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타임스=김수종 칼럼니스트]에너지 소비를 보면 한국은 그야말로 풍요로운 사회다. 전기와 가스를 24시간 마음대로 쓴다. 전기요금이 독일이나 일본보다 훨씬 헐하다. 주변에 자동차 1대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는 가정이 많다. 30여 년 전 서울올림픽이 열릴 때 보통 한국인들은 절전을 미덕으로 생각했고, 심야에 부엌에서 구공탄 가는 게 일상이었다. '마이카'는 미국의 이야기였다. 그 때와 비교하면 상전벽해다.

만약 이런 에너지 풍요 사회에서 가스 공급 시간을 제한하고, 산업별로 전기를 시간대로 나눠 공급하며, 자동차 1대당 1회 주유량을 10리터로 제한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상상하기 힘든 경제적 충격과 혼란이 올 것이다. 21세기 문명사회에서 설마 이런 일이 벌어지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까.

그러나 놀랍게도 이런 공포에 떨고 있는 선진국 사람들이 있다. 바로 독일인들이다.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가 에너지를 무기로 삼아 우크라이나 지원세력인 NATO 동맹국들에게 타격을 가하고 있다. 작년 6월 러시아의 가스회사 '가즈프롬'이 가스파이프 '노드스트림1'을 통해 독일로 보내는 가스의 양을 60%나 줄여버렸다. 또 고장을 보수한다는 핑계를 들어 가스관을 10일간 잠궈버렸다. 이 조치로 독일과 독일의 가스터미널을 통해 러시아 가스를 받아 쓰는 유럽 국가들이 난리가 났다. 가스 부족 공포감이 일파만파로 번졌다.

사진 MBC 관련뉴스 화면 캡쳐
사진 MBC 관련뉴스 화면 캡쳐

비상이 걸린 독일 정부는 전쟁 때나 쓰는 '가스배급정책'을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다. 가정, 병원, 서비스 시설 순으로 가스공급 우선 순위를 정하는 시나리오를 준비했다고 한다. 러시아가 언제 가스관을 완전히 잠궈버릴지 모르기 때문이다. 유럽 제일의 경제대국 독일은 러시아가 일방적으로 이렇게 나오면 독일 산업이 제대로 굴러갈 수 있을까 하는 우려에 휩싸였다. 러시아 가스 의존도가 큰 유럽국가들은 앞으로 닥칠 에너지 부족사태에 대한 걱정이 태산과 같다.

블라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무력도발로 시작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 전쟁이 꼭 1년이 되었다. 국제 정치학자이자 미국 백악관 국가 안보보좌관과 국무장관으로서 20세기 후반 미소냉전 시대 상황을 두루 섭렵했던 99세의 헨리 키신저 박사가 작년 여름 언론 인터뷰에서 우크라이나 전쟁을 제1차 세계대전과 흡사하다고 설파했다. 어느 한쪽이 승리하면 세계는 새로운 시대질서 속으로 접어든다고 예측했다. 키신저는 누가 승리할지는 언급하지 않았다.

국력으로 볼 때 러시아의 완전 패배는 생각할 수 없다. 그렇다고 우크라이나가 완전히 무너졌을 때 유럽 안보에 불어닥칠 후폭풍을 염두에 두면 미국을 비롯한 NATO 동맹국들이 러시아에게 일방적 승리를 허용할 수도 없다. 이래저래 우크라이나 전쟁은 핵전쟁 위험은 회피하면서도 장기적인 소모 전쟁이 되고 있다.

키신저가 말한 대로 전쟁은 기존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시대 질서를 만든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어느새 에너지 전쟁의 양상으로 변했다. 세계 에너지 질서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얘기다. 이 전쟁의 진앙이 바로 러시아의 석유와 가스다. 전선은 거대 산유국 러시아와 거대 소비시장 유럽연합 사이에 형성되었다. 러시아가 가스파이프를 열었다 닫았다 하며 NATO국가들을 옥죄고 있다.

