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타임스 =칼럼니스트  이동순]

한국가요사의 흐름을 눈으로 따라가다 보면 그 명성이나 활동의 내용이 상당히 화려했음에도 불구하고 후대에 이름이 별로 알려지지 않은 경우가 자주 보입니다. 그러한 대표적 사례가 가수 최남용(崔南鏞, 19101970)이 아닌가 합니다. 한번 유명가수로 고정된 분들의 이름은 줄곧 가요사에 등장하는데 최남용의 경우는 어떻게 해서 이토록 대중들의 기억에서 아주 사라져버린 것일까요

레코드 가수 인기투표 5위
레코드 가수 인기투표 5위

가수 최남용을 떠올리기 위해서는 먼저 193510월 시인 김동환이 운영했던 당시의 인기대중잡지 '삼천리(三千里)'지가 실시한 '레코드가수 인기투표'의 결과를 먼저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그 투표의 결과에서 1위는 채규엽, 2위는 김용환, 3위는 고복수, 4위는 강홍식, 그리고 5위에 오른 가수가 바로 최남용입니다. 그만큼 대중들의 인기가 상당히 높았다는 증거입니다. 이탈리아의 테너가수 티토 스키파(Tito Schipa, 1888~1965)를 연상시키게 하는 맑고 깨끗한 미성에다 얼굴이 워낙 잘 생겨 희랍의 조각 작품을 떠올리게 하는 꽃미남이었습니다.

송도거상의 아들 최남용

가수 최남용은 1910년 경기도 개성에서 수완이 좋고 부유한 송도거상(松島巨商)’의 아들로 출생했습니다. 성장기 때부터 내성적이고 감상적 기질이었던지라 문학, 음악 쪽으로 호감을 가졌었고, 송도고보를 다니던 중에는 달 밝은 밤에 기타와 바이올린을 들고 선죽교와 만월대로 가서 악기연주와 가창연습에 심취했다고 하네요. 그러던 중 부친의 사업실패로 가정형편이 차츰 기울게 되자 학업을 중단하고 쌀을 전문으로 거래하는 미곡상(米穀商)으로 나서게 되었습니다. 최남용은 사업에 종사하면서도 틈틈이 악기를 손에서 놓지 않았습니다.

전성기 시절의 최남용
전성기 시절의 최남용

어느 날, '황성옛터'의 가수 이애리수가 고향 개성을 다니러 왔다가 평소 친하게 지내던 후배 최남용에게 찾아와 서울로 가자고 권유했고, 이애리수는 그를 자신이 전속으로 활동하던 빅타레코드사 이기세(李基世, 1888~1945) 문예부장에게 소개했습니다. 그것이 최남용의 22세 되던 1932년 가을이었습니다. 당시 빅타레코드사에는 이애리수 외에도 동향 선배인 작곡가 전수린 선생까지 있어서 한결 마음이 편안했습니다. 최남용은 오디션을 거친 다음 193212, 데뷔작품으로 '갈대꽃'(이고범 작사, 전수린 작곡), '마음의 거문고'(이고범 작사, 김교성 작곡) 등 두 곡이 담긴 앨범을 발표하면서 가수로 데뷔하게 됩니다

이후 빅타사에서 '마음의 거문고', '덧없는 봄비', '방아타령', '산나물 가자', '눈물과 거짓'. '아득한 꿈길', '꿈이건 깨지 마라', '더듬는 옛 자취', '사랑의 울음', '재만조선인행진곡(在滿朝鮮人行進曲)', '내가 우노라', '서울소야곡', '가세 상상봉(上上峰)', '사공의 노래', '산으로 바다로', '내버려 두세요', '미쳐라 봄바람', '실버들', '울어 보지', '가슴만 타지요', '삼성가(三城歌)', '청춘아 부르짖어라', '우리의 가을', '나는 싫어', '노래 부르세', '끝없는 추억', '미안하외다', '이를 어쩌나', '향내 나는 풀빛', '한 많은 밤', '정다운 남국', '눈물의 가을' 30여곡을 발표했습니다.

레코드사 대표로 소개돼 ....
레코드사 대표로 소개돼 ....

