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은 스스로를 먹여 살리는 것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라고 수차례 되새김질을 해도 회사만 가면 늘 감정 상하는 일이 벌어진다. 직장인이 감히 직장에서 사사로운 감정 운운하는 것부터가 잘못된 것일까. 안 그래도 타인은 지옥인데, 이해관계가 얽힌 곳에서의 타인은 지옥 중에서도 그 레벨이 높다. 착한 사람 싫어할 사람이 어디 있겠냐 마는 회사에서만큼은 일을 제대로 하는 사람이 그나마 지옥에서 멀어진다. 사실 난 일이 완벽하면 그 사람의 인성이 어쩌고 저쩌고 하는 데까지 관심이 뻗치지 않는 편이다. 그런데 요즘 자주 드는 의문이 있다.
2박 3일의 혼자 여행, 아무래도 식도락이 없는 여행이 될 것 같아 조식이 포함된 룸을 예약했다. 한 밤 자는 것으로 여행의 반이 지나버린 둘째 날, 아침을 먹으러 호텔 1층으로 내려갔다.가짓수는 많지 않지만 있을 건 다 있는 소담스러운 조식 뷔페였다. 내가 좋아하는 딘타이펑과 홍루이젠의 나라. 이 사실만으로 대만음식에 대한 마음의 문은 활짝 열려있었다. 재빠르게 음식들을 스캔하고 제일 먼저 접시에 담은 것도 샌드위치와 샤오롱빠오였다. 내 입을 사로잡았던 오리지널에 비할 순 없지만 둘 다 맛있었다. 대만에서 요리하는 사람이라면 기
어떤 계기가 있었던 것도 아닌데 최근에 옛날 노래만 골라 듣는 일이 많아졌다. 아주 멀리 가면 10대 때 들었던 노래까지 찾아내기도 하는데 플레이리스트에 저장된 곡들 대부분은 20~30대에 자주 들었던 곡들이다.노래의 힘이란 실로 대단한 것이 첫 음, 첫 소절에 이미 나는 그때 그 시절의 한 장소에 가 있다. 노래마다 떠올리는 사람도, 공기의 온도도, 감정의 색깔도 다 다르다. 피식 웃음이 날 때도 있고, 손발이 오글거리기도 했다가, 심장 언저리가 아릿해지기도 한다. 입추가 지났다 한들 누가 봐도 여름 같은 이 계절에 가을을 타는
가수 케이시의 잊어가지마 라는 노래가 있다. 처음에는 멜로디에 꽂혔다가 종국에는 가사에 매료되어 출퇴근길에 무한반복으로 들었던 노래다.2년 전 이 노래를 알게 되기 전까지 나는 감정을 머금는 것이 어떤 건지 모르는 사람이었다. 이어나가야 할 가치를 못 느끼는 관계는 일언반구 없이 조용히 정리해 버렸지만, 놓지 못하는 인연에 대해서는 생각과 감정을 담아두지 못하고 전달을 해야만 했다. 어떤 사람을 좋아하면 좋아할수록, 인연이 소중하면 소중할수록 뭔가를 머금는 것은 내게 불가능한 일이었다.아무 말도 전할 수 없어 그저 난 고개만 숙여
동생으로부터 초등학교 2학년인 조카에게 남자친구가 생겼다는 말을 들었다. 우리 집안의 첫 번째 아가가 언제 이렇게 커서 이성 친구 얘기를 할까 귀엽기도 하고 놀라기도 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엄마는 조카가 고모보다 낫다며 나를 한심하게 쳐다보셨다.주말 저녁 둘째 조카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오랜만에 가족이 모여 식사를 했다. 둘째 조카도 같은 유치원에서 좋아 지내는 남자아이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생일 선물을 뭘 받았냐고 물어보니 치마를 받았다고 했다. 첫째 조카가 내 질문이 끝나기가 무섭게 "고모, 유리 내일 그 남자애 집에