석유와 천연가스는 국제정치에 매우 민감한 전략 상품이다.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소비생활의 기본 상품이고 국가안보와 직결된 전략물자다. 석유와 가스는 지구에 골고루 매장되어 있지 않고 특수한 지역에 편재되어 있다. 그러나 그 전략적 중요성 때문에 단일시장을 이룬다. 따라서 국제분쟁이 터지면 석유 및 가스 가격은 폭등하고 세계를 에너지 위기로 몰아간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시작된 유럽의 에너지 위기가 지구촌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바로 석유 및 가스의 정치적 민감성 때문이다.

미국은 NATO의 확장을 추진함으로써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자극했고, 전쟁이 발발하자 NATO의 선봉에 서서 우크라이나를 지원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과 NATO동맹국들은 자칫 푸틴을 자극하여 3차대전이 터질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우크라이나를 군사적으로 전폭 지원하는 무리수는 피하고 있다.

그래서 서방국가들이 생각해낸 전략이 '러시아 왕따 만들기', 즉 경제적 고립책이다. 브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전비조달 금고가 바로 석유와 가스다. 러시아 석유와 가스의 수출 길을 막아버리면 전비가 떨어진 푸틴이 우크라이나에서 철수하거나 정전협상 테이블에 앉게 될 것이라는 계산이다. 유럽과 북미의 NATO 동맹국들이 일본 호주 한국 등 민주주의 가치동맹국의 동조를 끌어내어 러시아 석유 금수 제재를 단계적으로 강화해나가기로 합의했다. 서방 전략 분석가들은 러시아가 곤경에 처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러나 일은 서방국가들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에너지 대국 러시아의 지정학적 위력은 서방의 의도를 뛰어 넘었다. 에너지 문제는 세계 모든 나라들의 지정학 및 경제적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얽힌 문제여서 미국과 유럽연합의 의도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중국과 인도가 러시아 왕따 전략에 동조하지 않았다. 각각 인구 14억 명의 두 거대 에너지 소비국들은 중립을 표방하며 서방의 제재조치로 갈 길을 잃은 러시아 석유를 사들였다. 원군을 만난 듯 러시아는 중국과 인도에 국제 시세에서 30% 할인해서 원유를 팔았다. 아이러니하게도 러시아는 중국과 인도에 할인해서 팔았지만 이미 폭등한 국제유가를 기준으로 판매하기 때문에 석유판매 수입은 오히려 늘었다. 재정수입이 늘어나자 푸틴의 전쟁 의지는 더욱 탄력을 받는 모양새다.

미국과 사이가 틀어질 대로 틀어진 중국은 러시아 석유를 놓고 두 가지 전략적 선택을 했다. 첫째 러시아의 석유를 구입함으로써 곤경에 처한 푸틴을 중국편으로 끌어들여 확실한 동조세력을 만들기에 공들이고 있다. 둘째 안보 전략 차원에서도 헐값에 석유를 구입해 비축할 좋은 기회를 잡았다. 중국은 이 전략을 조용히 추진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을 드러내놓고 돕는다는 인상을 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도는 미국 호주 일본이 참여하는 4자안보대화(QUAD)체제의 일원으로 근래 미국과 그 어느 때보다 좋은 관계에 있다. 그럼에도 인도는 중립을 내세우며 미국의 러시아 제재조치를 따르지 않았다. 인도는 두 가지 속셈이 있다. 첫째 인도의 외교 DNA는 러시아에 우호적이어서 우크라이나 전쟁사태로 러시아와 척지고 싶은 마음이 없다. 4자안보대화참여는 중국을 봉쇄하는 전략이라는 점에서 인도의 이해와 맞아 느슨하게 참여한 것이다. 둘째 인도는 러시아 석유에서 얻을 이익이 크다. 인도에는 정유공장이 많다. 러시아 원유를 최대한 사들여 휘발유와 디젤 제품을 만들어 서방세계에 팔며 큰 이익을 얻고 있다. 인도의 값싼 석유제품은 서방 국가에서 유리한 위치에 있고, 이들 제품이 러시아 원유로 만들었는지 아닌지를 구분할 수 있는 길은 없다.

과거 에너지 정치 역학의 중심 무대는 사우디아라비아, 미국, 러시아 3대 산유국이 밀고 당기는 게임 성격이 강했지만, 힘은 사우디를 끌어당기는 힘이 강한 미국쪽으로 기울었다. 미국은 사우디의 석유고객이자 2차대전 이후 왕국의 안보를 책임져주는 동맹의 역할을 해왔다.

