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겨울이 자취를 감추었다. 자연의 약속은 한 치의 어긋남이 없다. 봄비가 그치자 창경궁에는 영춘화(迎春花)가 곱게 피었고, 안산(鞍山)의 연못가에도 노란 수선화가 방죽 주위를 환히 밝히고 있다.

어릴 적,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와 내 책보를 마루에 던지는 소리가 들리면, 방에 홀로 누워만 계시던 할머니는 곧잘 요강을 비워 달라고 하셨다. 요강을 가져다가 비우고, 우물물에 씻는 둥 마는 둥 하다 제자리에 갖다 놓으면, “내 손자야, 내 손자야”라며 고마워하셨다. 지금 내가 그때의 할머니보다 훨씬 더 오래 살았다. 태어나서 대소변 가리는 일부터 먼저 배우며 삶을 시작하다가 늙어서도 대소변 가리는 법을 다시 익혀야 하는 신세가 나도 되어간다.

노경(老境)의 너울과 파도 속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감사와 기쁨으로 살아야 할 텐데, 나는 아직도 나이와 화해(和解)하지 못하고 사소한 불편에도 짜증을 낸다.

시간만큼, 나이만큼 공평한 것도 없다.

나이 쉰다섯에 과수가 된 하동 댁이

남편을 산에 묻고 땅을 치며 돌아오니

여든둘 된 시어머니가 문에 섰다 하시는 말

“밥 도” (밥 주어)

“웃지 말라니까, 글쎄 “-이종문 시조 작가

치매에 걸린 할머니의 이야기다. 치매 증상은 다양하다. 무엇보다 기억력의 상실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우리나라 65세 이상의 알츠하이머 치매 환자 수가 67만 명 (`21년도 기준)을 넘어섰다. 치매로 인한 사회적 비용 또한 2060년에는 43조 2천억원에 이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노인성 질환은 치매뿐만 아니다. 우울증, 심부전, 관절염, 난청, 당뇨, 고혈압, 통풍, 골다공증 등 다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노령 사회가 가져다주는 손실을 누가, 어떻게 보전(補塡)할지를 생각하면 노인의 마음은 납덩이처럼 무겁기만 하다. 낭비가 굳이 노인들로 인한 사회적 비용뿐이겠는가. 정치적 무질서와 미숙으로 인한 낭비와 손실을 금전으로 환산하면 과연 얼마나 될까.

사진 동이
사진 동이

이렇게 아름다운 봄날에도 정치만 생각하면 답답해진다.

오는 4월 10일이 또 총선의 날이다. 누구를 어떤 기준으로 선택하고 뽑을 것인지 고민이 깊어진다. 정치의 세계는 늘 국민의 삶보다 권력을 움켜잡는 것에 집착한다. 정쟁이 요란하고 비방과 거짓이 난무한다.

분재 농원에 굵은 철사로 챙챙 감긴 어린 소나무를 보면 가슴이 아프다. 오늘 정치 현실이 생각난다. 정치가 국민의 발목을 감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세상을 파란 평화로 덮으며 장관(壯觀)을 이룰 날이 언제나 돌아올는지.

이제는 졸졸 흐르는 시냇물이 고맙고 하늘을 나는 새를 보기만 해도 흐뭇하다. 비가 오고 눈이 내리는 날도 반갑다. 꽃잎이 열리는 소리와 풀잎이 쓰러지는 소리, 바람이 부는 이치와 햇볕이 쏟아지는 뜻도 알아차릴 수 있다.

속이 빈 자루는 제대로 설 수가 없다.

글 쓰는 일이 원래 내가 할 일이었다. 아버지는 내가 선비의 마음 지니기를 바랐을 것이다. 나는 내 속에 그것이 깊이 감추어진 줄 진작 알았지만, 부질없는 욕심에 홀려 여태껏 헛걸음을 멀리도 걸어 다녔다.

들쑥날쑥한 돌멩이가 있어 시냇물이 아름다운 소리를 낼 수 있듯, 인생도 굴곡과 파란(波瀾)이 피고 지고, 고통을 안고 달래면, 예술을 낳고 명품을 만든다고 한다.

찬란한 봄도 언젠가는 여름이 되고 겨울을 맞는다. 겨울 또한 침묵하면서 봄을 기다린다. 이 세상에서 영원한 건 변화와 무상(無常)뿐이다,

바람이 그치자 까치 한 쌍이 망가진 집을 고치느라 지나치는 나를 쳐다볼 겨를이 없다. 매서운 설한을 이겨낸 복숭아나무도 붉은 꽃망울을 터뜨리며 봄의 시작을 알리고 있다.

새봄을 맞이한 농부는 호미와 낫을 찾아 들고, 풍년의 꿈을 안고 거침없이 삶의 한가운데로 나아 갈 것이다.

이웃집 베란다에는 하얀빛에 연두색 금낭화가 따뜻한 봄볕을 즐기고 있다.

인생의 마지막이 평화롭기를 바라는 마음은 누구나 다 같을 것이다.

곽 진 학
곽 진 학

-전 서울신문 전무

칼럼으로 세상을 바꾼다.
논객닷컴은 다양한 의견과 자유로운 논쟁이 오고가는 열린 광장입니다.
본 칼럼은 필자 개인 의견으로 본지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반론(nongaek34567@daum.net)도 보장합니다.
저작권자 © 논객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