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단풍에 마음도 곱게 물들어 가던 가을이 거센 풍랑 속으로 사라지고 있다. 한사코 붙잡아 내 곁에 오래 두고픈, 짧아서 아쉬운 가을의 끝자락이다.

장욱진 화백의 회고전을 관람한 집안의 가까운 여동생은 “장 화백의 그림이 주로 가족과 송아지, 나무와 까치, 해와 달 등 무척 친근한 소재여서 편안하고 행복한 느낌을 받았다”며 한번 다녀오라고 한다. 가족 공동체를 소중히 여기고 단순히 한 가정의 아버지 이전에 훌륭한 인간으로 발돋움하기를 바랐던 작가의 성품에 그는 매료된 것 같았다. 작년 이맘때 남편을 잃은 그는, 그때의 슬픔을 아직도 올올히 가슴에 안은 채 고인과 함께 편안하고 행복했던 시절을 무척 그리워했다. 파킨슨병을 앓아 힘들어하던 부군(夫君)을 십여 년 넘게 지극정성으로 보살폈음에도, 그래도 부족한 맘이 남아 투병 중에 고통스러워했던 고인의 멍울들을 낱낱이 기억해 낸다. 맘이 착하고 정이 깊은 그가 남편을 그리워하며 애달파하는 모습에 내 맘도 따라 슬퍼진다.

죽음보다 더 절망적인 슬픔이 존재할 수 있을까? 슬픔을 손으로 만질 수 있다면 어떤 느낌이 들까. 또 슬픔의 뒷모습은 과연 어떤 잔영(殘影)을 남길까? 슬픔이란 세월이 지나면 저절로 물이 되어 곧 녹아 없어지고 마는, 마치 처마 밑의 고드름 같은 존재에 불과할까. 메밀밭의 하얀 꽃이 시들어 앙상한 줄기만을 남긴 채, 쓰러져 누운 참담한 흉터일까. 아니면 하얀 국화꽃 한 송이를 손에 들고, 검은 리본을 가슴에 단, 가슴 시린 어린아이의 천진한 모습일까.

사진 속의 얼굴들이 희미한 추억만 남겨둔 채, 세월에 묻혀 하나씩 사라져 간다. 하루에도 몇 번이나 모바일 공간을 드나들던 동료가 갑자기 소식이 뚝 끊겼다. 덜컥 겁이 난다.

아프지 않아도 괜히 콧등이 시큰해지는 그런 계절이다. 이슬비가 안개처럼 내리는 오후, 자작나무 숲사이로 갈색 낙엽이 하염없이 흩날리는 장면은 언제 봐도 가슴이 아프다. 보름달이 산 너머 나뭇가지 사이로 어둠에 묻히고, 생을 마친 살구나무 잎은 흙과 함께 영원히 잠들어 간다. 세월은 쉼 없이 흘러가고 잃어버린 시간은 되찾을 길 없다. 물새도 울음을 터뜨리며 여울목을 날아 어디론가 사라지고 만다.

물이 맑으면 노을이 선명하다.

무엇이 노년을 아름답게 만들까?

비록 석양에 물든 실루엣이지만, 노인의 내면은 평화롭고 고요하다. 인고와 고난을 겪은 아름다움도 깃들어 있다. 다정하고 겸손한 말투, 흐트러짐 없는 삶의 자세와 초월에서 오는 여유도 있다. 또 이웃에 대한 따뜻한 사랑과 용서도 묻어난다. 소를 키우는 일이 공부보다 더 중요했던 젊은 시절도 있었지만, 배움에 목말라 했고 그 갈망이 뜨거웠다.

녹록지 않은 인생, 거친 세월의 순환에 따라 깊은 주름은 어쩔 수 없지만, 심오한 깊이를 품고 풍요로운 삶의 향기도 지니고 있다. 노년의 고독을 자신을 성찰하는 시간으로 삼으며, 간결하고 소박한 생활, 절제와 온유, 감사와 기쁨으로 주위를 밝혀준다.

백조가 죽음 직전에 굳어가는 혀로 가장 아름다운 노래를 부른다고 한다.

<나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가슴 따뜻한 사람이었던가?>

백조처럼 굳어가는 입술로, 꼭 한번 불러 보고 싶은 내 마지막 간절한 노래이다.

밤은 깊어 가고 바람이 세차게 분다. 기쁨도 지나가고 슬픔도 잊어간다.

먼 훗날, 누군가가 장엄한 인생의 바다를 건너다가 암초에 부딪쳐 넘어질 때면 다시금 일어설 디딤돌 하나라도 놓고 싶다.

베토벤의 최후의 교향곡 9번을 들으면서 탄식과 후회, 인생의 거친 숨소리를 잠재워 본다.

<,,,위대한 하늘의 선물을 받은 자여, 진실한 우정을 얻은 자여,,,>

사진 논객닷컴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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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 진 학
곽 진 학

-전 서울신문 전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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