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오숙 탐독]

통나무로 지어진 아담한 건물의 실내에는 향긋한 나무 향이 그득합니다. 건물 한쪽 면에 두 개의 넓은 창문이 있어, 창 바로 아래 탁자에 앉으면 굽이굽이 휘어 자란 소나무들이 시야 가득 들어옵니다. 출입문이 달린 면과 창문이 달린 면을 뺀 나머지 두 면은 서가입니다. 그곳엔 온갖 책들이 빼곡합니다.

책 한 권을 골라 창가 탁자에 앉아 펼쳐 봅니다. 그런데 책보다 창밖의 풍광에 자꾸 눈이 갑니다. 훤칠한 소나무들 사이사이에 금관 모양 꽃을 피어낸 산수유도 보이고, 크고 화려한 순백의 꽃망울을 고고하게 터트린 목련도 보입니다. 또 그 나무들 사이사이에 수줍은 듯 하늘거리는 연분홍 진달래도 몇 그루 보입니다.

올 봄에는 봄꽃들이 서로 경주라도 하는 듯 유달리 빨리 다투어 핍니다. 그렇게 성급한 꽃들에게 심술이라도 부리듯 오늘 날씨는 몹시 찹니다. 말 그대로 꽃샘추위입니다. 불어대는 바람에 꽃들이 오들오들 떨 듯 흔들립니다. 그 꽃들의 하늘거림에 못내 참지 못하고 밖으로 나와 건물 옥상에 아담하게 마련되어 있는 야외 카페로 올라갑니다. 옥상에는 파라솔을 펼친 4인용 철제 식탁과 의자, 그리고 선 베드 세 개가 놓여 있습니다. 그 선 베드에 누우면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오로지 파란 하늘만 볼 수 있습니다. 

사진 국립공원TV 화면 촬영
사진 국립공원TV 화면 촬영

커피 두 잔을 올려놓을 수 있는 앙증맞은 둥근 탁자가 붙어 있는 길쭉한 나무 벤치는 북한산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미세 먼지가 심해 산이 선명하게 보이지는 않지만 그래도 만경대, 백운대, 인수봉 등 북한산 봉우리들이 떡 하니 눈앞에 펼쳐져 있습니다. 북한산이 아주 지척으로 느껴집니다.

하염없이 북한산 능선들을 감상하다가 나무 데크 산책로를 따라 슬슬 내려와 나무 그네에 앉아 봅니다. 한결 가까워진 꽃들을 바라보며 그네를 구릅니다. 건물 주위를 둘러싼 소나무 숲에 지금은 형형색색 봄꽃들이 수놓고 있지만 조금 지나면 연녹색의 신록들이 싱그러움을 뿜어낼 것입니다. 나는 그네 위에서 흔들흔들, 봄꽃들은 꽃샘바람에 흔들흔들. 하릴 없이 흥얼흥얼 노래도 불러 보고 핸드폰도 들여다보다가 이윽고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이곳이 나의 집이냐고요? 아니, 이곳은 우리 아파트에서 5분쯤 앞산을 오르면 만나게 되는 동네 책 쉼터입니다. 아주 아담하고, 책도 별로 많지 않지만 내가 원하기만 하면 언제든지 와서 공부하고 책을 읽을 수 있는 그야말로 숲속 쉼터입니다. 2021년에 개관한 이 공간을 몇 년째 방문하지 못했는데 오늘 봄꽃들의 유혹을 따라 산을 걷다가 드디어 들러 보았습니다.

아! 책 쉼터에 들어서자마자 눈에 들어온 창밖 풍경에 가슴이 막 뛰기 시작했습니다. 서가의 책을 훑어보는데 딱 그 공간과 어울리는 책이 눈에 띄었습니다. <버지니아 울프의 정원>. 버지니아 울프와 레널드 울프 부부가 오랫동안 가꾸었다는 몽크스 하우스의 아름다운 정원을 사진과 함께 소개하는 책이었습니다. 나는 그 책을 뽑아들고 내가 찜한 자리를 다른 사람에게 뺏길세라 얼른 창가 탁자에 앉았습니다. 창틀 바로 아래 놓인 멋진 원목 탁자에 꽤 높은 의자. 그리고 내 눈앞에 바로 펼쳐진 소나무 숲. 딱 내가 꿈꿔온 서재의 모습입니다.

나는 쉼터를 둘러보고 싶은 조급한 마음에 울프 부부의 정원은 사진만 대충 훑어보고 얼른 야외로 나왔습니다. 숲속 옥상 카페며, 북한산 뷰 벤치와 커피 테이블이라니.... 난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구석구석 샅샅이 둘러보며 앞으로 이 공간에서 보낼 시간들을 상상했습니다.

놀랍게도 이곳은 마치 누군가가 내 머리 속에 들어와 내가 꿈꾸는 드림 하우스를 보고 만든 것 같았습니다. 나는 아기자기 예쁘게 가꿔진 정원이 있는 고급스런 집보다는 웅장한 자연을 품은 소박한 공간을 꿈꾸어 왔습니다. 그러니 더욱 이루기 힘든 꿈이었죠. 그런데 환상처럼 그 드림하우스가 내게 왔습니다. 쉼터가 문을 닫는 주말만 빼고 언제든 나는 이곳에 와서 내가 원하는 풍광을 맘껏 즐기며 책도 읽고, 공부도 하고, 커피도 마실 수 있습니다.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말입니다. 심지어 그런 멋진 풍광을 일구기 위해 애써 고생할 필요도 없습니다. 물론 나만의 드림하우스를 위해 노동하는 데서 느끼는 희열도 있겠지만 말입니다.

갑자기 억만장자가 된 기분입니다. 뭐랄까, 내 삶에 기대하지 못했던 엄청난 호사가 시작된 기분이랄까요? 이런 드림하우스의 꿈을 이루고자 많은 사람들이 엄청난 돈과 수고를 쏟고 있지요. 그것도 도시에서는 이루기 힘든 꿈이어서 대부분 가족 친지들과 멀리 떨어져 사는 아쉬움을 감내하면서요. 그런 걸 감안하면 가까이에 이런 공간을 갖게 된 나는 정말 행운아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생각에 뒤이어 ‘소유’, ‘내 것’에 대한 단상이 이어졌습니다. 드넓고 우람한 북한산을 마주하고 앉자 마치 신선이라도 된 양 마음이 마냥 넉넉해졌습니다. 세상의 온갖 욕망과 그 욕망이 빚어낸 소음에서 잠시 해방된 느낌이었습니다. 내 것, 내 재산, 내 소유, 내 재물에 대한 집착과 과시욕을 버린다면 어쩌면 우리는 훨씬 더 많은 것들을 편히 누리고 즐길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를 옥죄며 우리 시간을 점령하는 많은 고뇌에서 자유로울지도 모릅니다.

다행히 내게는 집 앞의 공원을 나의 정원이라 생각하고, 동네 책 쉼터를 나의 서재라 생각하고, 오색으로 물든 가을 산을 오르다 만난 운동 기구를 이 세상 최고의 헬스장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마법이 있습니다. 덕분에 이렇게 봄꽃들이 흐드러진 산 속 쉼터에서 홀로 신선놀음도 할 수 있지요. 챗GPT, 한일 외교 문제 등으로 시끌시끌한 세상을 내려다보면서 말입니다.

#이 칼럼은 오피니언타임스와 자유칼럼 그룹간의 전재 협약에 따라 게시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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