7월에 인사이동이 있어 새 부서에서 일하게 되었다. 내 팀의 팀원은 이제 막 수습을 뗀 입사 3개월 차 신입사원, 작년 입사자, 4년 차 대리 이렇게 총 3명이다. 셋의 부서 업무 경력은 0~3개월로 다 합쳐봐야 1년이 안 되고, 그들의 중간 관리자인 나는 무려 10년 전에 일했던 부서에 재배치된 입장이다. 업무 특성상 그 난이도가 낮지 않고 업무량도 만만치 않아 여러모로 막막한 상황이 되었다.이렇게 직원 한 명 한 명이 아쉬운 와중에 부서장이 처음 배정해 준 팀원 4명 중 1명은 받지 않는 호기를 부렸으니 일정 부분 자초한 것도
인생 영화까진 아니어도 영화 리틀 포레스트는 내가 손에 꼽을 정도로 좋아하는 영화 중 하나다. 연기, 목소리, 얼굴, (인터뷰에서 드러나는) 사상까지 모조리 갖춘 김태리 배우가 나와서만은 아니다. 이 영화에서 펼쳐지는 영상을 보다 보면 괜히 건강해지는 기분이 들고, 내 안의 온갖 불량하고 해로운 것들이 치유되는 느낌이 든다. 직접 재배한 농작물로 정성스럽게 끼니를 지어먹는 과정이 숭고한 행위라는 것도 이 영화를 통해 깨달았다. 영화의 잔상 때문이었을까. 독립을 하고 나서 나는 내가 먹을 밥을 짓고 반찬을 만들고 있다. 참 오랜 시간
이사 준비를 하면서 1인 생활에 꼭 필요한 가전제품만 구입하려고 리스트를 작성했다. 세탁기, 냉장고, 공기청정기 등 거침없이 써 내려가다 유독 망설여지는 품목이 하나 있었는데 그건 바로 TV였다. 그 이유는 내가 텔레비전을 너무 좋아하기 때문이었다. 인터넷이 등장하기 전이든 후든 어릴 때부터 TV는 내게 최고의 미디어였다. 아직도 천사들의 합창 마리아 호아키나의 흰 장갑을 기억하고, 국민학교 토요일 수업을 마치고 짜파게티를 먹으며 레니게이드를 봤던 행복감이 생생하다. 학창 시절을 지나 회사원이 되고 나서도 크게 달라진 건 없었다.
개인정보유출이 아닌 나의 선택으로 전국의 공연 홍보 문자가 핸드폰에 쌓이고 있다. 거의 매일 오다시피 하는 문자들을 보며 이토록 수많은 공연이 사계절 내내 펼쳐지고 있음을 새삼 깨닫는다.작년 이맘때 나는 한 뮤지션에 꽂히게 되었다. 십 대에도 해본 적 없던 소위 덕질이라는 것을 40대가 되어 시작한 것이다. 그 뮤지션의 퍼포먼스를 직접 봐야겠다 결심하고 그의 공연 예매를 처음 시도한 날을 기억한다. 예매일시를 알람처리하고 정각에 접속했지만, 덕질 초보자인 내 손은 원하는 자리를 차지하기엔 터무니없이 느렸다. 단 몇 초만에 공연장 상
