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최초의 재즈전문 가수 이복본

[오피니언타임스=칼럼니스트 이 동 순]

시인 바이런(Byron, 17881824)은 인간의 삶이 미소와 눈물 사이를 왕래하는 시계추와 같다고 말했습니다. 사실 인간은 항시 넘실거리는 비극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아슬아슬하게 자신의  삶을 지탱해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특히 우리 한국인의 경우 식민지와 분단의 가파른 시절을 통과해가면서 돌연한 비극성과 수시로 맞닥뜨리며 온통 넋을 놓은 채 무대책으로 견디어갈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토록 힘겨웠던 난세에도 미꾸라지처럼 힘든 정황을 벗어나 자신과 일가족의 이익만 챙기며 다른 사람들이야 어떤 고통을 겪든 말든 전혀 아랑곳조차 하지 않던 부류들도 많았었지요. 그 격동 속에서 민족 전체가 마치 퍼붓는 소나기를 온몸으로 맞는 어린 고양이처럼 후줄근히 젖은 채 전전긍긍 지낼 적에 우리는 삶에 굴곡과 파란도 유난히 많았던 한 대중문화인의 활동과 발자취를 유심히 뒤따라가며 그가 살았던 삶의 경과를 찬찬히 음미해보면서 많은 상념에 잠깁니다. 그의 개인사가 겪은 사연들은 우리 현대사의 굴곡과 마찬가지로 정비례하기 때문입니다.

누구냐 하면 바로 가수이자 희극배우였던 이복본(李福本, 19121950)이란 인물입니다. 그 낯선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테지요. ‘복본이란 이름은 후쿠모도란 일본식 이름으로 짐작됩니다. 그의 출생과 관련해서는 어떤 자료에서도 찾을 수 없지만 한국전쟁시기 행방불명된 인사들의 행적을 더듬어주는 문서가 있으니 그것은 실종사민 안부탐지 신고서(失踪私民 安否探知 申告書)’란 제도입니다. 세상에 별의별 서류가 다 있다고 하지만 대한적십자사가 발급해주는 이런 문서가 있다는 사실은 전혀 몰랐습니다. 이렇듯 기이한 문서에서 우리는 대중연예인 이복본의 출생지와 기타 여러 내용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복본은 1912년 황해도 연안에서 출생했습니다. 마지막주소는 서울시 중구 명동 66번지로 되어 있군요. 그는 6·25가 일어난 뒤에도 피난가지 않고 그 위기 속에서도 전쟁 전부터 자신이 운영해오던 충무로 식당에 나가 평상시처럼 일하고 있었습니다. 재산에 대한 애착 때문일까요? 현실감각이 무딘 탓이었을까요? 공산군 치하이던 195085일 오전 8시경, 인민군 정치보위부에서 나왔다는 내무서원이 식당으로 찾아와 이복본을 체포해 어디론가 끌고 갔습니다. 죄명은 친일활동, 여기에다 해방 후 이승만정권의 국방군위문대에서 활약했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이복본은 그로부터 한 주일 만에 집으로 무사히 귀환합니다. 바로 그 직후 너무도 안타깝고 충격적인 사태가 발생합니다. 맥아더 장군이 주도하는 인천상륙작전이 막 개시되기 직전, 그러니까 9.28수복이 가까워지던 어느 날 이복본은 이전에 체포되었을 때 빼앗겼던 시계를 찾으러 다시 인민군보위부를 찾아갔다가 그 길로 아주 돌아오지 못하고 된 것입니다. 그 섣부른 경과가 너무도 한 토막의 코미디 같을 뿐만 아니라 참으로 어리석고 경솔했던 행동으로 보입니다. 가족들이 숨죽이며 가장을 기다리고 있는데 어찌 그처럼 우매한 짓을 할 수 있단 말인지요? 전쟁 시기 그토록 험한 세월에 참으로 별것 아닌 시계 하나를 찾으러 무서운 호랑이굴로 들어가 스스로 목숨을 잃어버리게 되다니요.

