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2K와 더불어 레트로 감성이 바짝 유행이었다. 옷이란 자고로 심플 이즈 베스트라고 생각하면서도 그 유행에 휩쓸리지 않기란 어려웠다. 결국 나도 모르는 사이 옷 몇 벌을 요즘 스타일에 맞춰 사입으니 부모님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어? 그거 우리 때 유행하던 건데"

확실히 예전 스타일이 인기라는 걸 실감할 수 있는 멘트였다. 그런데 과연 옷만 그럴까? 체감하기에는 거의 매일 새로운 곡이 쏟아져 나오는 음악 산업도 별반 다르지 않다. 최근 몇 년간 샘플링 곡이 사랑받아 온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샘플링이란 표절과 엄연히 다른 개념으로, 기존 음원의 일부를 추출하여 사용하는 기법을 의미한다.) 특히 k-pop 업계에는 샘플링 바람이 불었는데, 그 결과가 꽤 성공적이었다.

블랙핑크 '셧 다운' 뮤비 @YG엔터테인먼트 제공/연합뉴스
블랙핑크 '셧 다운' 뮤비 @YG엔터테인먼트 제공/연합뉴스

■ K-POP계에 한 획을 그은 블랙핑크와 레드벨벳

대표 사례로 YG와 SM의 대표 걸그룹 블랙핑크과 레드벨벳이 유명 클래식 곡을 샘플링하여 크게 화제 된 것을 꼽을 수 있다. 블랙핑크의 'Shut Down'에 쓰인 파가니니의 '라 캄파넬라'는 연주하기 어려운 빠른 템포가 특징인데 블랙핑크의 이미지와 곡의 주제에 잘 어울려 팬들에게 큰 사랑을 받았다. 레드벨벳의 'Feel my rhythm'의 경우 바흐의 대표곡 G 선상의 아리아로 샘플링해 우아한 느낌을 더했다. 현악기 소리와 SM 특유의 화음층이 발레리나 콘셉트와 찰떡 같이 어울려 벨벳의 부드러움을 극대화하는 느낌을 줬다. 블랙핑크와 레드벨벳은 이미 많은 팬을 보유한 그룹이지만 익숙한 음의 도입부, 잘 어우러진 곡의 표현과 스타일링으로 K-pop계에 한 획을 긋는 데 성공했다.

■ SM, 샘플링의 대가?

사실 클래식 샘플링의 시초에는 SM의 신화가 있었다. 신화 노래 중 명곡으로 불리는 'T.O.P.'는 차이콥스키의 '백조의 호수' 중 유명 멜로디 라인을 도입부와 후렴 전반, 브릿지에 통째로 써서 대중들에게 어필하는데 대성공을 이뤄냈다. 이미 '백조의 호수'에 익숙한 상태인 세대라면 결코 듣고 그냥 지나칠 수 없게 만든 것이다. 이런 과감한 시도는 아이돌 곡 클래식 샘플링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신화와 레드벨벳에 이어 지난해 후배 그룹인 NCT까지 'Golden Age'를 베토벤의 비창 2악장으로 샘플링해 샘플링의 대가로서 입지를 굳혔다. 자신들의 황금기, 성장 등을 담은 뮤직비디오까지 곡과 잘 어울려 팬들의 마음을 자극하는 데 충분했다.

■ 샘플링곡의 진화, 2000년대 감성이 물씬

앞서 언급한 곡들에 의해 클래식 곡 샘플링은 익숙한 편이다. 대중들 역시 그럴 터인데, 최근 2000년대 곡을 샘플링해 향수를 자극하는 케이스가 늘고 있어 관심이 쏠리고 있다. 가장 화제가 된 건 드라마 <쾌걸 춘향>의 OST였던 izi의 '응급실'을 샘플링한 라이즈의 'Love 119'이다. 데뷔하자마자 크게 주목받고 있는 SM의 괴물 신인 라이즈는 긴 시간 노래방 인기 차트 자리를 지켜온 '응급실'로 샘플링해 최근 음원 강자로 떠올랐다. 쏟아지는 신인 아이돌들 사이에서 다시 한번 인지도, 입지를 굳힌 셈이다. 기존 곡의 응급실이라는 소재를 주체할 수 없는 첫사랑의 감정에 빗대어 표현해 사람들의 공감을 끌어냈다.

한편 음악 프로듀서 그루비룸도 브라운아이드걸스의 'Love'의 첫 전주 구간을 샘플링해 'Yes or No'라는 신곡을 내놓았다. 르세라핌의 멤버 허윤진이 피처링에 참여해 눈길을 끌었는데, 트렌디한 프로듀싱으로 기존의 곡을 재해석해 리스너들에게 호평을 불러일으켰다. 클래식 샘플링과 달리 국내에서 한국 곡을 샘플링한 사례가 흔치 않아 대중에게 더 눈도장을 찍고 있다.

최근 2000년대 한국 노래를 샘플링한 사례는 상당히 신선하게 다가왔다. 워낙 대중에게 각인되기 어려운 요즘이니 영리한 해법을 찾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특히 10대, 20대가 아닌 경우 k-pop 산업, 아이돌 노래에 진입장벽이 있는 분위기가 만연한데 이 벽을 허무는 역할이 되어주고 있는 듯하다. 대중음악의 주 소비층의 연령대가 낮아지고 있다고 느끼고 있기에 기성세대의 귀에 익은 노래를 활용해 한 번 더 들어보게 만드는 효과를 가져올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이미 앞의 두 사례에 영향을 받은 후발주자들은 어떤 한국 노래를 골라 최신 감성으로 샘플링할지 고민하고 있을지 모른다. MZ와 꼰대로 세대 갈등이 깊어지는 요즘, 함께 즐길 수 있는 노래 한 곡으로 잠시나마 대통합을 이룰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히 괜찮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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