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타임스= 칼럼니스트 허서정]#1. 오랜만에 동창끼리 뭉쳤다. 솥밥이 나오는 가게였다. 스테인리스 솥을 기울인 채 누룽지 국물을 떠먹는 중에, 한식집 딸내미가 쾌활하게 말했다. “여긴 스댕이라 좋네. 돌솥 쓰면 설거지가 안되거든. 바쁘니까 세제를 깨끗이 못 헹궈. 근데 세제 좀 먹는다고 죽겠냐? 하하!”#2. 여름이었다. 비빔냉면이 당겼다. 매콤 달콤한 빨간 양념에 면과 오이를 버무려 몇 젓가락을 흡입했다. 어느 순간 쳐다본 내 그릇에 까만 머리카락 한 가닥이 보였다. 점원을 불러 이야기하고 같은 메뉴를 재주문했다. 점원은 마뜩잖
[청년칼럼=허서정]“백만 년이나 죽지 않은 고양이가 있었습니다. 백만 번이나 죽고 백만 번이나 살았던 것이죠. 정말 멋진 얼룩 고양이였습니다. 백만 명의 사람이 그 고양이를 귀여워했고, 백만 명의 사람이 그 고양이가 죽었을 때 울었습니다. 고양이는 단 한 번도 울지 않았습니다.”동화 《100만 번 산 고양이》는 이렇게 시작한다. 네버엔딩 코로나 여파로 우울하던 와중에 뜬금없이 이 책이 생각났다. 이유는 모르겠다. 어린 날 기억의 한 조각일 수도 있고 너무 별일 없이 사는 까닭에 '죽음이란 무엇인가'를 고민하다 떠올랐을
[청년칼럼=허서정]회의가 끝나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데 난데없이 손을 잡혔다. 손가락 귀여우시네요, 하얗고. 나는 놓여난 손을 재빨리 있던 자리로 되돌리며 맞장구쳤다. 하하, 네에.한밤 중 인적 없는 물레방앗간이 아니다. 연하의 후임인 그는 나와 동성이라 라면 먹고 갈래? 와는 맥락도 달랐다. 한데 분위기가 말할 수 없이 미묘해졌다. 정확히는 내 기분이. 회의 내내 옆자리에 앉아서 제 손가락을 관찰하셨나요, 라는 말은 입속에서만 맴돌았다.당혹스러운 일은 순식간에 벌어진다. 화가 날수록 차분해지는 성격인데도 나는 침묵했다. 정색하면 안
[청년칼럼=허서정] 강원도 농수특산물 진품센터의 ‘핵감자 판매’가 성황리에 종료됐다. 3월 24일이 마지막 판매일이었다. 오전 9시 59분 59초에 페이지를 새로고침했다. 판매중인 상품을 구매할 수 없었다. 접속자는 1초마다 백 단위로 늘었다. F5 키를 연타하던 도중 구매하기 버튼을 다섯 번이나 봤다. 물론 보기만 했다. 손이 눈보다 빠르다는 말은 진리였다.마스크 판매 사이트는 오전에 열렸다. 고지된 시각 2, 3분 전부터 사이트가 눈에 띄게 느려졌다. 새로고침할 때마다 증가한 접속자가 1,500만 명에 달했다. 이번에는 구매 버
[청년칼럼=허서정] 영화를 고르는 자신만의 기준이 있는가? 2001년부터 2011년까지 내 십대는 줄곧 시리즈와 함께였다. 원작을 읽고 홀딱 반해 영화가 개봉하는 날만 기다렸고 모든 작품을 극장에서 관람했다. 성인이 된 후에는 평론가 한줄 평과 관람객 별점, 예고편을 참고해 어떤 걸 볼지 결정했다. 그런데 슬슬 외부 기준을 신용하기 어려운 경우가 생겨났다. 짜릿한 예고편에 설레며 관람하러 갔더니 예고편이 전부였다든가, 두 시간 가까이 인내심을 시험했지만, 결국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건지 도저히 모르겠는 거다.그 다음부
[청년칼럼=허서정] “오늘 숙제하셨어요?” 옆자리 동료에게 묻자 겸연쩍은 웃음이 돌아왔다. 5개월 전 30대 직장인 A씨는 친한 동기 한 명과 함께 어학원을 방문했다. 영어로 말하고 싶다는 야심찬 계획이 있었다. 회화 수업 등록은 자격제였다. 먼저 문법 강좌를 수강하고 시험에 합격해야만 했다. 문법은 지루하고 어려웠다. 삼 개월 과정이 엿가락처럼 늘어났다. 어쩌다 한번 학원을 빠지고 나니 두세 번은 쉬웠다. 집으로 퇴근해서 외투를 벗어던지며 치킨 주문하던 때가 그리웠다. 어느새 2020년이 코앞이다. 서울대 소비트렌드 분석센터는 발
[청년칼럼=허서정] ‘미쳤습니까 휴먼?’ 관자놀이에 갖다 댄 두 개의 손가락과 45도 각도로 미묘하게 내리깐 시선. 아는 사람은 알 만한 찰진 드립과 어우러진 로봇 사진 한 장이 유행처럼 번진 지 오래다. AI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자연스럽게 인터넷 커뮤니티에 돌기 시작한 이 ‘짤방’은 태초에 낚인 사람을 놀리는 용도로 쓰이고 있었다. 이를테면 매우 강력한 혐오성 또는 어그로성 제목이 붙은 게시물을 클릭하면 해당 사진이 드립과 함께 노출되는 식이다. 아뿔싸, 당했다! 라는 인지 작용이 일어남과 동시에 로봇의 비웃는 표정과 뇌는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