아무튼 이렇게 다시 체포된 이복본은 수많은 납치인사들 틈바구니에 끼었고, 인민군정치보위부는 당시 약 3.000명가량을 납치 구금해두었다가 전황이 불리해지자 서울 미아리고개와 영천고개 등 두 루트를 통해 북으로 끌고 갔습니다. 이 때문에 단장(斷腸)의 미아리고개란 말이 생겼지요. 창자를 끊어내는 듯 비통한 가족이산이 대규모로 발생한 것입니다. 이때 이복본은 의정부방향으로 끌려갔다고 합니다. 내외문제연구소가 제공한 납북인사 북한생활기-죽음의 세월’(동아일보, 1962.6.6.) 기사에는 이복본이 평안북도 철산광산의 연예서클에 유배되어 최저생활로 살아간다는 내용이 보입니다. 하지만 가요평론가 황문평의 증언에 의하면 이복본은 북으로 끌려가다가 납치인사들의 관리가 귀찮아진 인민군들이 서울근교에서 무참하게 학살할 때 목숨을 잃고 그 시신이 중랑천주변에 버려졌다고 하네요. 어느 것이 맞는지 확실한 분간이 잡히지 않습니다. 휴전 후 이복본의 실종자신고서를 작성제출한 사람은 부인 이병숙(李秉淑) 여사였습니다. 그 문서에서 이복본의 최종직업은 연극배우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삶의 결말을 비극적으로 마감한 이복본의 생애와 활동을 한번 따라가 보기로 할까요. 황해도에서 태어난 이복본은 일찍이 부모를 따라 서울로 옮겨와서 살았습니다. 어려서부터 키가 남보다 유난히 커서 키다리 뽀다리로 놀림을 받았습니다. 나이 17세에 이복본의 신장은 이미 183cm나 되었습니다. 옛날식으로 말하자면 육척장신(六尺長身)의 소유자이지요. 이런 신체적 조건 때문에 이복본은 1929년 서울 중동고보에 입학해서 학교농구부의 대표선수가 되었습니다. 그해 11월에 전조선 고보(高普) 대항 농구리그전에 출전해서 경성2, 중앙고보, 청학고보, 선린상고, 경기상고, 휘문고보, 청우고보, 남상고보 등 여러 학교들과 경기를 펼쳤습니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931년 고보대항농구리그전에서 이복본은 난데없이 삼각고보 대표선수 명단에서 이름이 확인됩니다. 아마도 그의 존재를 탐낸 삼각고보에서 이복본을 특별히 스카우트해간 듯합니다. 중앙기독교청년회원 농구대회에도 대표선수로 출전한 이복본의 이름이 보이네요.

키도 컸지만 얼굴의 골격이나 윤곽이 마치 혼혈미남 같은 이국적 인상을 주었기 때문에 그 독특함이 마침내 이복본을 연극배우로 데뷔하도록 이끌었던 것 같습니다. 그의 대중연예계 데뷔는 21세 무렵입니다. 1933년 조선연극사(朝鮮演劇舍) 공연무대에 오른 것이 처음이지요. 이후로 1934년 안종화 감독의 작품 청춘의 십자로영화에 이원용, 신일선, 최명화, 양철 등과 함께 출연하는 배우로서 이름을 얻었습니다. 이복본의 명성이 정식으로 언론에 등장하는 것은 193584일 경성방송국 밤 910분에 방송된 경성방송국(JODK) 라디오 코미디프로 유선형(流線型) 결혼생활 전경입니다. 당시 이복본의 소속은 서울의 극단 무랑루쥬였습니다. 배역으로는 모던보이 이복본과 그의 아내 전춘우, 또 그의 친구 노재신과 개똥어멈 김길순 등입니다 배역 중의 노재신(盧載信)은 바로 배우 엄앵란의 어머니이지요. 연출은 이소동이 맡았습니다.

1935년에는 나운규가 직접 감독한 영화 무화과그림자에 윤봉춘, 현방란 등과 함께 출연했습니다. 이복본이 본격적인 가수로 데뷔한 것은 1936년의 일입니다. 빅타레코드사에서 째즈쏭이란 장르명칭으로 자미 잇는 노래누가 너를 미드랴등 두 곡이 수록된 음반을 49396번으로 발매한 것이 처음입니다.