이제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야기된 파행적인 시장질서로 중국과 인도 같은 거대 석유소비국들이 무대 중앙에 출연하게 된 것이다. 이 상황을 세계적인 석유 전문가 다니엘 예르긴은 "국제정치에서 새로운 힘의 정렬이 일어나고 있다. 중국과 인도가 그 중심에 있다."고 설명한다.

중국과 인도가 에너지 전쟁의 어부지리를 얻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유럽과 미국은 단기적으로 볼 때 무척 어려운 국면에 처해졌다. 러시아 에너지 의존도가 높은 유럽은 러시아의 에너지무기화에 치명타를 맞고 있다. 미국은 세계 최대 산유국임에도 불구하고 국내 휘발유 가격 안정과 민주주의 가치동맹국들에 대한 안정적인 에너지 공급망 확보에 동분서주해야 하는 상황이다.

유럽 에너지 위기의 뜨거운 이슈가 천연가스다. 냉전 종식후 평화무드에 힘입어 유럽연합(EU)은 러시아와의 경제 관계를 확대해왔다. 그 핵심이 풍부한 러시아의 석유와 가스 공급받는 것이었다. 큰 물꼬를 튼 것이 슈뤠더와 메르켈 두 총리로 이어지는 독일 정부와 푸틴의 가스파이프라인 커넥션이다. 러시아와 독일 해역에 놓인 가스 파이프 '노드스트림1'을 통해 러시아산 천연가스가 독일의 가정과 산업시설로 흘러들었고, 독일터미널을 통해 인근 유럽국가에 천연가스가 흘러갔다. 러시아 석유가 유럽시장을 석권했다.

이 거대한 가스관 프로젝트를 놓고 30년 전부터 미국안보 전문가들은 유럽연합에 경고를 보냈으나 독일을 비롯한 유럽국가들은 별로 우려하지 않았다. 푸틴이 10년전 조지아공화국을 침범하고 이어 크리미아 반도를 병합했음에도 엥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제2의 가스관 '노드스트림2'을 추진, 작년 연말 완공해서 가스공급이 시작될 찰나에 있었다. 바로 이때 푸틴이 우크라이나 전쟁 버튼을 누르면서 30년간 키워온 평화무드는 순식간에 박살나고 말았다.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유럽의 에너지 가격은 폭등했다. 독일의 전기료와 가스 가격은 사상 최대로 뛰었고 에너지 산업은 붕괴 직전에 있다. 러시아 가스 수입을 총괄하는 독일에너지 회사 '우니퍼'는 누적되는 적자를 감당할 수 없어 구제금융절차를 밟았다. 기후위기의 원인이라며 폐쇄했던 석탄발전소를 다시 가동했다.

EU 회원국들은 에너지 수입선을 미국 중동 아프리카로 돌리는 등 안간힘을 쏟고있다. 그럼에도 유럽의 에너지 위기는 곳곳에서 터지고 있다. 프랑스 전력공급의 60%를 담당하는 원자력 68기 중 절반이 노후 고장으로 작년 가동중단 상태였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언제 끝날지 모른다. 석유수출로 재정이 늘어나자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종전을 서두를 마음이 없어진 듯하다. 러시아에 대한 서방의 제재조치로 푸틴의 기를 꺾으려던 NATO동맹의 계산은 크게 효과를 못 보고 있다.

다급한 것이 유럽에 가스를 공급하는 일이다. 러시아를 제외하면 세계 3대 가스생산국은 미국 카타르 호주다. 유럽이 값싼 러시아 천연가스를 직접 가스관을 통해 들여왔기 때문에 카타르 호주 미국은 중국 한국 일본 등 아시아로 액화천연가스(LNG)를 수출했다. 액화가스는 고도의 운반및 저장 기술을 요하기 때문에 투자와 시간이 많이 걸린다. 미국은 자국의 가스 수출선을 유럽으로 돌렸다. 또 유럽국가들은 LNG터미널 건설계획을 서두르고 있다. 따라서 유럽에서 형성된 높은 가스가격은 세계로 확산될 것이다.

