙관

[오피니언타임스= 칼럼니시트  우달]

모든 게, 빠르게, 변한다. 새로운 세기에 들어서며 평생 직업이라는 말이 무색해지더니, 어느 순간에는 핸드폰을 안 가진 사람이 없게 되었고, 이제는 그조차도 스마트폰이라는 소형 단말기로 모두가 연결되었다. 그러다 어느 날에는 인간의 사고력이 빅데이터에 의해 가볍게 제압당했고, 초등학생들의 장래희망 1순위가 유튜버가 되었으며, 암호화폐니 양자 암호니 하는 것들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시대가 도래했다. 이건 단지 IT 부문에 한해 말머리만을 언급한 것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대체, 눈이 휙휙 돌아갈 만큼 이 정신없는 세상 속에서, 얼마나 더 알고, 얼마나 더 배워야 하는 것일까.

사진=픽사베이
사진=픽사베이

이전의 세상에서는 한 인간의 인생이 어느 정도 예측 가능했다. 사회가 변화하는 주기는 길었고, 사람들의 수명은 지금만큼 길지 않았다. 불과 오래전의 이야기도 아니다. 바로 우리 전 세대만 하더라도 그렇다. 그들이 자식들에게 무작정 안정적인 직장을 기대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번듯한 직장 하나만 가지고 있어도, 웬만한 사회의 성장통에는 대비할 수 있었던 세상에서 살아왔으니까. 어쩌면 그들조차도 시대의 변화에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던 셈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 상황이 더욱 심화되었다. (굳이 악화라는 표현은 쓰지 않겠다.) 50년 남짓의 안정적인 삶을 위해, 2~30년을 꾹 참고 죽어라 고생하면 되던 시절은 이제 끝났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안정적인 삶 쪽이 사라졌다. 죽어라 고생은 여전히 해야 한다. 단지, 그 텀이 훨씬 짧아졌을 뿐이다.

그 결과, 우리는 머나먼 미래를 바라볼 수 없게 되었다. 어찌 될지 모르는 먼 훗날에 대비하기보단 새롭게 변한 시대에 당장 써먹을 뭔가가 더 중요해진 것이다. (먼 훗날에 대비한다는 건, 한 개인으로서는 더 이상 불가능에 가까운 게 돼버린 건 아닐까.) 하지만 아직은 그 생채기를 견디기 위한 사회의 체계적 시스템이 부족한 게 현실이다. 그런 탓에 변화에 조금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미 가진 것보다 새로움에 조금 더 관심이 많은 이들이 사회의 각종 재화를 긁어모으고 있다. 하루하루 쌓여가는 곳간만을 바라보며, 조금씩 삶을 불려 가던 과거 '성실함'의 아이콘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그들은 자신들만의 리듬으로 다음 세상을 구성해가고 있다. '기성'이라는 말의 의미까지도 확연히 달라진 것이다.

이 시대를 잘 살아 가려면?

이러한 현실에서 우리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불안'이라는 씨앗이 자연스레 이식되었다. 미지에 대한 두려움만큼 인간에게 원초적인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게 있을까. 그렇다면 우리는 이 시대를 잘 살아가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가장 좋은 방법은 사회의 변화 주기와 인간의 생애 주기가 어느 정도 일치하는 시점으로 돌아가, 인생의 커다란 걱정 하나 정도는 덜며 사는 게 가장 좋겠지만 그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망연히 손 놓고 있을 수도 없고, 오지 않는 고도를 기다리며 언제까지나 제자리에 머물러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사회는 소수 개인에 의해서든, 다수 개인의 의사가 합치되어서든, 하나의 큰 호흡을 가지고 움직인다. 그 거대한 움직임은 개인으로서는 도저히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 가령 서핑을 할 때, 우리는 파도의 높낮이에 따라 몸을 일으켜 세우거나 낮추거나 한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영역 내에서 할 수 있는 걸 해내는 수밖에 없다. 이미 불안이 싹을 틔운 사람에게는 그것이 세상의 전부 같겠지만, 사실 감정 그 자체는 인간의 수많은 마음 중 하나에 불과하다. 이렇게 제 한 목숨 부지하기조차 어려운 세상에선, 우리는 적어도 자기 마음 정도는 잘 들여다보고 다룰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무대책의 낙관이란?

나는 나를 포함한 이러한 유형의 분들께 '답도 없는 낙관'이라는 하나의 대안을 제시하려 한다. 이 말은 글자 그대로 무대책의 낙관을 의미한다. 지금까지가 어떠했든 간에 ‘앞으로는 이전보다 더 나빠질 것도 없다’는 뜻 정도로 생각하면 좋을 것 같다. 사실 어떻게 보면 이건 낙관과는 꽤 거리가 있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많은 것이 송두리째 뽑혀 나가는 세상 속에서, 과거의 어느 한 실패에만 연연하고 있기에는 앞으로 다가올 수많은 기회가 너무나도 아깝다. 변화라는 것의 이면에는 언제나 ‘가능성’이라는 긍정적인 모습도 있는 걸 테니까.

사진=픽사베이
사진=픽사베이

무작정 기대에 부푼 희망은, 일이 잘 풀렸을 땐 조금도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반대의 경우에는 그만한 크기의 실망을 남기고 사라진다. 하지만 우리는 상처 받아 슬퍼할 여유조차 허락되지 않는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 이러한 환경에선 다음을 기약하는 감정의 발 빠른 스위칭이 중요해진다. 어떠한 벽에 마주했을 때 마냥 풀이 죽어지내기보다, 다시 주변을 둘러보며 새로운 방법을 모색하는, 그 한 걸음이 우리에겐 필요한 것이다. 우리가 지금 헤매고 있는 이 미로는, 지금껏 알고 있던 3차원의 정형화된 형태가 아니게 되었으니까 말이다. 그러므로, 무엇이든 좋다. 내 경우에는 몰상식한 낙관을 끄나풀로 삼았지만, 숨 막히는 불안감 속에서 자기 마음이 중심을 잡을 수 있도록, 자기만의 작은 매개체를 형성하는 것이 지금의 우리에게는 무엇보다 필요하지 않을까.

우달

우리가 자칫 흘려보낸 것들에 대해 쓰겠습니다.
그 누구도 스스로 모르는 걸 사랑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칼럼으로 세상을 바꾼다.
논객닷컴은 다양한 의견과 자유로운 논쟁이 오고가는 열린 광장입니다.
본 칼럼은 필자 개인 의견으로 본지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반론(nongaek34567@daum.net)도 보장합니다.
저작권자 © 논객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