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철의 들꽃여행'
겨울 야생화의 별천지, 제주!
참으아리, 왕갯쑥부쟁이, 섬갯쑥부쟁이, 갯국, 감국, 산국, 털머위, 붉은겨우살이...가득하네.
때론 값비싼 고급 어종이지만 물을 떠난 지 오래되어 꾸들꾸들해진 건어물보다는, 싸구려에 흔하지만 시퍼렇게 살아 펄떡이는 망둥이 한 마리에 더 구미가 당기는 법. 야생화도 마찬가지. 춘삼월부터 만산홍엽 때까지 만발했던 형형색색의 꽃들이 추억 속 영상으로 남은 한겨울, 그 어떤 희귀종보다도 살아 숨 쉬는 한 떨기 야생화가 보고 싶어 제주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습니다.
영하의 날씨에 뭍의 식물들은 새싹을 돋우고 꽃을 피우는 등 생장 활동을 멈추었지만, 바다 건너 ‘따듯한 남쪽 나라’는 분명 다를 것이라 믿기에. 하지만 12월 초순 제주 공항에서 바라본 한라산의 첫 모습은 뭍의 여느 산과 다를 바 없습니다. ‘설문대 할망의 흰머리’라는 전설을 간직한 정상은 구름에 덮여 아예 보이질 않습니다. 해안도로를 따라 애월항과 협재해수욕장으로 달리는 내내 앞바다에서는 파도가 흰 거품을 물고 연이어 달려옵니다. 고개를 돌려 한라산을 바라보니 구름은 걷혔으나 간밤 폭설이 내렸는지 산꼭대기가 희끗희끗합니다. 내처 남쪽으로 달려 산방산 앞 사계 해안에 닿습니다. 애써 두리번거리지 않아도 노란색 꽃 무더기가 여기저기 눈에 들어옵니다. 털머위입니다.
같은 섬이라도 북쪽 제주와 남쪽 서귀포는 분명 기온 차가 납니다. 공항에서 느꼈던 추위는 어느덧 사라지고 바람결은 한결 따스합니다. 살아 숨 쉬는 꽃 한 송이 못 보는 것 아닐까 슬몃 들었던 의구심은 기우였을 뿐입니다. 털머위 주변에 섬갯쑥부쟁이와 산국, 감국, 참으아리 등 뭍에서는 이미 스러진 가을꽃과 갯국까지 싱싱하게 널려 있습니다.
내친걸음 중문 단지 인근 해변의 왕갯쑥부쟁이 자생지를 찾아갑니다. 각종 도감에 ‘제주도 남부’ 한 곳에 분포하는, 한반도 고유종으로 소개되는 왕갯쑥부쟁이. 최근 알려진 비금도 서식지를 포함해 자생지가 단 두 곳에 불과하다는 왕갯쑥부쟁이는 그러나 ‘귀한 몸’을 과시라도 하듯 대부분 바위 절벽 높은 곳에 한 다발씩 피어 혹여 이방인이 자신을 해치지 않을까 잔뜩 경계하고 있었습니다.
바닷가의 꽃들이 건재함을 확인했으니, 한라산으로 방향을 틉니다. 물론 남한에서 가장 높고, 큰 산인 만큼 꽃이 있으리라 기대한 건 아닙니다. 꽃 대신 ‘겨울 한라산의 보물’ 붉은겨우살이의 열매가 이름대로 붉게 영글어가는 모습을 찾아 나섰습니다. 역시 간밤 내린 눈으로 영실매표소에서 탐방로 입구까지 2.5km 구간은 사륜구동에 스노체인을 갖춘 차량만 통행이 가능합니다. 급히 주차장에서 한라산 해발 1280m에 있는 존자암지까지 1.3km를 걷기로 변경합니다. 그 정도만 올라가도 목표한 붉은겨우살이를 충분히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대대로 울울한 나무줄기와 높은 가지 곳곳에 뿌리를 내린 채 진홍색 열매를 잔뜩 껴안은 붉은겨우살이를 고개가 아프도록 올려다보았습니다. 내륙에도 내장산 등 몇몇 곳에 붉은겨우살이가 자생하지만, 붉은색의 농도와 선명도는 한라산의 붉은겨우살이가 단연 최고로 꼽힙니다.
바닷가와 한라산을 보았으니 덤 삼아 작은 오름 하나를 오릅니다. 서귀포 남원에 있는 높이 211m의 자배오름. 위미항으로 향하던 중 돌발적으로 검색한 작은 봉우리로 별 기대 없이 올랐지만, 치렁치렁 달린 노랑 열매가 익어가는 노랑하늘타리를 비롯해 백량금과 자금우의 빨간 열매, 갈색으로 익어가는 고사리삼의 포자, 그리고 주홍서나물의 선명한 진홍색 꽃까지 조우하는 작은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야생화 칼럼니스트
-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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