민주주의 가치동맹을 통해 중국견제를 꾀하던 미국은 에너지 문제가 발등의 불이 됐다. 인플레이션을 잡고 민주주의 가치동맹을 유지하려면 석유와 가스 공급망을 안정시켜야 한다. 과거 사우디를 중심으로 한 OPEC을 어르고 달래는 전술만으론 어림없는 상황이다. 산유국 러시아가 OPEC의 경계를 뛰어 넘는 돌발변수로 등장했기 때문이다.

에너지 안정의 핵심은 석유 공급이다.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80세 노구를 이끌고 작년 7월 취임후 처음 사우디를 방문하여 실권자 빈 살만 왕세자와 악수를 한 것도 석유증산을 요청하기 위한 것이었다. 사실상 석유가를 좌지우지하는 OPEC의 힘은 최대 산유국 사우디의 생산여력(Capacity)에 있다. 사우디는 하루 약 50만 배럴은 퍼올리지 않고 그대로 놔둔다. 언제든 필요할 때 퍼올린다. 국제분쟁으로 유가가 뛰고 동맹국 미국이 요청하면 이 여유분을 증산함으로써 국제유가를 안정시켰다. 바이든-빈 살만 회담은 과거 정상회담에 비해 냉냉햇다. 석유 증산 합의도 없었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야기된 에너지 위기는 석유가격을 상승시켜서 사우디는 이익을 보고 있다. 그동안 유럽의 2050탄소중립 선언으로 사우디 등 산유국은 기가 꺾여 있는 상태였으나 분위기가 반전된 것이다. 이것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덕이라고 해야될지 모른다.

그러나 또 다른 측면도 있다. 중국과 인도 등이 러시아 석유수입을 늘리는 것은 사우디의 시장점유율을 갉아 먹는 일이어서 반갑지 않다. 사우디는 아시아 시장을 내주고 대신 러시아가 잃은 유럽 시장을 얻고 있으나 불만스럽다. 사우디와 중동 산유국은 아시아를 성장하는 석유시장으로 중하게 여겼는데 눈 앞에서 그걸 러시아에 뺏기는 걸 보고 있다.

에너지 위기는 현재 서방에 의해 제재를 받고 있는 두 산유국 이란과 베네수엘라에 대한 관심을 높이고 있다. 이들 두 나라의 산유가능량을 합치면 거의 러시아 산유량과 맞먹는다. 이란은 미국과의 핵협상이 걸려있어 석유수출의 제재를 받고 있는 상황이고, 베네수엘라는 마두로 정권의 인권탄압 등으로 역시 미국의 석유금수 제재를 받고 있다. 에너지 위기를 타결하기 위해 바이든 정부가 물밑 접촉을 통해 외교적 타결책을 모색하고 있다.

미국을 중심으로 NATO가 벌이는 러시아왕따 전략이 단기적으로는 혼란을 가중하고 에너지 위기를 안정화시키지 못하는 것 같다. 중국과 인도의 제재불참이 부른 변수가 크다는 얘기다.

미국은 러시아 석유금수 제재 카드에 이어 후속 카드를 꺼냈다. 러시아산 석유 거래에 대해 가격상한제를 적용하기로 한 것이다. 선박 보험 금융을 동원한 이 제재는 훨씬 효과가 클 것이라는 게 서방의 계산이다.

미국 중심의 국제질서를 재편하려는 러시아와 중국이 '에너지 동맹'을 통해 미국의 힘을 약화시킬 수 있을까. 사우디는 바이든의 비위를 거스르며 독자적인 영향력을 계속 행사할 수 있을까. 기후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2050탄소중립'의 국제적 대의는 에너지 시장에 어떤 영향을 줄까.

헨리 키신저의 암시대로 우크라이나 전쟁이 끝나면 새로운 질서가 나타날 것이다. 새로 만들어지는 질서가 바람직한지 아닌지는 상관없다. 그건 개별 국가들이 알아서 판단해야 할 냉혹한 현실이 된다. 새로운 에너지 질서가 그렇게 다고오고 있다.

 

김수종
김수종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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