아파트 입주 전후로 배송, 설치, 시공 등으로 인해 낯선 사람들과의 일회성 만남이 많아졌다.그리고 그렇게 마주친 사람들의 90프로가 나를 "사모님"이라고 불렀다. 난생처음 사모님이란 소리를 들은 건 잔금을 치르고 아파트 키를 받는 날이었다. 영상 매체에 등장한 사모님의 이미지 때문인지 그 말을 듣는 순간 너무 당황스러웠다.방금 내가 뭘 들은 거지? 아파트 회사 직원의 응대는 무척 친절했지만 자꾸만 불러대는 사모님이란 호칭 때문에 무슨 말을 하는지 들리지 않았다. 이렇게 한 번 사모님으로 불리고 나니 그 말이 계속 내 심기를 건드렸
이사와 맞물려 집에 예기치 못한 큰일이 터지면서 뜻하지 않은 두 집 살림을 하고 있다. 본가에서 짐을 챙겨 출근을 하고 퇴근 후에는 새 아파트로 가서 짐을 푸는 날의 반복이다. 잔금을 치른 지 벌써 한 달이 지났지만 아파트에서 잠을 잔 건 딱 두 밤뿐이다. 이 때문인지 안 그래도 낯설기만 한 아파트에 대한 적응이 더디다. 나의 짐이 완벽하게 가지 않아서 갈 때마다 호텔 체크인을 하는 기분마저 든다.소위 새삥 아파트에 나만의 둥지를 틀면 마냥 신날 줄만 알았는데 그렇지가 않다. 헤아려보니 생활의 흔적이 난무하고 다사다난한 경험과 상흔
퇴사라는 결단 앞에서만 갈팡질팡할 뿐, 우유부단과 결정장애는 평소의 나와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다. 아파트 입주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선택해야 할 온갖 사항들이 한꺼번에 몰려오자, 이 연속적인 갈림길 지옥에서 벗어나고 싶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리고 이 과정을 먼저 거친 친구와 선후배들이 새삼 대단해 보였다. 보통 이 와중에 혼인과 육아까지 추가된 형국이니 그들의 동시다발적인 처리 능력에 존경심도 절로 생긴다. 아파트 바닥 타일 줄눈의 색상부터 간접조명의 위치, 보이지도 않은 '미세먼지적 혜택'을 비교하며 대출은행을 선정하는 과
공연장에서 뮤지션의 연주를 직접 듣고 나면 매일 듣는 플레이리스트에 최애곡 하나가 추가되곤 한다. 현장에서 느꼈던 감동을 어떻게든 이어가고 싶은 바람이랄까. 작년 12월, 한 공연장에서 Astor Piazzolla의 곡들을 듣게 되었다. 탱고의 아버지라 불리는 피아졸라의 작품 중 알고 있었던 유일한 곡은 Libertango. 많이 알려진 곡답게 이날도 연주되었는데 역시 명곡이란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탱고를 배워 이 곡에 맞춰 춤출 수 있다면 멋지겠단 상상에 두근거렸다. 그런데 이 날 내가 진정으로 꽂힌 곡은 Oblivion이란 곡
2025년 1월, 이번 생일은 좀 특별(?)했다.오전에는 헌혈을 하고, 오후에는 아파트 사전 점검을 했다. 사전점검 업체를 계약했지만 나도 뭘 알아야 질문이라도 할 수 있을까 싶어 인터넷으로 사전 점검 체크리스트를 출력했다. 처음에는 열심히 읽다가 점검해야 할 항목 개수와 잘 모르겠는 용어에 질려 이내 포기했다. 사전점검 업체와 약속한 시간보다 한 시간 정도 일찍 도착해 집을 둘러보았다.내 아파트의 층은 미분양된 잔여 아파트 중 내 손으로 직접 고른 층이다. (아직 동호수를 헷갈려하는 수준이긴 하지만) 그래서 왠지 더 정이 간다.
