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객닷컴=우달 칼럼니스트] 온 세상이 '강자' 투성이다. 각종 정치 사안이나 사회 문제, 경제 정책 전반에 걸쳐 ‘강경책’을 부추기는 목소리가 팽배하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오래된 통치법을 부르짖는 이들이 전에 없이 크게 늘었다. 드러난 현상에만 초점을 맞춰 날붙이를 휘두르고 나면 일단은 속이 시원하기 때문일까.

난데없이 치명상을 받은 상대는 더 이상 찍 소리하지 못할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행태가 보편적으로 자리 잡는다면 우리는 더 이상 서로를 이해할 수 없을 것 같다. 날붙이를 든 손을 움직이는 게, 보기 싫은 상대를 이해하려는 것보다 훨씬 손쉬우니까.

얼마 전만 해도 약자에게 비교적 관대했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불과 몇 년 사이에 어떻게 여론이 돌연히 얼굴을 바꾼 것일까. 아마도 소위 약자를 자처하거나 약자를 위한다던 이들이 보여준 진면모에 커다란 실망을 느껴서 일 것이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니 말이다.

하지만 그에 대한 반작용을 얼마간 인정하더라도, '힘'만을 숭상하는 일부 노선이나 여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힘들다. 크고 작은 온갖 문제에 대해 다 같이 '처단'만을 부르짖는 행태가 과연 더 나은 사회를 만들 수 있을지 의문스럽다. 흡사 중세 시대의 마녀 사냥을 보는 듯하다.

공공의 적으로 낙인찍힌 대상을 합법적으로 처단하는 가학적인 행태에 모두들 열광하고 있다. 정작 자신들은 그러한 처단에서 자유로운 듯이 ‘강자’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이는 그다지 바람직해 보이지 않는다.

법과 규정에 근거한 처단은 물론 정당하다. 그 해석에 대한 타당성 논란은 차치해 두더라도, 언제나 법과 규정은 사회 구성원들을 따르게 하는 구속력과 정당성을 지닌다. 그러나 정치, 사회, 경제 등 복합적인 사안에 대해 법과 규정부터 들이민다면 우리는 모두를 위한 더 나은 선택을 하기가 어렵다. 법과 규정에서 언급하는 바는 극히 제한적이고, 그 밖의 조건들은 사회 구성원들의 합의에 위임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최저속도 50km/s, 최고속도 110km/s 구간의 고속도로를 달린다고 가정해 보자. 일반적인 운전자인 우리는 대부분 70~80km/s 이상의 속도를 유지하기 위해 액셀러레이터를 꾸준히 밟을 것이다. 급한 일정이 없고 시간적 여유가 충분하더라도 50km/s로 주행하는 운전자는 찾아보기 힘들다. 우리는 암묵적인 합의를 통해 모두를 위해 적절한 속도가 어느 정도인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법과 규정의 엄격한 준수를 외치는 쪽에서도 50km/s 운전자를 옹호하거나, 110km/s를 초과하는 운전자를 무조건적으로 비난하지는 않을 것이다. 법과 규정이라는 명분을 두른 이들에게서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는 이유다. 이들은 법과 규정 자체를 중시한다기보다, 단순히 이를 무기로 누군가를 처단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사진 연합뉴스 TV 관련화면 캡쳐
사진 연합뉴스 TV 관련화면 캡쳐

강함을 큰소리로 외치고 지지하면 정말 스스로 강자가 될 수 있다고 진심으로 믿는 듯하다. 정작 자신은 군중 속에 몸을 숨긴 채 화형대에 묶인 누군가에게 돌을 던지는 입장임에도 말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강자란 과연 무엇일까. 여기에 관해서는 한 만화 속 작중 인물의 대사로 답을 대신하려 한다. 때로는 가공의 이야기에 현실을 관통하는 지혜가 담겨 있기 마련이니까. 이야기는 실체가 없지만 그래서 더 용감하고 솔직하며 과감하다. 혹시라도 군중심리에 이끌려 자신의 진정한 판단을 내리길 주저하고 있다면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강하다'는 것은 '약함을 아는 것'

약함을 아는 것은 '겁을 내는 것'

겁을 내는 것은 '소중한 것을 가지고 있다'는 것

소중한 것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강하다'는 것

<우라사와 나오키, 만화 '20세기 소년'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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