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오피니언타임스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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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타임스=곽진학 칼럼니스트] 하얀 매화꽃이 슬며시 피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샛노란 개나리와 화사한 벚꽃도 만발하여 침울하기만 하던 산 언덕을 정원처럼 아름답게 꾸미고 있다.

봄은 암담하던 겨울의 침묵과 정적(靜寂)을 산산이 깨뜨리고 얼었던 땅을 기적같이 녹인다. 왜 작은 씨앗이 하필이면 그 옥토의 자리에 뿌려져 한 생명이 움트고 나무가 되고 풀이 되어 기어이 꽃과 향기를 가슴에 품는 내밀한 부름을 받게 되는지 정말 불가사의한 일이다. 아마도 생명에 관한 영역은 오직 하늘의 주권에 속하고 인간의 지식으로는 도저히 헤아릴 수 없는, 그저 신비로움, 그 자체이다.

오늘따라 봄비가 부슬부슬 내린다.

초등학교 친구가 수술을 받고 정기 검진을 위해 아침 일찍 서울을 향해 천리(千里) 길을 나선다고 한다. 그는 고등학교 교사로 평생을 봉직하다 은퇴한 모범적인 교육자이자 손수 밭을 갈고 곡식을 가꾸는 부지런한 농부이기도 하다. 초등학교 동기래야 기껏 남자는 이십 명이 전부다. 분교(分校)로 출발한 지 겨우 4년째 되던 해에 입학한 우리는, 모두 조그만 한촌(寒村)의 가까운 동네에서 자란지라, 친구 집 부엌의 숟가락 숫자도 서로 다 셈하는 깨복쟁이 친구들이다. 말 잘하고, 씩씩하고, 기골이 장대하던 그는 어느새 허리가 직각으로 굽혀져 지팡이에 의지하는 병약하고 쇠잔한, 어이없는 노인이 되어 있었다.

달포 전에, 한 분이 우리 곁을 졸지에 떠나고 이제 남자 동기는 여덟 분만 이 세상에 남아 있다. 막 세상을 떠난 그 친구는 머리가 명석하고 꿈도 무척 많았지만, 일찍 어머니를 여읜 탓에 초등학교만 간신히 졸업하고 어린 나이에 기술을 익혀 이발관을 차리고 동생들을 정성껏 보살폈다. 그는 호구지책인 그 생업마저도 아우에게 행복하게 물려주고 인근 도시로 무작정 떠나, 마음에도 없는 분식 가게를 열고 손수 배달도 해가며 생계를 힘들게 꾸려왔던 해맑은 친구이다. 정이 깊어 동기들의 대소사도 꼬박꼬박 챙기고 안부도 부지런히 묻고 다니던 따뜻한 고인(故人)을 생각하면 눈시울이 절로 붉어진다.

사람은 주어진 운명을 바꿀 수 있을까?

우리는 가끔, 신(神)에게 자신의 태어난 이유를 물어볼 때가 있다. 교육자로, 사업가로, 농부로, 군인으로 각각 부름을 받게 되는 그 섭리와 법칙의 근거는 도대체 무엇일까?

진달래와 목련, 달래와 할미꽃, 심지어 이름 없는 풀잎마저도 저마다 다른 이유와 사명이 있어 이 세상에 태어났을 것이다.

인생은 오직 자신만이 선택하고 의도한 결과일까?

요즘, 언론에서는 이른바 '대장동 사건'을 하루도 거르지 않고 경쟁이나 하듯이 보도하고 있다. 이 사건에 거명되는 인물들의 면면을 보면, 지위와 학식과 직업으로 보아 분명 사회의 지도적 인사들이다. 국민의 이목(耳目)이 집중되고 있는 이 사건의 과정과 결과가 명쾌히 밝혀져 공직자들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훼손되지 않았으면 한다. 그들의 삶이 물먹은 담벼락처럼 와락 무너질까 봐 덜컥 겁이 난다.

결코 꼿꼿이 선비로 살아가기가 쉽지 않은 세상이다.

지금 전남 광양의 소학정에는 매화꽃이 한창이다. 퇴계 이황은 “매화는 추워도 그 향기를 팔지 않는다”고 하였다. 아무리 어려운 환경에서도 원칙과 소신, 의지와 신념을 굽히지 않는다는 간절한 가치를 담고 있다.

나무는 꼭대기와 뿌리가 하늘과 땅으로 향하고 있어 하늘의 비밀도, 땅의 세태도 잘 알 것 같은 존재이지만, 언제나 겸손하게 한 자리에 머물며 자신을 조용히 성장시키고 내면의 세계를 일구어 간다.

내일 우리의 삶의 앞길에 과연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청명하던 오늘 하늘이 내일은 난데없이 비가 내리기도 하고, 찬란한 꽃이 피다가도 세찬 바람에 금세 흙에 묻히기도 한다. 명예와 지위, 기쁨과 사랑도 언젠가는 속절없이 아득한 곳으로 사라지고 만다.

지나온 삶의 편린(片鱗)들을 하나하나 모아, 긴 일생으로 나누어 보면 온전히 행복한 사람도, 크게 불행한 사람도 없다. 그렇게 성공한 사람도 없고 처절히 실패한 사람도 없다.

지나고 보면 삶이란 한 개비 마른 장작과 같다.

비록 삶의 끝자락은 신의 몫이지만, 소리 없이 떠나는 그 순간, 돈도, 명예도, 사랑도, 미움도, 그 어느 것 하나도 주머니에 가득 채우고 가져갈 수는 없는 법이다.

어느 철학자는 존재의 증명은 '선(善)의 증명'이라고 하였다.

순리와 모순, 과연 어느 것을 선택할 것인가?

삶이 축제였던가?

  곽진학
  곽진학

-전 서울신문 전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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