이 무렵에 이복본은 이미 코미디언과 가수를 겸한 활동이 무대 위에서 놀라운 각광을 받을 것 같다는 예감을 가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하여 새롭게 고안해 낸 것이 프랑스의 샹송가수이자 코미디언이었던 모리스 슈발리에(Maurice Auguste Chevalier, 1888~1972)의 무대매너와 창법모방입니다. 모리스 슈발리에의 특징이라면 코에 걸린 듯한 창법과 스타일입니다. 슈발리에는 1930년대 프랑스의 정감이 느껴지는 뮤지컬 코미디스타입니다. 그는 당시 뮤지컬이 영화의 한 장르로 자리를 잡는데 큰 몫을 했었고, 재치와 세련미가 느껴지는 멋쟁이 영화배우였습니다. 지금도 팬들이 기억하는 슈발리에의 트레이드마크는 한 손에 든 지팡이, 삐딱하게 쓴 맥고모, 그리고 과장된 억양입니다. 20세기의 개막과 더불어 거의 70년 가까운 세월을 쉬지 않고 슈발리에는 서민들의 삶과 애환을 노래로 달래고 꿈을 키워주었습니다.

이복본은 모리스 슈발리에의 연기와 노래를 보면서 거기에 완전히 매료되었습니다. 아마도 자신이 식민지조선의 모리스 슈발리에가 되어야겠다는 결심을 굳혔을 테지요. 그 후 이복본은 거울을 보며 열심히 슈발리에 스타일을 연습해서 드디어 서울 부민관 무대에 올랐습니다. 마치 슈발리에처럼 검은 연미복에 실크해트를 쓰고 손에는 스틱을 멋스럽게 걸어 휘두르며 등장했습니다. 그때 이복본은 인기 높던 신민요 노들강변을 빠른 스윙템포로 부르면서 2절의 중간부분 에헤요 데헤요를 오케레코드사의 스윙밴드 멤버들과 함께 전원이 일제히 일어서서 합창으로 화답하는 방식을 연출했습니다. 이것이 객석의 관중들에게 엄청난 호응을 불러일으켜서 휘파람과 박수세례가 연달아 터졌습니다. 일부러 술 취한 사람처럼 혀를 꼬부려서 반복, 과장의 변칙창법(變則唱法)을 연출한 것이 뜻밖에도 놀라운 호응을 얻었던 것이지요. 박부용이 부른 원곡 노들강변과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의 노래가 만들어졌습니다.

노들강변 봄버들 휘늘어진 가지에다가

무정세월 한허리를 칭칭 동여 메여볼까

에헤요 데헤요(에헤요 데헤요) 에헤요 데헤요(에헤요 데헤요)

에헤요 데헤요 에헤요 데헤요 봄버들도 못 믿으리로다

푸르른 저기 저 물만 흘러 흘러 흘러 가노라

이후로 변틱창법으로 부르는 노들강변은 이복본의 최고대표곡이 되었습니다. 이복본이 한국전쟁시기에 납치되어 사라진 이후로 신카나리아가 악극단무대에서 줄곧 이 노래를 이복본 스타일로 불렀지만 그 원조는 어디까지나 이복본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신카나리아의 변칙창법을 통해서 지금은 전혀 들어볼 수 없는 이복본 스타일 재즈창법을 상상으로 음미하며 짐작해볼 뿐입니다.

이복본은 일제말 각종공연에서 일본군에게 항복하는 영국사령관의 모습과 히틀러의 표상을 코믹하게 재현하는 연기로 인기를 모았습니다. 콧수염을 단 히틀러의 연기를 하다가 한 순간 항복하는 영국사령관의 모습으로 돌변하는 연기였지요. 1936년 빅타사에서 첫 음반을 낸 이후로 이복본은 도합 26곡이 담긴 음반을 발표합니다. 거기엔 재즈송만 17편으로 가장 많고, 재즈민요가 1, 유행가 5, 만요 1, 넌센스 2편 등이 있습니다. 이것만 보더라도 우리는 이복본을 한국최초의 재즈전문가수라고 부를 만합니다. 이복본 노래의 작사가는 주로 홍희명, 고파영, 김해송이 맡았고, 작곡가는 스미스, 전수린, 김송규(김해송)가 담당했습니다. 넌센스 대본은 이복본 자신이 구성했습니다. 이복본 재즈송의 특성은 삶의 흥취와 사랑, 행복, 청춘의 표현 등 단순한 내용들이 주류였습니다.