TV에서 정치 얘기가 나오면 채널을 돌리던 내가 정치 관련 뉴스와 토론 프로그램을 부러 찾아보기 시작한 건 마흔 즈음이었다. 20, 30대에도 선거 때마다 투표를 해왔지만 후보자가 제시하는 정책과 공약보다는 개인적인 상식과 가치관에 그나마(?) 부합하는 정당과 후보에 한 표를 행사해 왔다. 그러다 정치인들의 언행 하나에 나의 소소한 경제와 일상이 좌지우지된다는 것을 체감한 이후부터 그들이 무슨 말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하는지 주시하게 되었다.엄밀히 따지면 태어난 이후부터 정치의 결과물에 영향을 받지 않은 적이 있었던가 싶다. 노는
올해 3월 어느 주말, 마루 소파에서 빈둥거리고 있는데 엄마가 친구분과 통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엄마 친구분이 가수 싸이와 태양의 공연 티켓 두 장이 있으니 생각이 있으면 와서 보라는 것이었다. 가고 싶어 하는 엄마와 달리 아빠는 난색을 표하셔서 내가 아빠 대타로 가게 되었다.공연 장소는 영종도 인스파이어 아레나 홀이었다. 새로 생긴 공간에 대한 궁금함, 가수 싸이와 태양의 공연에 대한 기대감으로 집에서 멀지 않은 그곳에 금방 도착했다. 빅뱅이 아닌 가수 태양의 노래는 '나만 바라봐'와 눈, 코, 입 밖에 모르는 관계로 정적으로 즐
한 달 전쯤, 회사동료로부터 메시지가 왔다. 별다른 코멘트 없는 사진 한 장이었다.5년 전 겨울, 칭다오에 여행 가서 함께 찍은 사진이었는데 보자마자 눈에 들어온 건 우리 둘의 표정이었다. 당시의 여행은 승진으로 스트레스가 극에 달한 입사 10년 차 만년 대리들의 즉흥적인 도피였는데 둘 다 찐으로 웃고 있었다. 여행지에서 찍은 것이라는 걸 감안해도 5년이란 시간이 지난 지금에는 찾아볼 수 없는 표정이었다. 그로부터 3년 뒤, 둘 다 승진을 했고 이제는 사실상 승진에 개의치 않는 상태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지금은 저런 표정을 지
루이즈 부르주아의 거미 조각상을 처음 접했던 것은 리움미술관에서였다. 그때는 그저 SNS 업로드용 사진의 배경으로 제격이잖아 라는 생각으로 거미 앞에서 열심히 사진만 찍었더랬다. 그 후 세월이 흘러 2년 전 국제갤러리에서 열린 그녀의 개인전을 보고 나서 그녀가 천착한 주제에 여성, 엄마가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루이지애나 미술관의 시그니처 포토스폿으로 알려진 곳에도 루이즈 부르주아의 마망이 있었다. 내게 있어 거미라는 동물은 외관상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비주얼이 아니다. 현실에서 거미줄을 치고 있는 거미를 만나게 되면
루이지애나 미술관 입구를 지나자마자 무언가에 이끌리듯 오른쪽으로 향했다. 미술관 내부지도를 보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가고자 하는 건물에 무엇이 있는지 알지 못한다. 나를 처음 맞아준 풍경은 통창 너머로 바다가 보이고 아늑한 의자가 놓여있는 리빙룸 같은 곳이었다. '루이지애나'라는 이름이 원래 미술관 부지에 있었던 알렉산더 브런의 저택 이름이었다는데, 순간 미술관이 아닌 누군가의 저택에 초대받은 기분이 들었다.화살 표시를 따라 밑으로 내려가면 쿠사마 야요이의 Gleaming Lights of the Soul 이란 작품이 설치되어 있다
여행을 준비할 때, 코펜하겐에 대한 설렘을 최고조로 끌어올린 건 단연 루이지애나 현대미술관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미술관이 내가 좋아하는 바다 옆에 있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 코펜하겐에서의 일정 중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하기로 마음먹었다. 코펜하겐 중앙역에서 Humlebaek역으로 가는 열차를 타고, 바깥 풍경이 잘 보이는 창가 쪽에 자리를 잡았다. 한 시간 남짓 기차로 떠나는 근교여행에서 음악을 빼놓는 건 있을 수 없는 일. 폴킴의 NEW DAY가 고막에 닿자마자 나는 아무도 볼 리 없는 뮤직비디오의 주인공이 된다. 이런 음악이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