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은 벌써 겨울의 절정에 서 있다.

안산 언덕에 빨갛게 맺혀있는 산수유 열매가 칼칼한 겨울 앞에 빛을 잃고 무거운 침묵을 삼키고 있다.

겨울은 삼라만상이 침묵하는 계절이다. 벌레들이 말문을 닫고 땅속으로 숨어들고 눈꽃이 환히 핀 나무들도 겨울의 위세 앞에 꼼짝 않고 묵묵히 서 있다. 사람들도 깊은 사유(思惟)의 강을 건넌다.

사진 논객닷컴 DB
사진 논객닷컴 DB

추수가 끝난 황량한 빈 들판을 보고 있노라면, 그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어디선가 아득히 들리는 것 같다. 노란 민들레가 남기고 간 작은 풀씨처럼, 가슴으로만 삭여내야 하는, 갓 세상을 떠난 그 친구가 내 마음을 파고든다.

슬픔이 커서 기가 막히면 넋이 빠졌다고들 한다. 이별은 정녕 더 할 수 없는 아픔이고 고통이다. 산소 호흡기에 생명을 실낱같이 매달고 있던 친구가 가랑비가 소복소복 내리는 캄캄한 깊은 밤중에 조용히 눈을 감았다.

삶은 산(山)처럼 무겁지만, 죽음은 새털보다 가벼운 모양이다.

그늘 사이로 쏟아 내린 햇살이 그리워 노인의 눈에는 눈물이 고인다. 꽃도, 낙엽도 가고 없는 하늘 아래, 한 아름 우정의 샘물을 가져다가 그 영전(靈前)에 바친다.

사람 밖에 살던 사람도 숨을 거둘 때면 사람 속으로 들어온다. 운명(殞命)을 바로 눈앞에 두고, 가쁜 숨을 내몰아 쉬는 그 혼절한 순간에, 그는 아내의 손을 잡아 감사와 미안한 마음을 표현하였다고 한다. 생각만 해도, 가슴 뭉클하고 아름다운 장면이다. 지나온 삶의 여정 가운데는 가파른 언덕을 힘들게 달렸던 시간도, 또 때로는 꽃피고, 눈부신, 가슴 벅찬 날들도 있었으리라. 한평생 긴긴 세월을 함께 한 부부가 내내 깨가 쏟아지듯 하게만 살았겠는가. 전쟁과 평화, 냉전과 휴전의 날은 어찌 없었겠는가. 가슴 치밀던 상처와 멍울에도, 세상을 하직하며 내미는 남편의 마지막 손길에, 아내는 모든 미움과 아픔, 한숨과 푸념을 올올이 다 떠나보냈을 것이다.

남겨 두고 가는 것 하나 없이 먼 길을 떠나는 걸음걸음이 얼마나 무겁고 힘들었을까. 뒤를 돌아보고 또 돌아보는 마음이 오죽 괴롭고 아팠을까? 그래도 자식들의 따뜻한 맘과 고마운 정에 평화롭고 안락한 모습으로 숨을 거두었다. 지켜보는 모든 이들의 가슴에 원통과 설움이 뒤엉켜 그만 통곡하고 만다.

모두 떠나버린 휑한 나뭇가지에 홀로 남은 가랑잎 하나가 찬 바람에 비틀거리고 있다. 허구한 날 휘청대며 사는 우리 꼴을 보는 것 같아 한참이나 먹먹했다. 빛바랜 낡은 교복에 우수(憂愁)가 엿보였던 고등학교 시절의 그는, 내가 자취하던 그 초가집에도, 전깃불도 없던 깜깜한 내 고향 집에도 자주 찾아오곤 했다. 슬펐던 추억도, 아팠던 만남도 있었다.

“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서정주의 국화꽃 옆에서>,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네라...“< 조지훈의 승무>, 기분 좋은 날이면 자주 읊었던 그가 좋아하는 시(詩)다.

어린 시절에도 글 쓰는 재주가 있어 동요를 짓고 어린이 잡지에 실리기도 하였지만, 고달픈 삶을 걸어온 탓에 끝내 다른 길로 나서고 말았다. 사회생활에서도 늘 질서정연하고 바둑판 같은 규범을 한 치도 벗어난 일이 없었다. 회사의 신년사를 내내 도맡아 쓰기도 하였지만, 무질서한 이 세상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여 변변히 이름 한 번 크게 불리지 못한 친구였다. 퇴직한 후 언제부터인가, 세상을 맑은 마음으로 보기를 거부하고 술과 담배를 즐겼다. 끝내 모진 질병을 얻었지만, 병마를 이겨 낼 엄두조차도 않고 마치 삶을 포기한 사람처럼 좌절하고 이리저리 서성이었다. 한사코 달래고 말리는 호소에도 요지부동이었다.

시간도, 공간도 초월한 저 높이 서 있는 집, 소리도, 바람도 없는 적막한 세계, 이를 듯 말 듯 하면서도 이르지 못하는 피안의 영역, 그곳이 바로 저세상의 풍경일까.

오늘따라 날씨가 유난히 춥다.

벽천(碧泉)!

화창한 봄날이 오면, 낙조가 주변을 발갛게 물들이는 해 질 무렵 소주 한잔 진하게 나누자 구나.

잘 있게, 또 보세.

곽 진 학
곽 진 학

-전 서울신문 전무

칼럼으로 세상을 바꾼다.
논객닷컴은 다양한 의견과 자유로운 논쟁이 오고가는 열린 광장입니다.
본 칼럼은 필자 개인 의견으로 본지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반론(nongaek34567@daum.net)도 보장합니다.
저작권자 © 논객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