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이란 상대적인 것이라 했다. 주식 투자자들의 프리미엄 친목회에 참석하는데만 수십만원을 냈다던 그가 몇 년전 술자리에서 불콰해진 얼굴로 했던 말로 기억한다. 내 돈을 은행에 차곡차곡 쌓아놔도, 다른 사람들이 더 많이 벌면 나는 가만히 앉아서 상대적 거지가 되는 거라고.그때 떨어진 술맛의 뒤끝이 생각보다 오래갔던 걸까. 나는 그간 몇 차례 주식투자 광풍이 불 때조차 골드러시 행렬에 끼어들길 고집스레 거부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일종의 청개구리 심보 아니었을까 싶다. 나는 적은 돈으로도 행복할 수 있다고, 누가 묻지도 않은 말을 여기저기
명상을 바라보는 내 시선은 늘 삐딱했다. 어느 정도는 악의적이었다고까지 말할 수 있겠다. 한때 전국 서점가 매대를 점령했던 이른바 ‘끌어당김의 법칙’에 매료됐다가 피를 본 피해자 호소인(?)의 치졸한 뒤끝이다.모든 게 불확실했던 수험생 시절. 오프라 윈프리도 극찬했다는 '끌어당김의 법칙'은 확실히 매력적이었다. 매일 원하는 걸 생생히 꿈꾸기만 하면 문자 그대로 온 우주가 움직여 눈앞에 대령해 준다고 했다. 나는 혈류가 막혀 저릿한 다리를 참아가며 가부좌를 틀고 앉아 원하는 걸 상상했다. 당연히 원하던 대학의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나는 제대로 살고 있는걸까. 가끔은 답도 없는, 그러나 하필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피할 수도 없는 질문에 골몰하곤 합니다.일단 매일 비슷한 시간에 일어납니다. 벌써 4년째인 재택근무를 오늘도 시작하기 위함입니다. 오후 6시쯤 근무가 끝나면 아주 늦은 점심을 차려 먹고요. 평일 점심 메뉴는 그릭 요거트 200g과 새송이버섯을 썰어넣은 왕란 후라이 2개, 단백질 파우더 30g으로 정해져 있습니다. 쉽게 살이 찌는 체질 때문에 울며 겨자먹기로 정한 식단이지만, 반복을 싫증내기보단 편안해하는 성정 덕에 그럭저럭 만족하고 있습니다.퇴근 후엔
사회면 법조 기사들의 헤드라인에서 잊을만하면 등장하는 인용 문구가 하나 있다. “영구적으로 사회로부터 격리해야”라는 표현이다. 흔히 흉악범에 대한 엄벌을 촉구하는 공판 검사의 언어이거나, 이를 받아들인 재판부의 언어로서 기사에 등장한다.사회로부터의 영구적인 격리. 특정 흉악범의 죗값에 무기징역이 충분한지 여부를 판별할 만큼의 법조 지식이 내겐 전연 없다. 그러나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그 유명한 명제에 비춰보면 사회로부터의 영구적인 격리를 ‘엄벌’로 규정하는 데에는 그리 반론이 많지 않으리라 추론한다.진짜 이상한 건 따로 있다
최근 몇 개월 간 손목시계에 빠져있다. 밥 먹을 때도, 화장실을 갈 때도 시계 리뷰 전문 유튜버들의 영상을 시청한다. 스마트폰으로 한치의 오차도 없는 시간을 즉시 확인할 수 있는 시대에 월(月) 단위, 심하면 일(日) 단위로 수초씩 시간이 늦거나 빨라지는 손목시계를 단지 예쁘다는 이유로 추앙한다니.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는다고 했나. 실용성만으로 사는 것 또한 아님이 분명하다.예쁜 것들은 그 종류도 다양하다. 다이버 시계는 터프한 외관에 가미된 한 스푼의 도시적 세련미가, 필드워치들은 샌드 블라스트로 무광 처리된 시계 외관과 작은