빅타레코드와 결별

19358'애달픈 피리'를 마지막 작품으로 발표하고 무슨 사연이 있었던지 빅타레코드와 결별하게 되었지요. 빅타 시절에는 홍작(紅雀)’이란 예명으로 일본 빅타사에서 음반을 내기도 했습니다. 빅타사에서 활동할 때 가장 콤비를 이루던 작사가는 이고범(이서구), 이하윤, 이현경 등입니다. 그밖에도 시인 김안서, 김팔봉 등과 이벽성, 유백추, 고마부, 이청강, 박영호, 두견화 등과도 함께 했습니다. 콤비 작곡가로는 단연코 15곡의 김교성, 8곡의 전수린 등 두 분입니다. 그밖에도 장익진, 정사인, 이하윤, 이경주, 조일천, 이경하 등이 있습니다.

당시 가수들은 한 레코드사에 전속으로 활동하면서 조만간 다른 회사로 소속을 옮길 계획이 있는 가운데서도 두 회사 이름으로 제각기 음반을 발표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최남용도 이에 해당합니다. 19351월에 '즐거운 연가(戀歌)''거리의 향기' 등 두 곡이 수록된 음반을 태평레코드사에서 발표합니다. 소속사를 완전히 옮긴 다음에 지난 시절을 돌이켜보노라면 바로 이 음반이 태평에서 발표했던 첫 앨범으로 기록이 됩니다. 태평레코드사에서는 구룡포(具龍布)란 예명과 최남용이란 본명을 함께 사용했습니다. 태평레코드사에서 발표한 최남용 앨범의 곡목들은 상당히 많습니다

1930년대 대표가수 최남용
1930년대 대표가수 최남용

들꽃타령등 수많은  앨범곡들

'돈바람 분다', '애상의 썰매', '풍년타령', '상사수(相思樹)', '푸른 호들기', '들국화', '명승행진곡', '정한의 마음', '들뜨는 마음', '울리러 왔던가', '황금광(黃金狂) 조선', '남포의 지붕 밑', '뽕따러 가세', '승리의 거리', '밀월(蜜月)', '비빔밥', '바다의 광상곡(狂想曲)', '비련(悲戀)', '강남애상곡', '불야성', '고향의 처녀', '망향곡', '사랑의 포도(鋪道)', '인어의 노래', '해금강타령', '눈 타령', '부세가(浮世歌)', '비가(悲歌)', '시들은 방초', '아리랑', '오동나무', '사향(思鄕)의 썰매', '나룻배', '즐겨라 청춘', '애상의 포구', '흐르는 신세', '원정천리(怨情千里)', '신혼행진곡', '부서진 꿈', '그 여자의 비가', '들꽃타령' 등이 있습니다.

이 가운데서 '들꽃타령'은 가사의 자연친화적인 대목이 우리의 시선을 주목하게 합니다. 가을 산야에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야생초인 들국화를 작가는 자연의 따님이라 표현하고 있네요. 인간의 삶은 허물어졌어도 대자연은 여전히 청정하고 낙백한 인간에게 무한정한 위안을 보내줍니다.

모르는 달빛 아래 이슬을 깔고

가만히 방글방글 웃음을 짓는

나는야 들국화다 아 자연의 따님

 

봄철엔 수집어서 못 피었지요

가을이 깊어갈 제 남 몰래 피는

나는야 들국화다 아 자연의 따님

 

누구를 뵈오려고 이 단장했나

초생달 아미아래 눈물 지우는

나는야 들국화다 아 자연의 따님

-'들꽃타령' 전문

그 외에도 '연모(戀慕)', '말 못할 사정', '사랑의 연가', '춘향가', '두 사람의 청춘', '출항', '십리 고개', '젊은이의 노래', '억만(億萬)이랑', '영산홍', '그리운 포구', '두 사람의 청춘', '요지경 서울', '즐거운 일요일', '실춘곡(失春曲)', '청춘가', '사공의 노래', '어이나 할 것인가', '천리원정', '남강애곡', '좋지 좋아', '월미도', '인간서커스', '항구의 스타일', '상여금만 타면', '연애독본', '박타령', '승지평양(勝地平壤)', '거리의 이미지', '나 홀로 울 때', '백천타령(白川打令)', '설월야(雪月夜)', '걸작앨범', '물새 우는 해협', '수평선의 감정', '낙동강제(洛東江祭)', '비련의 보()', '조선의 봄', '비오는 선창', '청춘행객', '넋 잃은 청춘' 등을 손꼽을 수 있고, 무려 80여곡이나 됩니다

태평레코드사에서 발표한 마지막 곡은 19386월의 '홍등야화(紅燈夜話)'입니다.

