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사이에 밤공기가 확연히 달라졌다. 열어 놓은 창 너머로 들어와 맨살을 스치는 바람이 차가워 홑이불을 끌어다 덮는다. 더위가 지나갔다는 안도감과 함께 가을이 주는 아련함이 마음속에 피어오른다.

계절의 변화를 느낄 때면 어쩔 수 없이 세월을 인식한다. 그러고는 습관적으로 삶을 돌아본다. 거기에 항상 따르는 질문이 있다. “나는 지금 제대로 살고 있나?”

올해엔 세월의 흐름을 의식할 수밖에 없는 이벤트가 유난히 많다. 연초에는 칠순 생일과 고등학교 졸업 50주년 기념행사가 화살처럼 빠른 시간의 흐름을 절감케 했다. 그리고 이제 한 달쯤 후면 결혼 40주년 기념일이다.

칠순의 친구들은 나이를 잊은 듯 모두 젊은이처럼 활기차게 살아간다. 모두 자기가 우선순위를 두는 무언가에 집중하는 모습이다. 남은 시간이 줄어든 만큼 시간의 밀도가 높아졌을 것이다.

왁자지껄한 친구들과의 모임 자리에서는 “우리가 언제까지 이렇게 모일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자주 등장한다. 그리고 이는 각자의 삶에 밀도를 더한다.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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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정된 미래가 나를 향해 다가온다


언제부터인가 미래에 대한 나의 인식이 달라져 있는 것을 발견한다. 이제 미래는 내가 무언가를 붙잡기 위해 달려가야 할 곳이 아니다. 가장 좋은 것으로 확정된 미래는 현재를 살고 있는 나에게 날마다 다가오고 있었다.

젊은 시절엔 늘 미래를 향해 달렸다. 거기엔 내가 바라는 무언가가 있었고, 나는 늘 그것을 잡으려 쫓아갔다. 그러나 이제는 내가 그리고 있던 미래가 슬며시 나를 향해 다가오는 것을 본다. 아주 오래전에 이미 확정된 것들이 실체가 되어 하나둘 나에게 나타나고 있다고 느껴진다.

미래를 잡으려고 달려가는 마음엔 늘 희망과 불안이 함께 했다. 거기에는 꿈과 기대가 있었지만, 불확실성에 대한 두려움을 피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 미래는 더 이상 나에게 불안과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다. 이제 나는 ‘지금 여기’를 살아갈 뿐이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문득 어린 시절 내가 좋아했던 노래 가사가 떠오른다.

‘Yesterday is dead and gone. And tomorrow's out of sight.
And it's sad to be alone.’
(과거는 지나갔고, 미래는 알 수 없지. 그래서 지금 나는 혼자라는 게 슬퍼.)

그러나 50여 년이 흐른 지금 나에겐 미래가 더는 알 수 없는 미지의 영역이 아니다. 내가 방향을 잃지 않는 한, 이미 만들어 놓은 확정된 미래가 나에게 다가온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나의 노래는 바뀌었다. 나는 이렇게 노래한다.

‘The best is yet to come!’
(가장 좋은 것은 아직 오지 않았다!)

나의 미래는 항상 가장 좋은 것으로 다가올 것이라는 믿음으로 산다. 어제보다 오늘이 더 좋다. 그렇게 오늘을 누리고 있으면, 더 좋은 미래가 찾아와 문을 두드린다.

이제 ‘더 높이, 더 멀리, 더 많이’를 추구하며 달려가지 않는다.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주어지는 ‘가장 좋은 것’이 날마다 나에게 다가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챗 지피티 생성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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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체가 늙어가는데도 더 좋은 미래를 기대하는 이유

‘The best is yet to come.’이라는 문구가 내 마음 깊은 곳에 새겨진 지 20년가량 된 듯싶다. 내가 인생의 광야를 만나 길을 잃고 있을 때 이 말이 슬그머니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 내가 주저앉지 않도록 용기와 힘을 주었다.

이 말을 내 카톡 계정의 상태 메시지로 적어 놓은 지도 십수 년 됐다. 그래서 지금도 카톡을 열 때마다 이 말이 나에게 속삭인다. 안심하라고. 너의 미래는 더욱 멋질 것이라고.

