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는 늘 ‘식사 시간이 3시간쯤 돼야 한다’고 말하며, 프랑스인의 삶을 동경하는 친구가 있다. 나는 프랑스인들도 요즘은 바쁘다며 우리와 다를 게 없다고 답하지만, 그 친구에게 각인된 이미지는 꽤나 강력한 것이어서 매 끼니마다 비슷한 이야기를 들어왔다. 그러던 어느 한적한 평일 오전, 나와 앞으로도 수많은 끼니를 때워야 할 친구를 위해 이제 막 문을 연 브런치 가게를 방문했다. 정말 점심식사를 3시간 동안 해보기로 작정한 것이다.

오븐에 구운 소시지와 계란 프라이, 버터 바른 빵, 한 무더기의 샐러드가 큰 접시에 담겨 나오는 플래터는 한눈에도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우리는 맵싸한 봉골레 파스타와, 대화하며 먹기 좋기 한입피자까지 주문해서 아주 푸짐한 상을 차렸다. 이렇게 음식을 늘어놓고 먹는 건 프랑스 식에 어긋나지만, 그 정도는 친구도 눈 감아 줄 모양이었다. 덕분에 아주 즐겁고 풍성한 3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흥미로웠던 점은 같은 음식을 두고 식사를 했지만 우리의 '먹는 방법'이 확연히 달랐다는 것이다. 직장생활을 꾸준히 해온 나는 눈앞의 접시부터 효율적으로 공략해 갔다. 하지만 친구는 이 접시 저 접시에 있는 음식들을 조금씩 앞접시로 덜어와서 이리저리 조합을 해서 먹어보는 것이었다. 그러다 마음에 드는 조합을 찾으면 내 접시에도 친히 권해주었다. 과연 이렇게 밥을 먹으려면 3시간은 거뜬히 필요할 듯싶었다.

나와 친구의 가장 큰 차이는 '생각을 하며 먹느냐, 그렇지 않으냐'였다. 음식마다 맛을 생각하며 어울리는 조합을 고민해 보는 친구와, 단순히 '맛있다, 맛없다'로 판가름하는 나 사이에는 거의 인간과 들짐승 정도의 격차가 있었다. 평소에 스스로를 '사람'이라고 굳게 믿었던 터라 내가 받은 충격은 상당히 컸다. 나는 늘 바쁘다는 핑계로 생각하기를 거부해왔지만, 어느새 시간과 여유가 충분하더라도 생각을 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 생각을 많이 하며 살아간다고 믿는다. 하지만 곰곰이 돌아보면, 의외로 많은 판단이나 결정들이 감정 혹은 느낌에 따라 내려진다는 걸 알 수 있다. 물론 느낌(감정)에도 평생 동안 경험한 방대한 양의 정보가 담겨 있다. 게다가 느낌은 속도도 훨씬 빨라서 생각하는 것보다 더 신속한 판단과 결정을 내리는 데 효과적이다.

하지만 문제는 느낌은 '생각'에 비해 그 판단(결정)의 범위가 굉장히 협소하다는 데 있다. 느낌은 빠른 시간 내에 판단을 내려야 하다 보니 단순하고, 오감에 의존하다 보니 늘 해왔던 대로 판단하려는 관성이 강하다. 그렇다 보니 다양한 음식들을 먹더라도 '맛있다', '맛없다' 내지는 '특이하다' 정도의 감상 밖에 나오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비단 식사를 할 때만 나타나지 않는다.

사진 MBC  관련뉴스 화면캡쳐
사진 MBC  관련뉴스 화면캡쳐

우리는 어떠한 사회문제를 바라볼 때도 비슷하게 판단한다. '인어공주의 에리얼이 흑인이래', '퀴어축제 중에 지자체와 경찰이 충돌했대'라는 소식을 들었을 때, 단순히 '왜 디즈니는 PC주의에 갇혀서 이 모양이지?', '왜 성소수자들은 축제 같은 걸 열어서 문제를 일으키지?'라고 생각한다면 말이다.

생물의 본능은 상당히 보수적이어서 기존에 익숙하지 않은 대상을 마주했을 때 반감이 먼저 일어난다. 여기까지는 자연스러운 현상일 수 있다. 하지만 그 반감을 자신의 판단으로 곧장 연결 짓는다면 들짐승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어느 누구처럼 음식을 '맛있다', '맛없다'로만 결정 내리고 마는 것이다. 만약 어떠한 반감이 들더라도 ‘왜 이런 반감이 드는 지’를 한 번 더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똑같은 결론일지라도, 자기 의견을 더 설득력이 있고 분명하게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앞선 사례에서도 '요즘 디즈니는 마음에 안 들어' 하고 넘어간다면, 에리얼 역을 맡은 배우가 '흑인이어서 싫은 건지', '단지 어울리지 않아서 싫은 건지', '정말 디즈니가 싫은 건지' 스스로도 알 수 없게 된다. 퀴어축제에 대해서도 '성소수자들은 왜 항상 말썽이지?' 하고 넘긴다면, 내가 정말 '성소수자를 싫어하는 건지', 단지 '퀴어축제가 싫은 건지', '원활하지 못한 축제운영이 싫은 건지'를 영원히 알 수 없다.

우리는 스스로를 '호모사피엔스 사피엔스'라고 칭하며 슬기롭다는 의미를 두 번이나 덧붙이고 있지만, 정말 슬기로운 지에 대해서는 한 번쯤 자성해봐야 한다. 슬기로울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는 것과 슬기롭다는 것은 분명히 다른 이야기일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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