19361월의 데뷔곡 누가 너를 미드랴에서 시작하여 19403월의 마지막 재즈송 쓸쓸한 일요일에 이르기까지 이복본의 활동기간은 도합 43개월입니다. 음반발표가 끝난 뒤로는 오케연주단과 조선악극단 등의 각종공연에 참가했습니다. 이복본이 부른 노래는 주로 익살스런 재즈송이지만 대단히 유감스럽게도 현재 이복본의 음반으로 전해지는 것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무슨 까닭으로 이렇게도 씻은 듯이 음반자료가 사라진 것인지 수수께끼입니다. 오직 단 하나 이복본 노래의 가사가 전하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청춘의 노래입니다. 하지만 가사의 일부만 보이고 악곡의 음률은 어디에서도 확인할 길 없습니다.

으스름 달 아래 옛 노래 그리워라

에레나 나의 사랑아 옛날을 잊었느냐

너와 나와 단둘이만 달 아래 앉아서

사랑의 노래 청춘의 노래 부르던 옛날을

-‘청춘의 노래부분

이 노래를 소개하는 음반사의 광고 문구는 다음과 같습니다. ‘들으시기에 춤추시기에 어느 편으로든지 만점인, 언제나 대호평인 이복본씨의 째즈쏭이 문구는 빅타레코드사가 이복본의 재즈송에 대한 상당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음을 짐작하게 합니다.

공연의 경과를 살펴보면 1936821일부터 이틀간 이복본은 서울의 가극단 무란루주소속으로 대구의 극장 만경관에서 지방공연을 가집니다. 당시 26인으로 구성된 악단은 전 이왕직양악단(李王職洋樂團)의 멤버들이었습니다. 그날의 공연메뉴는 독특한 뮤직앨범과 탭댄스, 유행가, 무용, 넌센스 등입니다. 이복본은 임생원 등 총 40명의 단원들과 함께 총출연했습니다.

1937년부터는 가수활동을 잠시 중단하고 오로지 희극배우로만 활동했습니다. 이듬해에는 신불출(申不出, 19071969)의 만담회에 출연하기도 했습니다. 19399월에는 조선악극단의 리듬보이즈멤버로 활동하다가 아리랑뽀이즈로 이름을 바꾸고 본격적인 활동을 펼칩니다. 워낙 큰 신장에 세련된 외모, 그리고 능수능란한 재치와 순발력이 이복본의 명성을 더욱 높여주었습니다. ‘아리랑뽀이스란 이복본을 중심으로 김해송, 박시춘, 송희선 등이 기타와 바이올린을 함께 다루며 가극에서 코미디를 소화시킨 남성보컬그룹입니다.

1940323일은 동아일보 창간 20주년기념 행사로 춘계독자위안연예대회가 서울 부민관에서 열렸습니다. 이날 출연진은 손목인, 이화자, 장세정, 조영숙, 이난영, 김정구, 이준희, 이인권, 박향림, 김해송, 박시춘, 송희선, C.M.C밴드 등이었습니다. 이복본은 오케그랜드쇼 제1부에 나와 애마진군가’, ‘탄식하는 피에로등 두 곡을 불렀습니다. 2빛나는 눈동자편에도 출연해서 이인권, 서봉희, 홍청자, 김혜자, 배남시 등과 함께 춤을 추었습니다. 3도레미파데파트양복부무대에서는 박시춘, 송구선과 함께 춤을 춥니다. ‘주단포목부란 이름의 무대에서도 현경섭, 박향림 등과 함께 공연했고, 피날레 직전 여흥장 아리랑광상곡에서는 아리랑뽀이스의 멤버로 출연해서 노래를 불렀습니다. 이날 공연에서는 CMC밴드와, 아리랑보이스, 저고리시스터즈에 대한 소개가 있었습니다. 당시 신문지상에는 아리랑보이스에 대한 다음과 같은 소개문이 실렸습니다.

아리랑뽀이즈는 저고리씨스터의 오빠다. 그들은 노래를 사랑하고 춤을 즐기고 기쁨을 풍기고 우슴에 사는 아리랑형제단이다. 설음과 근심걱정에 쩌들어 우슴을 잊은 우리에게 우슴과 노래를 파는 백화점원들이다.  

