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이별에 대해 이처럼 깊은 소설은 없다"

"그녀의 글은 친절하지 않다! 따뜻하지 않다! 날카롭고 차가우며 예리하고 아프다" 

서석화 작가의 두번째 장편소설 '보석함과 쓰레기 봉투'  책 부제와 그 설명이다. 표지 글이지만 가감없는 내용이다. 

소설을 구상하고 세상에 내 놓는데 꼬박 십삼 년이 걸렸다고 했다.깊이와 폭이 어름된다.

소설이 '친철하지 않고,차가운 글'과의 지난한 싸움이었음을 알려준다.

작가는 시인이다. 등용이 까다롭기로 유명한 시전문 계간지 '현대시사상'에서 일 년에 한 명 뽑는 신인상에 당선돼 등단했다. 고인이 된 시인 정진규와 이승훈이 서석화 작가를 시인으로 태어나게 해주었다.

등단 후 일 년 만에 '세계사'에서 처녀 시집으로 상재했던 '사랑을 위한 아침'과 〈나남〉에서 출간한 두 번째 시집 '종이슬리퍼'에 수록된 시들은 지금도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그의 시엔 예사롭지 않은 호흡과 울림, 첨예한 정서가 담겨있다는 평이다.

그 뒤 첫 산문집 '죄가 아닌 사랑'에 이어, 출간 뒤 그녀를 인터뷰하지 않은 매체가 없을 만큼 화제를 불러 일으켰던 두 번째 산문집 '아름다운 나의 어머니'. 이 책은 모 방송국에서 인기리에 방송된 프로의 제작진들로부터 방송의뢰를 받기도 했다.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뛰는 쟁쟁한 출연진 명단과 함께 방송작가가 재구성해서 쓴 첫 회 방송 대본까지 작가에게 배달됐으나 그녀는 거절했다.“언젠가 소설이 나오고, 그때도 제 글이 여러분들에게 시간이 아깝지 않은 생각의 방을 가지게 한다면...” 그의 대답이었다.

여러 산문집 '당신이 있던 시간', '이별과 이별할 때' '나는 어떻게 불쑥, 떠오르는 사람이 될까'를 출간하면서 작가로서의 지평을 넓혀왔다.

첫 장편소설은 두 권 분량의 '하늘우체국'. 그가 석사 학위를 받은 동국대 장영우 교수로부터 ‘양귀비꽃처럼 아름답고 독하며, 코냑처럼 향기롭고 매혹적인 소설’이라는 덕담을 받을 만큼 시인, 에세이스트에 이어 소설가로서도 무사히 안착하게 해 준 작품이다.

펴낸 곳:개미/판매가 1만 5000원
펴낸 곳:개미/판매가 1만 5000원

그녀의 두 번째 장편소설인 '보석함과 쓰레기 봉투'는?

-한날한시에 응급실에서 환자로 만난 세 여자, 거기에 이 글을 끌고 가는 주인공 화자 은수가 포함돼 있다. 그리고 화자의 언니. 이렇게 네 여자의 이야기가 보석함과 쓰레기봉투에 담겨 있다.

불륜의 사랑 끝에 사십대 초반에 치매에 걸린 언니 은초, 강요당한 이별의 세월 쌓여가지만 신도 부정 못하리라 그 사랑의 절대성을 믿는 유명 번역가이다. 그리고 그녀의 동생 은수, 오래전 학력고사를 치른 날 대학생이던 언니의 잘못된 연애사건으로 한날한시에 부모가 죽고 스무 살 코앞에서 고아가 됐다. 이 소설의 화자로 미대를 나와 개인전을 여러 번 한 화가다. 은초와 은수는 하늘 아래 단 둘뿐인 자매다.

또 다른 두 여자, 은수 옆에 있는 하은과 경옥이다. 가장 위급했던 응급실에서 만나 동질의 아픔으로 단박에 서로를 끌어당겼던 사람들이다. 화자인 은수의 마음을 설명하는데 중요한 두 축을 이룬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은수는 남편으로부터 형체도 그림자도 없는 침묵감옥을 경험한다. 표면적으로는 남편 책이 출간될 출판사 대표 우병찬과 언니 은초의 사랑이 원인이다. 은초는 미혼이지만 우병찬은 기혼자였고, 은초는 번역가로서 톱을 달리는 유명인이었기 때문에 그녀의 불륜은 그 낙인이 짙고도 깊었다. 그런 은초에게 초로기 치매가 찾아왔다. 은수로서는 부모의 죽음 이후 두 번째로 맞닥뜨린 혈육의 죽음과 같다.

그것을 작품 속에서 은수는 말한다. 살았는지 죽었는지 정말 알 수 없는 시간이었다고. 살아있다면 그렇게 안 보일 리 없고 안 들릴 리 없는데 남편에겐 내가 안 보이고 안 들리는 주저앉은 시간 같았다고. 그러나 그 침묵의 시간이야말로 남편에겐 고행의 시간이었음을, 침묵의 이유를 끝내 모르는 지금이 남편이 자신에게 베푼 사랑이요 배려였음을, 그래서 살아갈 수 있음을, 그녀는 깨닫는다. 마지막 장면에서 그녀가 두 팔을 양옆으로 벌려 팔꿈치를 머리를 향해 오므린 트라이앵글 자세로 듣는 청량한 음이 그것을 말해준다.

이 소설엔 흔한 게 1도 없다. 뻔한 사랑 스토리도 아니고 뻔한 감정 나열도 아니며, 뻔한 대사도 여기엔 없다. 자기 안에 침잠해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새로운 말도 익히고 새로운 생각도 깨닫게 하며, 새로운 사랑의 윤곽도 보게 한다. 그걸 서석화 작가는 작품 속에서 은수의 입을 빌어 이렇게 말한다.

-언니.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게 ‘진짜’는 아닌 것 같더라. 추측과 기대지 정답이 있는 공식은 아니더라. 특히 사람 마음이야말로 ‘현상’ 같은 거더라. 그날의 날씨 이상도 이하도 아니더라. 맑았다 흐렸다 바람 불고 비 왔다 뜨는 해 지는 해... 사랑도 그런 거 같더라. 정답을 만들어놓고 거기에 맞추려다 보니 의심과 분노와 상실감, 나아가 배반감 같은 쓸데없는 사지선다형 오답들이 생겨나는 거더라. 답은 현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데 말이야. 사랑이 오는 것도 그 사랑이 거둬지는 것도, 무슨 이유와는 별개라는 생각이 들더라. 그래, 현상! 아침에 맑았다가 대낮에 후드득 떨어지는 소나기처럼 이해하면 그만이더라.-

“차가운 소설을 세상에 내놓는다. 어떤 낯빛으로 이 글의 출현을 맞이할 지는 온전히 독자의 몫이다”(서석화 작가)

읽다 보면 두번쯤 읽어야 겠다는 생각이 드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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