나이 먹어가면서 더 자주 이 말을 되뇐다. 그리고 자연의 법칙에 따라 노화하는 육체가 주는 상실감을 또 다른 기대감으로 대체한다. 성경은 ‘겉사람은 후패하나 속사람은 날로 새롭도다’(고린도후서 4장 16절)라고 기록하고 있다.

몸은 늙고 병들어 쇠퇴하고 언젠가는 소멸하게 된다. 그러나 영적인 존재인 인간은 그 영혼을 날마다 새롭게 함으로써 더 좋은 미래를 만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늙음은 결코 쇠퇴가 아니다. 되려 삶을 완성해 가는 예술의 마지막 붓질이라 할 수 있다. 지금 내가 지나가고 있는 서드에이지(Third-age, 제3연령기)에 내가 해야 할 일이다.

나는 태어나서 자라고 배우며 인생을 준비하는 30년을 퍼스트에이지(제1 연령기), 이후 일이 삶의 중심에 자리하는 30년을 세컨에이지(제2 연령기)로 구분한다.

그리고 내 서드에이지는 60살부터 시작돼 이제 10년이 흘렀다. 이는 내 건강 수명이 다하는 날까지 이어질 것이다. 내 인생을 완성하는 시기이다. 그러기에 나는 지금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시기를 보낸다.

머지않아 이런 시간도 지나갈 것이다. 그리고 육체의 마지막을 기다리는 시즌(제4 연령기)을 맞을 것이지만, 나는 노래하기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The best is yet to come!

“가장 좋은 것은 아직 오지 않았다!”

챗 지피티 생성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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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신앙을 가진 이에게는 믿음의 고백으로 다가올 수 있다. 신앙은 가장 좋은 것을 약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또한 신앙이 없는 사람에게도 자기 삶의 여정에 대한 깊은 신뢰로 표현될 수 있다.

신앙이 없이도 그런 삶을 살기 위해서는 삶에 대한 신뢰를 갖는 연습이 필요하다. 삶을 성과 중심이 아닌 ‘의미 중심’으로 전환하는 내적 결단도 요구된다. 서드에이지를 사는 사람들에게 이미 주어진 선물이 아닐까 한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자연은 서두르지 않지만, 모든 것을 이룬다’고 했다. 지금 순간에 충실히 머무르면 완성된 미래가 자연스럽게 다가온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프랭크 시내트라가 부른 ‘The Best Is Yet to Come.’

‘The best is yet to come!’ 이 말이 대중에게 널리 퍼진 것은 1964년 미국 가수 프랭크 시나트라가 이 제목의 노래를 부르면서였다고 전해진다. 그는 생전에 이 노래를 아껴 그의 묘비명에도 이 문구가 새겨져 있다고 한다.

인생과 사랑에 대한 설렘을 담고 있는 이 노래의 시작은 이렇다.
“Out of the tree of life I just picked me a plum...”
(인생이라는 나무에서 나는 방금 가장 좋은 열매 하나를 땄어)
그리고 이렇게 계속된다.
“The best is yet to come, and babe won't it be fine...”
(가장 좋은 날은 아직 오지 않았어, 자기야, 얼마나 멋질지 상상해 봐)

노래는 “지금까지도 좋았지만, 앞으로는 더 좋을 거야”라는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메시지를 반복한다. 그리고 절정에서는 이렇게 선언한다.
“You think you've seen the sun, but you ain't seen it shine...”
(넌 햇살을 봤다고 생각하겠지만, 진짜 빛나는 건 아직 보지 못했어)
그리고 그 끝을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마무리한다.
“The best is yet to come, come the day you're mine!”
(가장 좋은 건 아직 오지 않았어, 네가 내 사람이 되는 그날 말이야)

삶의 마지막까지 더 좋은 것이 남아 있다고 믿는 사람이 부를 수 있는 노래다. ‘당신이 햇살을 봤다고 생각하지만, 진짜 빛나는 것은 아직 보지 못했어’ 라는 말이 내 가슴을 뛰게 한다.

챗 지피티 생성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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