가수 김정구는 당시 동양의 장미라는 가극에 참가했었는데 극의 중간에 저고리시스터와 아리랑보이스가 노래와 코미디를 함께 공연했다고 회고합니다. 그 무대에서 이복본은 맥고모자에 기타를 거꾸로 들고 이종철, 박시춘과 함께 청중을 웃음의 도가니에 빠뜨렸습니다. 김해송은 물론 자신의 장기인 재즈곡을 연주했지요. 악극단무대에서 이복본과 자주 공연했던 가수 신카나리아도 은근하고 세련된 유머로 관중들을 사로잡았다고 이복본을 회고합니다. 신카나리아는 이복본과 함께 엮어가는 뮤지컬의 사이사이에 코미디와 노래를 삽입했었는데, 그 재치와 순발력은 타고난 예인기질을 느끼게 했다고 합니다. 당시 신문기사는 이복본을 보기만 해도 웃음이 터지고야 마는 웃음의 화수분이다. 그의 유모아의 센스는 전일본적이라는 전문가들의 평을 받은 만큼 독보적 재주를 가진 아리랑뽀이즈의 중견이라고 높이 평가했습니다. 이복본의 연기는 흔히 이종철과 비교가 되는데, 이종철이 일본풍 만담가로 간주된다면 이복본의 연기에서는 서구적 세련미가 느껴진다는 세평을 얻었지요.

1941년 봄에는 오케레코드사가 주최하는 악극 봄의 콘서트가요제 10경에 출연해서 재즈송 춤추는 목가(牧歌)’를 불렀습니다. 이날 공연의 연출은 조명암, 편곡은 김해송이 맡았습니다. 드디어 1943년 험난한 제국주의 말기의 세월입니다. 이복본은 만주개척민을 위문하는 연예대로 대장으로 임명되어 만주일대에 파견됩니다. 그해 85일 서울을 출발한 이복본은 만주각지의 조선인개척촌을 순회합니다. 함께 간 대원으로는 배우 김연실과 가수 고운봉, 일본인 지전일남 등입니다. 19422월에는 조선악극단 공연 사무한의 태양에 장세정, 김해송, 이난영, 김정구, 이화자, 홍정희, 서봉희, 성애라, 김민자, 유정희, 지최순 등과 함께 출연했습니다. 그 출연을 마치고 8월 중순에도 만주개척민위문 연주반을 두 팀으로 구성해서 대장이 되어 만주일대를 순회 공연합니다. 백년설, 장세정, 이규남, 송희선, 김용녀, 임소향, 조선악극단, 화랑좌, 반도악극단, 반도연무좌 등이 이 위문대에 참가했습니다. 같은 해 827일에도 만주개척 위문팀 단장으로 만주의 오도구, 고산자, 창성둔 일대를 다녀옵니다. 이렇게 적극적으로 서너 차례나 대장, 혹은 단장의 직책으로 만주위문공연을 다녀왔는데 그 배경에는 조선총독부 고위관리와의 특별한 친분이 작용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해 10월에는 만주개척촌 위문연예대원 귀환보고좌담회에 참석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이복본은 만주개척지의 치안확보는 오로지 특설부대의 공적이라고 말했습니다. 매일신보가 주최한 이날 좌담회참석자는 백년설, 장세정, 김능자, 이복본, 정대택, 김영택, 고준승 등입니다. 이복본은 좌담에서도 만담가기질로 익살을 떨었습니다. 개척촌에서 닭 한 마리를 대접받았는데 제대로 익은 상태가 아니어서 싸갖고 와두었는데 뜻밖에도 낭자비적단(娘子匪賊團)이 침입해 그 닭을 하나도 남김없이 먹어치웠다고 말합니다. 그 낭자비적대의 두목이란 바로 같은 위문단원 김능자였다고 하면서 좌중을 웃깁니다.

