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인의 야구와 인생’

‘완장차면 사람 달라진다’는 말이 어김이 없다. 멀리 갈 것도 없이 허구연 KBO(한국야구위원회) 총재(74)가 모델 케이스다. 그는 30여년간의 야구 해설위원직을 관두고 2022년 3월 취임했다. 정지택 총재가 갑자기 사퇴한 덕분에 벼락 감투를 써 잔여 임기를 마친뒤 2024년 1월 연임에 성공, 임기 만료를 1년 1개월 앞두고 있다. 사실, 해설위원이 ‘야구 대통령’인 KBO 총재 신분으로 수직상승하는 건 매우 이례적이다. 최고 인기 스포츠의 수장으로, 해설만 하던 사람이 낙점된 것은 어떤 사연이 있었을까. 10개 구단 사장(KBO 이사)들은 정치권에서 ‘낙하산 인사’가 날아올까봐 급히 허 위원을 총재로 추대했다.

해설위원 시절, 자신들을 “사장님, 사장님~”이라고 부르며 깎듯이 존대하던 이를 총재로 모신 것은 총재를 사장급으로 낮추려는 의도도 없지 않았다. 총재의 주된 역할은 구단간의 이해관계를 조절하는건데 만만한 해설위원을 데려와 특정구단 편을 들지않게 ‘머슴’으로 만들려는 의도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이건 오산이었다.

지난 9월 17일 서울 송파구 롯데호텔 월드에서 열린 2026 KBO 신인 드래프트에서 허구연 KBO 총재가 인사말을 하고 있다.@자료사진 연합뉴스
지난 9월 17일 서울 송파구 롯데호텔 월드에서 열린 2026 KBO 신인 드래프트에서 허구연 KBO 총재가 인사말을 하고 있다.@자료사진 연합뉴스

허 총재는 취임 4년여만에 매우 권위적으로 변했다. 심하게 표현하면 안하무인격으로 탈바꿈했다. 얼마전 국회 국정감사에서의 문체부 상임위원 지적에 야구인들은 모두 깜짝 놀랐다. 업무추진비와 법인카드를 너무 헤프게 쓴 게 문제가 됐다. 11개월 동안 스타벅스 선불카드 구입에 2310만원, 특정 제과점에서 쿠키 세트 사는데 548만원을 결제했다는데, 문제는 사용처가 불분명하다는 점(야구 원로 선물용이라지만 일부 야구 원로에게만 전달).

잦은 해외출장과 재벌 회장급 수준의 출장비 지출도 도마에 올랐다. 허 총재는 2022년 3월 취임 이후 지금까지 21번의 해외 출장을 다녀왔는데, 이는 재임기간 10번도 되지 않던 전임 총재들과 비교해 크게 차이가 난다. 전임 총재들은 일을 안 했고, 허 총재는 열심히 일하다 보니 출장 횟수에 차이가 난다는 설명은 왠지 궁색해 보인다. 사무총장이나 본부장급이 갈 출장을 본인이간 것도 있지 않았을까. 더구나 해외 출장 때마다 1박 숙박비가 140만원에 달하는 최고급호텔 스위트룸에 묵고, 기사딸린 캐딜락 승용차 이용료 등으로 매번 2000여만원을 썼다고 하니 입이 떡 벌어질 지경이다.

KBO는 해마다 220억원의 국비를 지원받는 비영리 스포츠단체다. 이번 국감을 통해 알게 된 놀라운 사실은 KBO 총재의 출장비엔 상한이 없다는 것. 아예 규정 자체가 없다. 이를 견제할 감사실같은 감시 기구조차 없다(각 구단 회계담당자들이 1년 한번 감사를 하며 영수증 등을 체크하나 형식에 그침). 마음만 먹으면 '총재가 말아먹어도 할 말이 없는' 시스템이다. 논란직후 KBO 대응도 아쉽다. 국감자료 제출 거부에 대한 비난이 쏟아지는 가운데 허 총재는 국감에 출석조차 하지 않았고, 관계자 입을 통해 나온 “국비에서 쓴 건 없다"는 해명이 오히려 화를 자초하는 꼴이 됐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뉴스1의 스포츠 데스크인 허남영 부국장의 개인 칼럼을 통해 알려졌다. 경남 진주시 지수면에 있는 승산마을은 ‘승산 부자마을’로 더 잘 알려져 있는 곳. 마을 이름이 이렇게 불리게 된 배경에는 대한민국 경제의 초석을 닦은 대표적인 1세대 기업가들이 이곳 출신이어서다. 삼성 창업주 이병철 회장, 금성(현 LG와 GS그룹 전신) 구인회 회장, 효성 조홍제 회장이 승산마을에서 태어났거나 성장기를 보내면서 창업의 꿈을 키웠다.

허 국장은 최근 승산마을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고 한다. 폐교된 지수초등학교는 ‘K-기업가정신센터’로 바뀌어 1세대 창업주들의 정신을 이어받아 미래 한국경제를 이끌 기업인을 양성하기 위한 교육센터로 활용되고 있었다. 구인회 회장, 허준구 GS그룹 명예회장 등의 생가 (生家)를 둘러보다 ‘허구연 생가’에서 발길을 멈췄다고. 한국경제를 일군 1세대 기업인도 아니고, 스포츠 기구 수장이, 그것도 사후가 아닌 생전에 생가를 복원시켰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외면적으로 점잖음을 과시했던 허 총재가 왜 이런 권력욕으로 공금을 마구 낭비하고, 심지어 생전에 생가까지 복원했을까. ‘야구 대통령’이 ‘진짜 대통령’인 줄로 착각하고 있는 걸까. 여기에서 그의 전 생애를 두루 말하긴 어렵지만 몇가지 굵직한 포인트로 ‘진면모’를 살펴보자.