적대적 건축(hostile architecture) : 의도적으로 원하는 행동을 유도하는 도시 설계 전략. 빈곤층, 노숙자처럼 다른 이들보다 공공장소를 더 많이 이용하거나 의존하는 사람들을 표적으로 삼아 활동을 제한하는 경우가 많다 – 위키백과 中1.최근 ‘적대적 건축’의 개념을 배웠다. 즉각 내 머릿속엔 우리 동네 하천을 따라 신설된 기다란 벤치들이 떠올랐다. 새로 뽑은 검붉은색 합판 좌석의 매끈함과, 그 위를 촘촘히 가로지르고 있는 스테인리스 봉들의 반짝이는 완강함. 외견상 좌석 구분을 위한 설계인 듯 보이지만, 실제로 앉아본
바야흐로 이혼 전성 시대다. 일단 발이 그리 넓지 못한 내 주변에도 이혼을 경험한 친구가 벌써 둘이나 된다는 게 그 증거다. 심지어 둘 중 한 명은 벌써 새 짝을 만나 꽁냥거린지 오래다. 그러고보면 술자리에서 ‘요새 이혼이 뭐 흠인가?’ 하는 위로투의 격려를 들은지도 꽤 오래됐는데, 이혼이 정녕 흠이 아니게 된 세상에선 굳이 할 필요 없는 말이기 때문일 것이다.각종 미디어도 관련 컨텐츠를 쏟아내고 있다. 이혼 전문 변호사들이 각종 TV 예능을 종횡무진 하고, 유튜브엔 더럽고 치사한 이혼의 과정을 적나라하게 기록한 일반인들의 브이로그
“나는 다른 사람이 만들어 놓은 그럴듯한 시장조사는 믿지 않는다. 언제나 스스로 조사를 해서 결론을 낼 뿐이다” - 도널드 트럼프, 『거래의 기술』 中중고거래가 생활의 일부로 자리잡은 요즘이다. 아예 ‘이 물건을 중고거래로 판매했다’는 말을 ‘당근했다’는 표현으로 대체하는 이들까지 생겨났다. 특정 브랜드의 이름이 원래 사전에 기재돼 있던 단어처럼 쓰이면 업계를 제패한 거라던데, 당근이 꼭 그렇다는 생각이다.최근 내가 ‘당근’한 대상은 군용 필드워치의 대명사로 통하는 A사의 시계였다. 워낙 유명한 제품인데다 수년 간 아껴 차왔던 만큼
나는 괴담 마니아다. 폐모텔이나 폐병원에 자주 출몰한다는 각종 현대 귀신들은 물론, 독각귀·창귀와 같은 우리나라 전통 귀신과 일본·중국·미국 귀신 이야기까지 닥치는대로 섭렵한 나름 이 분야 고인물에 해당한다. 집에서 혼자 밥 먹을 때는 물론, 잘 때도 듣는다.혹자는 귀신보다 무서운 건 사람이라 말한다. 귀신 ‘보다’ 무서운 건 모르겠으나, 귀신만큼이나 무서운 건 사실인 듯 느껴지는 요즘이다. 그래서일까. 나는 귀신 이야기 외에도 각종 실제 사건·사고 관련 방송이나 유튜브 영상도 밥 먹듯 시청한다. 다같이 수중 동굴로 탐험을 떠났다가
“우리가 저녁식사를 기대할 수 있는 건 푸줏간 주인, 양조장 주인, 혹은 빵집 주인의 자비심 때문이 아니라 이익을 추구하는 그들의 생각 덕분이다. 우리가 바라보는 건 그들의 인간성이 아니라 자기애다” - 애덤 스미스나는 근대 경제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남자의 어록 중 가장 유명한 문장을 떠올렸다. 내 집 바로 옆 빌라의 담벼락을 들이받은 채 늙은 경주마처럼 푸르륵 거리고 있는 낡은 화물 트럭 앞에서.-나는 대로에서 날개처럼 옆으로 뻗은 고바위 위 전셋집에 산다. 3년 전, 나를 차에 태운 부동산 중개인은 언덕길을 오를 때 이래도 되나
