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히 학원 안 가는 거지요. 이 거지 같은 학원!”

순둥순둥한 녀석 입에서 나온 ‘거지 같은’은 강한 감정 표현이었다. 유럽 여행 가서 좋은 게 아니라, 학원 안 가서 좋다는 것이다. 녀석은 개운하게 웃었다.

다른 학생들에게도 물었다. ‘1n박으로 가는 가족 유럽 여행 vs 학교, 학원 안 가고 집에서 자기 마음대로 살 수 있는 1n일’. 후자의 승률이 높았다. 예상 못한 답은 아니었다. 너희에겐 시간 낭비할 권력이 없다.

나는 유럽 여행의 가치를 모른다. 비행기를 타 본 적도 없다. 그래서 시야를 넓히고 경험을 쌓는다는 여행의 가치를 공감하지 못한다. 여행이라는 이름의 관광은 일탈적 체험을 통한 재충전 정도로 이해한다. 학군지 아이들의 탈진은 타당했다. 그 나이 때 나도 코피 흘려 가며 공부했지만, 너희만큼은 아니었다. 여행 다녀온 아이들은 생기가 돌았다. 단, 밀린 학원 스케줄과 숙제를 쳐 내느라 생기는 곧 상쇄되기 시작했다.

가족 여행의 의미는 알 법하다. 가족과 함께 어딘가에 갔던 시간들은 추억 전환 확률이 높았다. 추억은 꼬박꼬박 이자를 주고, 공유 경험으로 가족을 응집시킨다. 투자 효율 높은 삶의 연금을, 학생들은 모를 것이다. 나는 20년 후 받아 먹을 연금이 없다는 걸 안다. 너희만큼 바쁘다.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이 필요하다. 나는 여행의 형식이 유효할지 모르나 너희는 좀 다르다. 너희는 ‘학생의 바깥’을 나가본 적 없다. 입시가 설계한 속도전 속에서 뱅뱅 돌며 끊임없이 학생이었다. 학생이 아닌 나, 그러니까 학교에서, 사회에서 요청해 대는 꿈, 자아를 마주할 시간이 없었다. 꿈이나 자아는 생존의 잉여다. 부모 울타리 안에서 아무리 안전하게 싸우더라도, 입시의 본질은 생존경쟁이다. 나를 돌아볼 여유가 없다. 너희에게 필요한 건 지독한 심심함이다.

내 초중등학교 때는 확실히, 지금 학군지 아이들보다 많이 심심했다. 게임도 한계가 있고, 동네 친구들과 시간이 안 맞을 때는 혼자 여기저기 돌아다니거나, 벽이나 계단에 테니스 공이라도 던졌다. 버스 네 정거장 거리의 학교도 걸어가곤 했다. 버스 두 정거장 거리의 학원은 당연히 걸어다녔다. 스마트폰은커녕 카세트도 없던 시절, 걸을 때 심심할 수밖에 없었다. 심심할 때 공상했고, 외계인과 맞서 싸우거나 지구를 정복하는 것도 지루해지면 생각은 결국 현실의 ‘나’로 귀결되었다. 내가 좋아하는 게 뭔가, 내가 하고 싶은 게 뭔가. 쫓기지 않고 생각했고 짬 날 때 이것저것 기웃거렸다. 물론, 그렇게 찾은 답이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단, 나는 습관성 주체였다. 이게 꼭 좋은 건 아니지만, 지금 아이들에겐 조금 필요해 보인다. 최소한 나는, ‘돈 많은 백수가 꿈’ 따위는 입에 올리지 않았다.

많은 아이들의 꿈이 돈 많은 백수다. 자신이 뭘 하고 싶은지 모르는 증상이다. 풍요의 애완동물이 되겠다는 자백이 당당해서 측은하다. 별 수 없었을 것이다. ‘나’를 마주보려면 생존 이외의 시간, 휴식 이외의 낭비가 필요했다. 더이상 아무것도 해야 할 게 없는 하얀 시간 속에 어딘가에 톡 돋은 새싹, 그게 하고 싶음일 것이지만, 너희는 바쁘다. 숙제로 거듭된 시간으로 가뜩이나 시간이 없는데 도파민까지 덮쳐버려 심심함이 절멸해 간다. 숙제와 도파민 사이에서 ‘나’는 나의 난민이다. 심심하지 않은데 외롭다면, 자아 결핍의 증상이다.

너희에게 필요한 것은 심심함의 여행이다. 심심할 때, ‘나는 절대 주체’가 된다. 절대 주체는 그 권력을 행사하고 싶어 주체할 수 없어져 ‘하고 싶음’을 발명한다. 자아의 씨앗이다. 그러나 내가 학부모가 되어 본 적 없어서 쉽게 떠들어대는 한가한 소리라는 것쯤도 안다. 그러나 습관성 주체의 습성이다. 굳이 글로 남기는 것은 내가 심심함을 소화하는 권력이고, 내겐 잘 맞다.

자료사진 연합뉴스
자료사진 연합뉴스

수능이 끝났다. 면접과 논술도 곧 끝날 것이다. 너희가 잔뜩 심심하기를 바란다. 한국 사회가 개인에게 남겨둔 심심해도 되는 거의 마지막 시간이다. 그 시간을 초등학생, 중학생도 조금 더 나눠 가졌으면 좋겠다. 입시 식민의 시간 속에서 누구나 독립운동가가 되기를 바라는 건 가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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