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바탕 폭염(暴炎)의 잔치가 끝나고 나더니, 어느새 가을이 절정에 이르렀다. 가을이 오면, 고단한 여름을 보냈던 길섶의 풀잎들도 생기가 나고, 나 같은 병약한 노인들도 활기를 찾는다. 이 뒤숭숭한 세상에, 온갖 천연색의 다채로운 풍광이 여기저기에 펼쳐지다니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 일인가.

이렇게 맑고 푸른 가을하늘을 다시는 못 볼 줄 알았는데.

모처럼 밖에 나와 보니 눈 닿는 곳마다 가을 향기가 가득하다. 산과 들에는 코스모스와 국화, 구절초와 쑥부쟁이, 백일홍과 각시취 등, 가을을 찬양하는 꽃들이 한창이라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한해살이가 대부분인 가을꽃은 화려하기도 하고 향기가 진해, 그 옆을 스치는 내 마음도 따라 향긋해진다.

강화 교동 화개정원@사진 논객닷컴 DB
강화 교동 화개정원@사진 논객닷컴 DB

느지막한 아침을 먹고 산길을 따라 오르면, 온 사방이 그렇게 찬연하고 싱그러울 수가 없다. 청아한 산새의 웃음소리, 아침 햇살에 비친 고추잠자리의 금빛 날개, 어설픈 벤치에 기대어 활짝 웃고 있는 노부부의 평화로운 모습, 어디 하나 귀하지 아니하고 아름답지 않은 것 없다.

산은 가을이 오는 발자국 소리를 어찌 그리 빨리도 알아듣는지, 계절이 바뀔 때마다 신기한 생각이 든다. 햇빛에 바랜 보랏빛 가을 산과 단둘이 마주 앉으면 육중한 사색이 똬리를 틀고, 그리움 또한 한 움큼씩 쏟아진다. 세월의 무게만큼이나 쌓인 아련한 추억과 그리움이 강물을 이루고 만다.

무엇보다, 가련한 코스모스가 가을바람에 서럽게 흔들리던 아득한 신작로, 바람과 함께 빈 들판을 외롭게 지키고 서 있던 허수아비, 채 여물지도 않은 벼 이삭을 가마솥에 삶아 낸 향긋한 찐쌀, 쭈글쭈글한 주전자에 찰랑찰랑 넘치던 어머니의 손맛으로 빚은 텁텁한 막걸리, 담장 사이로 굽이치던 그 빨갛던 감, 텃밭에 심었던 들깨와 배추! 가슴을 파고드는 내 고향의 형형한 정취다. 지나고 보니 다 뭉클한 축제였다.

캄캄한 어둠 속에 잿불처럼 삭아지던 생명이 불현듯 다시 일어났다. 바람이 머물다 간 산과 언덕은 통탄과 탄식으로 오열하던 내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았을 것이다. 기억 저편에서 먹구름처럼 몰려오는 쓸쓸한 겨울날의 회상, 후회와도 같은 슬픈 노래를 부르곤 했다.

이제, 세상에서 나 홀로 떨어져 나와, 새들이 모여 사는 둥지를 거두고 먼 창공을 바라본다.

푸르름을 자랑하는 이 산(山)도 순식간에 누렇게 변하고 한해살이들은 다음 해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거둘 준비를 할 것이다.

죽음이 보이면 삶이 얼마나 찬란한지 모른다.

탄생은 그렇게 강렬했지만, 생명은 바람처럼 왔다가 구름처럼 잠시 머물다 사라지고 만다.

빗방울 하나가 모여 산과 들을 헝근히 적시고, 작은 풀씨 하나가 울창한 숲을 이룬다.

어진 부모님의 품 안에서 여섯 남매가 고이 자라, 화목한 가정을 이루고, 장성한 조카들도 무릇 열둘이나 된다. 보잘 것없는 나 또한 곱고 바른 아내를 얻어 딸과 사위, 아들과 며느리, 그리고 손자가 넷이나 되었다.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으랴.

그릇에 넘치게 물을 담으려 했던 나 자신만이 부끄러울 뿐, 아무도 모자람 없이 따뜻하다. 회한으로 남아있는 내가 못다한 일은 자식이 가슴에 담으면 되고, 자식이 바라는 꿈 또한 미완성이 되고 말면, 그다음 세대가 계획하면 되지. 서두르고 무리할 것 하나 없다.

모란이 지고 나면 작약이 피는 법이다.

오랜 방랑을 끝내고, 노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살 땅으로 돌아온 여행자처럼, 팔십을 넘어서고 보니 이제 무엇을 기뻐하고 무엇을 고민해야 할지 세상을 살아갈 순리와 이치를 조금은 터득하게 되었다. 전에는 무심코 건너다보던 나무와 풀잎, 달과 별, 나비와 새들도 참 아름답다는 생각에 이른다.

먼 길을 걷다 문득 뒤돌아보면, 무엇보다 소중한 것은, 바로 사랑이다.

여태껏, 세상을 살아오면서 분에 넘친 은혜를 입고 염치없이 신세를 진 분들이 수없이 많다.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다.

아! 찬란한 세상, 아름다운 가을 하늘,

그저, 한없이 고맙기만 하다.

곽 진 학
곽 진 학

-전 서울신문 전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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