당시 이복본은 사명감을 갖고 이 일에 임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좌담회 중에 만주개척민의 사명을 연극작품으로 만들어 그들로 하여금 사명감을 느낄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는 각오를 밝힙니다. 뿐만 아니라 일본군병사들과 특수부대 요원들의 노력덕분으로 개척민들이 편안하게 잘 살아간다는 불필요한 말까지 했습니다. 8·15광복이 되기 직전까지 이복본은 각종 위문공연과 일제가 기획한 공연무대에 올랐습니다. 이 사실들은 이복본이 각종 친일활동에 자발적이고도 적극적으로 힘을 쏟았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해방이 되자 이복본은 잠시 활동을 쉬고 있다가 1947516, 어느 라디오프로에 출연합니다. 이때 받은 출연료 전액을 순직소방관에 대한 조의금으로 전달해서 미담으로 칭송을 받았습니다. 여기에다 서울시 소방국 주최 방화(防火)전람회에 출연하여 그림연극을 공연하기도 했습니다. 이 공연은 한국에서 처음으로 시도된 그림연극으로 기록이 될 것입니다. 같은 해 가을에는 라디오만담 무역풍(貿易風)’에 신카나리아와 함께 출연해서 화제를 모았습니다. 해방 후 이복본의 활동은 주로 악극단공연에 참가하는 활동으로 일관했습니다. 그가 참가했던 단체는 손목인악단, 수도코메디쇼, K.P.K.악단, 무궁화악극단 등입니다. 한국전쟁이 일어난 해인 195014, 이복본은 대한청년단 창립 1주년 기념공연에 참가합니다. 그 공연의 제2부 음악시극 칼멘환상곡’(9)에 출연했는데, 함께 무대에 오른 사람으로는 김해송, 이종철, 손일평, 이인권, 최병호, 이난영, 이화자, 신카나리아, 장세정, 황정자, 이몽녀 등입니다.

프랑스의 코미디언이자 샹송가수 모리스 슈발리에를 흉내 내어 인기가 높던 보드빌리언, 즉 통속적인 희극배우 이복본. 그는 소년시절 농구선수 출신으로 가수지망생이었지만 무대에서의 길은 코미디와 가창을 겸한 익살스런 즐거움을 주는 무대인으로 대중 앞에 모습을 나타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남긴 노래들 중 단 한 곡도 대중들의 가슴에 크게 각인된 히트곡이 없었다는 사실은 많은 아쉬움을 남기게 합니다. 삶 자체가 불안한 코미디각본처럼 기우뚱거리다가 돌연히 무대 뒤로 사라져 보이지 않게 된 비운의 대중연예인이었지요. 이 때문에 이복본은 대중들의 기억 속에 안개처럼 나타났다가 덧없이 사라져버렸습니다. 우리가 오늘날 TV를 통해서 대하는 원로코미디언이나 개그맨의 프로를 보고 있노라면 지난날 이복본을 비롯한 초창기 보드빌리언들의 엉성하면서도 혼신의 열정을 다하던 노력과 열정을 느끼게 됩니다.

비록 비극적 생애로 마감하고 말았지만 이복본은 코미디장르가 아직도 제 자리를 잡지 못하던 시절에 극단 막간무대에 혜성과 같이 나타나 시름에 잠긴 식민지백성들을 웃기고 울렸던 최초의 개그맨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지금 우리 곁을 떠났지만 그가 뿌린 익살과 만담, 코미디, 예인적 재능과 기교는 후배 코미디언들과 개그맨으로 이어져 여전히 우리 곁에서 살아 작용하고 있을 것입니다.

이동순

 시인. 문학평론가. 1950년 경북 김천 출생. 경북대 국문과 및 동 대학원 졸업. 동아일보신춘문예 시 당선(1973), 동아일보신춘문예 문학평론 당선(1989). 시집 <개밥풀> <물의 노래> <강제이주열차> 등 18권 발간. 분단 이후 최초로 매몰시인 백석 시인의 작품을 정리하여 <백석시전집>(창작과비평사, 1987)을 발간하고 시인을 민족문학사에 복원시킴. 평론집 <민족시의 정신사> <잃어버린 문학사의 복원과 현장> 등 각종 저서 60권 발간. 신동엽문학상, 김삿갓문학상, 시와시학상, 정지용문학상 등을 받음. 충북대학교,영남대학교 명예교수. 계명문화대학교 특임교수. 한국대중음악힐링센터 대표.

 

칼럼으로 세상을 바꾼다.
논객닷컴은 다양한 의견과 자유로운 논쟁이 오고가는 열린 광장입니다.
본 칼럼은 필자 개인 의견으로 본지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반론(nongaek34567@daum.net)도 보장합니다.
저작권자 © 논객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