이 많은 작품 가운데서 우리는 최남용의 목소리와 특징을 살펴볼 수 있는 '인간서커스'의 비감한 분위기를 느껴보고자 합니다.

(대사)

~ 계집애야 술을 가져오너라!

진이다 위스키다 창자에 구멍이 뚫어지는 독한 술을 가져 오너라!

? 술을 왜 먹느냐고? 술을 먹지 말라고?

건방진 소리를 말아라!

나는 술이 아니고서는 살 수 없는 가엾은 동물이란다!

고향도 연인도 명예도 황금도 죄다 버린 나더러

술을 떠나서 무엇을 먹고 살란 말이냐!

 

벌판에서 벌판으로 흐르는 신세

창망한 구름 밖에 쪽달이 운다

 

술집에서 술집으로 떠도는 신세

때 묻은 베개 맡에 은행꽃 진다

 

앉아 울고 서서 우는 부서진 가슴

언제나 보리 피는 고향 가리오

-'인간서커스' 전문

'인간서커스'는 살아가는 일이 마치 줄타기 곡예를 하듯 1930년대 중후반의 시대가 아슬아슬한 위기의 연속이었음을 그대로 말해줍니다. 시적화자는 현실에 좌절하고 현재 술로써 고통을 잊으려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심신이 망가지는 지름길이며, 점차 패배와 절망의 구렁텅이로 빠져드는 자신을 미처 깨닫지 못합니다.

취입음반...비오는,,,
취입음반...비오는,,,

실질적 터전 태평레코드사

이 내용을 통해 보더라도 30여곡을 발표했던 빅타사보다 무려 여든 곡 넘게 발표했던 태평레코드사가 가수 최남용의 실질적인 터전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1939년에는 오케레코드사에서 '통사정', '항구는 기분파', '무정', '눈 쌓인 십자로' 4곡을 발표합니다. 193912월에 발표한 '눈 쌓인 십자로'가 최남용이 가수로서 발표했던 마지막 곡입니다. 그러니까 최남용이 식민지 가요계에서 활동했던 기간은 도합 7년 남짓한 세월입니다.

태평레코드사에서 단골로 콤비를 이루던 작사가로는 박영호(처녀림), 향노, 강해인, 김광, 원산인, 소화인, 김성집, 박루월, 김상화, 장만영, 이고범, 이서한 등입니다. 작곡가로는 이기영, 이용준, 백파, 초적도, 유일춘, 조채란 등과 일본인 작곡가 편강지행(片岡志行)의 이름도 보입니다. 오케레코드사에서는 물론 김상화, 임원 등의 작사가와 작곡가 박시춘이 함께 했었지요. 두 레코드사에서 앨범을 낼 때 최남용과 함께 다정한 콤비로 활동했던 여성가수로는 강석연, 이애리수, 손금홍, 나신애, 김복희, 이은파, 노벽화, 조채란, 이남순, 미스태평, 박산홍 등이 있습니다. 이 가운데서 강석연과 혼성듀엣으로 취입한 곡이 가장 많습니다.

일제말  영화, 반도의 봄 ...에,,,
일제말 영화, 반도의 봄 ...에,,,

1939년 조선영화주식회사에서 박기채 감독이 이광수의 원작소설 '무정(無情)'을 영화로 제작하게 되었는데 이때 최남용은 형식의 배역을 맡아 주연배우로 출연했을 뿐만 아니라 시인 김안서가 작사한 주제가 '무정'을 직접 불렀습니다. 여주인공 영채 역에는 배우 한은진이 출연했고, 그밖에 조연으로는 김신재, 이금룡, 김일해 등의 이름도 보입니다. 이후 일제 말에는 주로 영화계와 그 주변에서 머물며 친일영화 '반도의 봄'(1941) 주제가를 직접 작곡했습니다. 하지만 대중들에게 지난날 특별한 사랑을 받던 가수로서의 기억은 점차 그 자취가 엷어져가기만 했습니다.