그는 1969년 경남고 3년때 괜찮은 2루수로 이름을 알렸다. 슈퍼스타는 아니었지만, 경남고 20년 선배인 실업야구 상업은행팀 장태영감독(1929~1999)은 그의 장래성을 보고 특별 스카웃을 했다. 허구연은 아버지와 여동생의 취업을 부탁했고 장 감독은 실력이 별로 없던 동기생 H도 입단시키는 선처까지 베풀었다. 그런데 허구연은 상업은행에서 1년을 뛰고 급거 진로를 바꿔 고려대로 진학했다. 결과적으로는, 상업은행 감독에 그쳤을 신분이 KBO 총재에까지 올랐으니 그의 결단이 잘된 것이다. 하지만 상업은행팀으로서는 배신자의 낙인을 찍지 않을 수 없었다. 아버지와 여동생의 취업을 시켜줬으면, 도의적으로 팀을 위해 몇 년간 헌신한뒤 은행측의 양해를 얻어 이직을 했어야 했다. 하지만 별도 계약서가 없다는 허점을 틈타 은행을 1년만에 도망치듯 떠난 것은 신의를 헌신짝처럼 버린 부도덕한 처사로 실업야구인들의 맹비난을 받았다.

그는 1971년 고려대 체육학과에 특기자로 입학했으나 공부하지 않는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않아 대입 예비고사를 치르고 1972년 법학과에 재입학했다. 졸업후 대학원장이 좀 도와주긴 했지만 고대 대학원에서 법학석사를 취득하고 경기대에서 2년간 강의도 했다. 순천향대학에서 언론학 명예박사도 받았다. 이를 바탕으로 그는 야구인 출신 최고의 엘리트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고대 야구부 사상 최초의 ‘1학년 4번타자’, 대학리그 홈런왕 등극 등 화려한 선수생활을 보냈으나 국가대표에 뽑히지 않은 ‘한(恨)’을 평생 가지고 있다. 1978년 대전에서 열린 한일 실업야구 올스타전에서 큰 부상을 당해 전격 은퇴했기 때문이다. 또 1986년 청보 핀토스 감독으로 15승2무 40패(0.273)의 초라한 성적으로 중도하차했다. 1987~89년 롯데 수석코치를 지냈으나 팀이 최하위에 머물러 감독이 되지 못한 아픔도 있다. 선수로, 지도자로 모두 꿈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사회에 진출한후 50년간 조직에 몸담은 경험이 거의 없다. 1980년대초 금성계전 총무과장으로 잠시 근무했지만, 이는 럭키금성 패밀리인 중학교 동기생이 해설위원 활동에 편의를 봐주기 위해 명함만 파줘 실제 업무는 하지 않았다. 야구관련 ARS 사업이나 야구 연구소를 운영할 때도 직원 한,두명이 있어 1인 기업이나 마찬가지였다. 거대한 조직의 KBO 임직원과 10개 구단들을 거느리는데 힘이 부칠 수밖에 없었다. 이런 탓에 초창기엔 직원들로부터 ‘허대리’란 별칭이 생기기도 했고, 아무런 감시와 제재를 받지않는 1인 기업의 습성을 버리지 못해 공금을 함부로 쓰기에 이른 것이 아닌가 한다.

허 총재가 권력에 취해 버린 건 권위적인 ‘총재’란 직함이 한몫 하지 않았을까. 1982년 프로야구 출범때 한국야구위원회는 일본 프로야구의 규약과 규정을 그대로 본땄다. 총재 명칭도 그대로 가져왔다. 만약 수장의 직함을 한국식으로 ‘위원장’ 혹은 ‘이사장’, 혹은 ‘회장’으로 정했다면 이처럼 권위를 마구 부리지 않았을 것이다. 거대 정당이나 대한적십자회가 10~20년전 총재라는 권위적 직함을 버리고, 대표(최고위원) 혹은 회장으로 바꿔 국민들의 거부감을 줄였다. KBO도 탈권위시대에 발을 맞춰야 하지 않을까. 정운찬 전 총재는 총재라는 호칭이 싫어 메이저리그처럼 ‘커미셔너(commissioner)’라고 불러주길 좋아했다. 실제로 그는 집무실 문에 ‘커미셔너’란 명패를 붙이기도 했으나 총재라는 명칭 자체를 없애진 못했다.

*이를 종합해보면 성장기를 제대로 보내지 못했고, 한과 응어리가 맺혔으나 엘리트 의식으로도 가득찬 사람이, 벅찬 프로야구계 최고 수장 자리에 올라 결국 명예스럽지 못한 마지막을 맞이할 가능성이 없지 않다.

왜냐하면, 상급기관인 문화체육관광부가 지난주 KBO에 대한 사무감사에 들어가 연말쯤 좋지 않은 결과가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문체부 고위 간부는 최근 “허 총재의 비리에 대해 심각하게 들여다보고 있다”고 말해 결과에 따라 사퇴 종용도 잇따를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또 허 총재의 조기 퇴진을 기정사실화한 일각에서 ‘민주당 출신 정치인’을 총재로 내세우고 호남출신 야구인 3명 중 한명을 사무총장으로 임명한다는 그럴싸한 시나리오가 벌써부터 나돌고 있다. 호남출신 야구인들은 “해설만 하던 허구연도 총재하는데, 사무총장 정도는 우리가 얼마든지 할수 있다”는 반응을 보인다고 한다.

허 총재가 임기를 마저 마치든, 새로운 사람이 오든 연 관중 1200만명의 대흥행시대를 맞은 프로야구계로서는 전혀 반갑지 않은 소식임에는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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