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40번째 결혼기념일을 맞았다. 서울 시내 야경이 내려다보이는 남산의 한 프랑스 식당에서 아내와 조촐한 기념의 시간을 가졌다.
40년. 단순한 시간의 합이 아니라 두 사람이 써 내려온 이야기의 무게로 다가온다. 감사와 감동이 크다. 여운이 길다.
결혼 40주년을 루비 웨딩 (Ruby Wedding)이라고도 부른다. 이 시기의 사랑은 루비의 붉은 색처럼 깊고 따듯하다. 루비가 붉게 빛나는 이유는 수많은 광물과 세월이 합쳐졌기 때문이다. 부부의 40년 또한 마찬가지다.
인생 여정에서 수많은 날을 만난다. 그런데 어떤 날은 그 의미가 특별히 각인된다. 삶의 방향을 틀어주는 키가 되기도 한다. 나에게는 이날이 그랬다.
가끔 소파에 앉아 있는 아내의 옆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볼 때가 있다. 세월의 무게와 풍파를 오롯이 견뎌온 나무처럼 앉아 있는 그를 보면 안쓰럽고 미안하다.
그리고 누구에게서도 찾을 수 없는 짙은 동료의식을 느낀다. 세상 끝 날까지, 상황과 처지에 개의치 않고 서로를 지켜주고 안아 줄 유일한 동료임을 새삼 인식한다.
이제는 서로 달라 불편했던 각자의 색깔조차도 서서히 동화되어 ‘우리의 색’이 되었다. 이제는 그에게서 나를 보고 나를 느낀다.
무면허로 달려온 40년
아내와 함께 해온 지난 세월을 되돌아보면 무면허 운전으로 비포장도로를 달려온 느낌이다. 서툴고 거친 운전자에게 몸을 맡기고 덜컹거리며 달려온 그의 인생 여정이 얼마나 고달팠을까.
30년을 다른 환경과 가치관 속에서 살아온 두 사람이 만나 하나를 이루고 목적지를 향해 가는 게 결혼 생활인데, 이를 위한 어떤 준비나 학습도 없었다. 고작해야 나보다 몇 해 먼저 결혼한 선배나 친구들로부터 어설픈 훈수를 듣는 게 전부였다.
그러니 아내는 불편함과 이질감에 비명을 지르고 고통을 호소했을 터이다. 하지만 무지와 고집으로 뭉쳐 있는 나에게는 그것이 한갓 ‘여자의 끝없는 잔소리’로만 여겨졌을 것이다.
결혼은 단순히 남자와 여자가 한집에 들어가 사는 게 아니다. 두 개의 우주가 만나 서로의 궤도를 열어주는 사건이다.
조금씩 속도를 맞추고, 서로의 그림자를 이해하고, 가끔은 충돌을 통한 조정과 재정비를 거치면서 두 우주는 결국 하나의 넓고 깊은 공동 우주를 만들어 간다.
서로를 향한 마음이 있을 때, 각자의 우주는 더 넓어지고 더 깊어진다. 결혼은 그래서 두 사람이 함께 확장되고, 종국에는 하나로 융합하는 가장 경이로운 인간의 이야기다.
그런데 이 광대하고 오묘한 일을 아무 준비도 없이 아무렇지도 않게 시작한 것이다. 그러니 그 여정은 힘들 수밖에 없었다. 때로는 터져 나오는 비명과 한숨을 삼키기 위해 입술을 깨물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다 10년 전쯤 아내가 나에게 제안했다. 지금이라도 결혼 생활을 어떻게 해야 제대로 하는 것인지 배워보자고 했다. 그래서 나이 60에 뒤늦게 어느 교회에서 개설한 ‘하나님의 가정훈련학교’라는 곳에 들어가 2박3일 동안 교육을 받았다.