무궁화악극단  조직

1945년 광복이 되자 최남용은 무궁화악극단을 조직해서 공연을 다녔습니다. 말하자면 극장 쇼 무대의 프로모터로서 남다른 기질을 나타내 보인 것입니다. 당시 1세대 가수 채규엽(蔡奎燁)이 자기관리에 실패해서 몹시 고생한다는 소식을 듣고 최남용은 선배가수를 돕는 공연을 열었는데 그 수익으로 채규엽의 삶에 새로운 용기를 북돋워주었습니다. 그러나 채규엽은 남북분단시기에 고향 함경도로 가겠다며 서둘러 북으로 떠났고, 이후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다고 합니다.

취입음반...살찌는 8월,,,
취입음반...살찌는 8월,,,

19467월에는 서울 동양극장에서 무궁화악극단 주최로 특별한 공연 하나가 막을 올렸습니다. 그것은 바로 25세의 꽃다운 나이로 요절했던 여성가수 박향림(朴響林) 추모공연입니다. 공연의 이름은 사랑보다 더한 사랑이었고, 박향림을 너무도 아꼈던 태평레코드사 문예부장 출신의 박영호 선생이 직접 추도사를 읽었습니다. 이 공연의 전체기획과 진행을 가수 최남용 선생이 맡았던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 정도로 최남용은 의리의 사나이였습니다.

19506·25전쟁이 일어나자 최남용은 대구로 피난 내려와 당시 대구 육군본부 휼병감실(恤兵監室) 소속의 군예대(KAS) 조직사업에 앞장섰고, 정훈공작대의 기획실장으로도 일했습니다. 이후 영화제작 일을 계속하게 되었을 때 배우지망생 김경자란 소녀가 최남용의 절대적인 후원 속에 영화에 출연할 수 있었지요. 나중에 김경자가 배우로서 정식 예명을 쓰게 되었을 때 은인이었던 최남용을 아버지처럼 생각하며 그의 성씨를 따서 최지희(崔智姬)로 지었다고 합니다

의리파 최남용의 쓸쓸했던  병실

최남용의 일생을 돌이켜보면 가정형편이 어려워진 상태에서 고보 재학 중 시장에서 쌀장사를 하다가 문득 가수의 길로 접어들어 빅타, 태평 두 레코드사에서 대중적 인기를 얻으며 활발한 활동을 펼쳤습니다. 그러다가 영화계로 활동방향을 바꾸어 새로운 변화를 시도했지만 별반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영화, 반도의 봄의 한장면
영화, 반도의 봄의 한장면

평소 남을 돕는 의리파로서의 명성은 높았어도 정작 자신의 삶은 늘 곤궁하고 쪼들리기만 했습니다. 1967년 최남용은 회갑도 되기 전에 뇌일혈로 쓰러져 병석에 눕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막상 최남용의 병실은 쓸쓸하고 적막했습니다. 그렇게도 주변 어려운 이웃을 돕는 일에 두 팔 걷어 부치고 나서던 최남용을 찾아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예나 제나 세상인심이란 것은 이처럼 달면 삼키고 쓰면 곧 뱉어버리는 비속함이 그 특징이겠지요.

슬하에는 일점혈육도 없는 채로 1970, 쓸쓸한 병상에서 회갑을 맞이한 최남용은 오직 부인 윤난성(尹蘭星) 여사 혼자서만 임종을 지키며 흐느끼는 가운데 한 많은 생을 마감했습니다.

 

이동순

 시인. 문학평론가. 1950년 경북 김천 출생. 경북대 국문과 및 동 대학원 졸업. 동아일보신춘문예 시 당선(1973), 동아일보신춘문예 문학평론 당선(1989). 시집 <개밥풀> <물의 노래> <강제이주열차> 등 18권 발간. 분단 이후 최초로 매몰시인 백석 시인의 작품을 정리하여 <백석시전집>(창작과비평사, 1987)을 발간하고 시인을 민족문학사에 복원시킴. 평론집 <민족시의 정신사> <잃어버린 문학사의 복원과 현장> 등 각종 저서 60권 발간. 신동엽문학상, 김삿갓문학상, 시와시학상, 정지용문학상 등을 받음. 충북대학교,영남대학교 명예교수. 계명문화대학교 특임교수. 한국대중음악힐링센터 대표.

칼럼으로 세상을 바꾼다.
논객닷컴은 다양한 의견과 자유로운 논쟁이 오고가는 열린 광장입니다.
본 칼럼은 필자 개인 의견으로 본지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반론(nongaek34567@daum.net)도 보장합니다.
저작권자 © 논객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