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년세세(年年歲歲), 시간의 의미는 더 깊어지고 세월의 속도는 점점 더 빨라지기만 한다.

어느덧 입춘이 지나고 우수(雨水)의 절기가 가까이 다가온다. 멀지 않아, 나무 끝에 불던 매서운 삭풍도 자취를 감추고, 노란 복수초가 사나운 바람에도 꽁꽁 언 땅을 헤치고 새싹을 내미리라. 시냇물은 부드럽게 속삭이고 예쁜 새들이 나뭇가지 사이로 마실을 다니고... 소록소록 내리는 봄비가 대지를 촉촉이 적시고 산수유와 매화와 목련이, 개나리와 진달래가 저마다 화사한 빛깔로 곱게 피어나 곳곳의 산과 들을 환히 밝힐 것이다.

사진 오피니언타임스 DB
사진 오피니언타임스 DB

봄! 노인의 가슴에도 바람이 분다.

결혼하면 아내에게 언덕 위에 하얀 집을 지어 주고 싶었다. 그때, 그 사람은 가을 하늘처럼 맑고, 아침 이슬처럼 영롱한 모습이었다. 다홍치마에 연두색 저고리를 입었던 그 새색시가, 진흙 들길도 걷고, 가파른 산길도 걸어, 어느새 잔주름이 얼굴을 가리고 석양에 저문 영락없는 노인이 되어 폭풍이 부는 언덕에 애처로이 서 있다. 캠퍼스를 갓 나선 22살의 철없는 소녀가 아는 얼굴 하나 없는 그 낯선 곳에, 그것도 양친(兩親)을 여읜 6남매의 맏이에게 겁도 없이 덜컥 시집을 왔다. 돌아보면, 기쁜 날보다 슬픈 날이 더 많았다. 실낱같은 희망 하나로 용케도 버티고 살아나왔지만, 때로는 그 희망이, 그 사랑이 내리막길 아래로 쏜살같이 달아나기도 하였고 술래잡기를 하듯 속을 태우기도 하였다. 캄캄한 긴 터널 속에 갇히기도 하고, 바다의 성난 파도도 만났다. 두 손 가득히 움켜쥐고 있으려 해도 늘 빈손이 되어 갔다. 시간이 흐를수록 탄식은 점차 체념 어린 침묵으로 바뀌고 누군가가 그의 미래를 모두 훔쳐 가버린 듯했다.

매서운 겨울 날씨에 꺼져 가는 불씨처럼 더 미운 존재는 없다. 그래도 그는 학교에 나가고 마늘을 다듬고 볕이 나면 이불을 널고 손바닥만한 화단에 꽃을 심었다.

자지러진 삶의 기갈에 헉헉대고 숨이 찼다. 흘러가는 구름이 건네준 작은 빗방울도 그에게는 큰 희망이었다.

휙 하며 하늘을 나는 새 한 마리가 그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정직하지 않으면 사랑할 수 없고, 사랑하지 않으면 행복할 수 없다고 한다. 행복은 마치 봄날의 아지랑이처럼 가까이 가면 멀리 달아나고 집요한 욕망에 들떠 잡힐듯하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마는 법이다.

오래전, 영국의 런던 타임스 (The Times of London) 지의 앙케트 조사 결과에 의하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해변에서 모래성을 쌓고 있는 어린이“ 가 그 첫 번째였고, ”아기를 목욕시킨 후에 몸에 분을 발라주고 있는 어머니”는 그 두 번째였다고 한다.

행복이란 결코 거창한 것이 아니다. 행복은 지금, 바로 이 순간 우리 곁에 살며시 찾아와 숨 쉬고 있다. 가까운 곳에 행복을 두고도 먼 곳을 찾아 방황하던 파랑새는 그 꿈꾸던 행복을 맘껏 소유하였을까? 광활한 모래사장에서 모래 한 줌 움켜쥔 그것만으로도, 환호성을 지르고 싶은 바로 그 마음이 행복을 잉태하는 순간이다.

무엇보다 행복의 구원은 사랑일 것이다.

사랑은 신이 인간에게 베푼 축복 중에서 가장 큰 축복이다.

그 사랑을 통하여 인생의 권태를 건너고 사랑의 희열 속에서 어정쩡한 자신을 넘어, 보다 헌신적이고 진취적인 삶을 구가해 나간다. 한갓진 오솔길을 산책하고 사색에 잠기고 누군가를 추억해 내고 그러면서 행복에 넘쳐 사랑을 베풀고 멋진 인생을 살아간다.

안나 카레니나는 그 첫 문장에서 “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한 이유로 행복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 이유로 불행하다”고 하였다.

우리말 사전에는 '행복'을 '생활에서 충분한 만족과 기쁨을 느끼는 흐뭇함, 또는 그러한 상태'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렇다. 행복은 육신의 안락함과 풍요로운 현실을 떠올리기 쉽지만, 행복의 의미는 오히려 잔잔한 호수의 수면과 같이 진폭이나 흔들림을 가라앉힌, 정밀(靜謐)하고 안온한 마음의 평안(平安)이 더 적절한 표현일 것이다. 참된 꽃은 우리 마음에 핀다. 어쩌면 행복은 목적지에 있지 않고 목적지에 이르는 과정에 있는지 모른다. 오늘 우리는 그 여정의 한가운데 서 있다. 보람도, 눈물도, 그리고 기쁨도, 회한도 있었지만, 비록 힘들고, 낙담할 그 어떤 것이라도 그 안에 사랑이 있으면 모든 조건을 초월하는, 가장 감동적이고 행복한 인생이 될 것이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뛰어넘는, 정녕 자유 중의 자유가 아니겠는가?

“인간이 진정으로 살아 있구나“ 라고 생각되는 시간은 오직 사랑으로 함께 한 시간이 아닐까.

곽진학
곽진학

-전 서울신문 전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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