그런데 2년 전 봄에 아내가 또 같은 제안을 했다. 그래서 오래전 한번 수강했던 이력을 감추고, 똑같은 프로그램을 재수했다. 30~40대 부부가 주를 이루는 이곳에 입학한 최고령 부부였다. 이 프로그램을 재수한 사람 또한 지금까지 우리 부부가 유일했을 것이다.
아내의 마음을 알기에 거부하지 않고 따랐다. 길지 않은 인생에서 지금이라도 가정의 창시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결혼과 가정의 원리를 배워, 남은 세월을 조금 더 잘 살아내고 싶었을 것이다.
사람이 태어나서 보통 30년 정도를 배움에 집중한다. 이것이 퍼스트 에이지(First-age, 제1 연령기) 다. 그러나 초등학교부터 대학원까지 20년 가까운 기간 동안 정규 교육기관에서 교육받았지만, 어디에서도 결혼 생활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배운 기억이 없다.
사람은 나이 먹어가면서 저절로 알아가거나 터득하는 것들이 많다. 경험과 지식이 쌓이면서 그렇게 된다. 하지만 결혼 생활을 그러한 방식으로 배우기에는 너무 많은 희생이 따른다.
결혼 생활은 사람이 나이 들면 누구나 저절로 잘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배우고 또 배워도 늘 부족할 수밖에 없는 어려운 과목이었다. 자아를 죽이지 않고서는 도달하기 어려운 항목이 많아서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했다. 그렇게 무면허로 운전대를 잡고 40년을 달려왔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떠한가. 사정이 조금 나아졌을까.
아직도 아내가 내미는 나의 성적표는 합격점에서 크게 모자랄 것이다. 얼마 전에 아내가 “올해도 가정훈련학교 열던데…”라고 지나가는 말로 했을 때, 내가 잘 못 들었나 하고 귀를 의심했다. 아마 학생이 아니라 봉사자로 참석하고 싶다는 얘기였을 것이다.
결혼은 ‘경쟁’이 아니라 ‘연합’이다
결혼과 가정에 대한 기초지식을 전혀 배우지 못한 데 더해, 잘못된 정보가 입력된 것 또한 문제였다. 결혼에 대한 가짜 정보가 입력돼 있었다.
우리 세대에서는 결혼을 앞두면 보통 선배나 먼저 결혼한 친구들이 술자리에서 결혼 생활에서의 생존 법칙을 훈수했다. “신혼여행 첫날부터 상대방을 휘어잡아놔야 고생하지 않는다”는 가짜 정보가 그것이었다. 같은 시각 새 신부도 선배 여성들로부터 같은 교육을 받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농담으로 주어진 이 훈수가 부부의 삶에 평생의 모토가 되고, 길이 되는 경우가 많다.
결혼은 두 사람이 만나서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 본질은 ‘연합’이다. 그런데 당사자들이 전혀 의식하지 않는 상황 속에서 부부가 평생을 연합이 아닌 ‘경쟁’ 관계로 살아가는 것을 본다.
부부가 경쟁 관계라는 게 말이 돼? 그렇지 않아도 치열하고 험한 경쟁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한평생 피곤하게 살아가는데, 안식과 위로가 있어야 할 가정에서조차 배우자와 경쟁 관계에 있다는 게 말이 되는가.
상상조차 못 했던 말이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고는 소스라치게 놀라는 자신을 발견한다. 지난 40년을 그렇게 살아왔고, 지금도 그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현실을 수긍하지 않을 수 없다.
부부가 다투는 것은 대부분 보이지 않는 두 사람 간 경쟁에서 비롯한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부부간의 크고 작은 다툼이 모두 ‘당신이 옳은지 내가 옳은지’, ‘당신이 센지 내가 센지’를 겨루는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물론 어쩌다 TV 같은 데 나와서 “나는 단 한 번도 부부싸움 해 본 적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을 보기도 한다. 부부 관계에서 철저하게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경우에만 가능한 일이다. 그때 두 사람의 연합이 이루어진다. 모든 부부의 꿈이지만, 그 경지에 오르기 쉽지 않다.
결혼은 남자와 여자가 만나 한 몸을 이루는 것이다. 하나님은 최초의 인간 아담을 만드신 뒤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며 그의 갈빗대를 취해 여자를 만들었다고 성경은 기록한다.
그러기에 결혼 생활은 요철(凹凸)이 결합하는 것처럼 둘이 합하여 온전한 하나가 되는 것이다. 상호 보완이고 연합이다.
부부가 연합하지 않으면 무슨 일을 해도 외롭다. 그러나 연합하면 어떤 상황에서도 회복한다. 하나님의 창조 질서다.
그런데 인간의 타락으로 죄가 들어오면서 연합의 대상이 바뀌었다. 보통 남편은 일과 연합하고, 아내는 자녀와 연합한다. 남편과 아내가 모두 배우자 대신에 다른 대상과 연합한 것이다. 집중해야 할 우선순위가 바뀐 것이다.
모든 부부는 다 연합을 원한다. 그래야 행복해진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렇게 살아내는 게 말처럼 쉽지 않다는 데 있다. 남자건 여자이건, 철저하게 자기중심적인 자아(ego)가 퍼렇게 살아서 완전한 연합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부부가 연합을 이루지 못함으로써 천국의 모형인 가정에 갈등이 발생하고 불화가 인다. 잘못된 우선순위를 바로잡아 부부 연합을 이루는 게 답이다.
이제 숫자 ‘40’이 가지는 의미를 붙잡는다
머리로 아는 것이 삶으로 나타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 그러한 자신을 보며 때로는 절망한다. 그렇게 40년이 흘렀다.
결혼 40주년이 지나면서 ‘40’이란 숫자가 운명처럼 심장에 와 박힌다. 내 삶이 바뀌는 터닝포인트가 될 것이란 기대감이 차오른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40’이란 숫자는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그것이 나의 소망이 된다.
성경에서 ‘40’은 성숙의 완성, 시험을 통한 변화, 세대교체, 새로운 출발 등을 의미한다.
고대 히브리 민족은 40년 동안 광야를 지나며 새 세대로 교체되었다. 120살을 산 모세의 삶도 40년마다 새로운 시작을 만났다. 심판과 새로운 시작을 상징하는 노아의 홍수 기간이 40일이었고, 예수 그리스도는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에 40일간 광야에서 금식하며 준비하는 시간을 가졌다.
동양에서도 40이란 숫자는 이와 유사한 의미를 띈다. 공자는 논어 위정편에서 ‘사십 불혹(四十而不惑)’이라고 했다. 사람의 나이 40세가 되면 더 이상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40년은 인생의 방향성이 명확해지는 세월이라는 의미다.
인류학에서도 40년은 기억이 재구성되고, 가치관이 전환되며, 사회적 성숙이 나타나는 한 세대의 길이로 여겨진다.
히브리 전통과 동양 전통, 인류학이 모두 40이라는 숫자를 ‘성숙’과 ‘변화의 완성’으로 본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이제 내 결혼 생활에도 40이란 숫자가 부여됐다. 나 또한 결혼 생활의 성숙과 변화의 완성을 소망하고 기대한다.
나는 지금 서드에이지(Third-age, 제3 연령기)를 산다. 이는 인생을 완성하는 기간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관계’의 완성이다. 거룩함으로 나를 창조한 하나님과의 관계를 완성하고, 화목함으로 사람과의 관계를 완성해야 한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배우자와의 관계임이 두말할 나위 없다. 이제 때가 되었음을 인식하고, 내가 변화되었음을 선언한다.
당신은 내게 한없이 고마운 존재이고, 영원한 친구임을 고백한다. 앞으로 사는 날 동안 늘 건강하고, 행복하기를 기도한다.
“결혼 40주년,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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