아마 중학생 시절. 미국의 인기 대중강사라는 목사 J의 책을 읽게 됐다. 자기 자신에 대한 조건 없는 사랑과 신뢰, 긍정적인 사고를 통해 더 큰 성취를 이뤄낸다는, 전형적인 미국식 동기부여 도서였던 걸로 기억한다. 그때도 ‘근자감’(근거없는 자신감), ‘자존감’ 등의 단어가 유행 중이었다면 책 제목도 『자존감에 근거는 필요 없어요』 따위로 명명됐을지 모를 일이다.J 목사가 정확히 어떤 논리로 독자들을 설득하려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실천 강령 파트에 “기상 직후와 취침 전에 ‘나는 나를 사랑한다’는 문장을 10번씩 소리내
장장 1년 5개월에 걸친 의정 갈등이 너무 늦은 봄을 맞았다. 의대생들은 이미 복귀를 선언했고, 사직 전공의들 사이에서도 돌아가자는 목소리가 비온 다음날의 죽순처럼 튀어나온다. 대통령 또한 의대생들의 복귀 결정을 두고 “늦었지만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라며 관계당국에 후속 조치를 주문한 것으로 전해진다.돌이켜보면 말 그대로 정말 ‘말’이 많은 1년 5개월이었다. 그간 묵묵히 배우고 치료하던 의대생과 전공의들은 병원과 강의실을 비운 뒤 날선 말들을 쏟아냈고, 대체로 행정용어의 선을 넘지 않던 정부의 언어도 기어이 “처단”이라는 극단으로
내가 사는 서울시 관악구 신림동은 그야말로 헬스장들의 춘추전국시대다. 걸어서 20분 거리에 내가 아는 것만 20개에 가까운 헬스장이 난립해 있다. 이 중 내가 6년 이상 단골로서 충성해온 헬스장은 A 헬스장인데, 그 이유가 좀 독특하다. 바로 5년쯤 전 해당 헬스장 본사 측으로부터 받은 ‘사과’(謝過) 때문이다.사과하는 게 달가운 사람이 얼마나 될까. 일단 누군가에게 사과를 해야 할 상황이 벌어졌다는 사실 자체가 몹시 괴롭다. 내 책임이 아닌 일로 사과를 해야 할 땐 짜증이 솟구칠 것이고, 변명의 여지없이 내 책임인 일로 사과할 땐
정치 관련 기사 댓글창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단어가 있다. 특히 유력 정치인이 호국·민주화 영령 앞에 엄숙히 묵념했다거나, 산불 이재민의 손을 맞잡고 애끓는 호소를 경청했다는 내용의 기사 댓글창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단어다. 바로 ‘쇼’(Show)다.“저건 다 쇼”라는 비아냥이 암시하는 바를 풀어보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정치인들의 묵념이나 시장 유세와 같은 행위는 형식일 뿐, 진심은 들어있지 않다. 쇼를 통해 바꿀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따라서 정치인이나 정부가 벌이는 쇼는 지지율 제고를 위한 세금 낭비에 불과하다.유권자
언론 기사들을 읽다보면, 선뜻 이해되지 않는 표현에 시선이 붙들리곤 한다. 예컨대 ‘헤어지자 요구하는 여자친구의 직장에 수차례 찾아가 스토킹한 50대’ 등의 표현이 그렇다. 헤어지자 요구하는 여자친구라니? 그럼 이별을 통보당한 후부터 범행하는 시점까지 가해자는 아직 피해자의 연인이었다는 뜻인가. 연애라는 계약의 파기 시점은 대체 언제인가.연애의 시작엔 당연히 상호간의 동의가 필요하다. 오늘밤도 숱한 남성들과 적지 않은 여성들이 연모하는 상대방의 동의를 이끌어 내고자 잠 못 이루는 이유다. 상대방의 동의 없이 일방에 의해 정의되고 선
커다란 운동장 한가운데에 100명이 될까 말까한 규모의 초등학생들이 도열해 있다. 긴 줄에 내걸려 나부끼는 만국기와 색깔별 단체복을 차려입고 선 아이들의 행색으로 미루어볼 때 기다리고 기다리던 운동회 당일이다. 운동회 시작 직전, 아이들은 마이크를 쥔 어른의 선창에 따라 합창하듯 큰 소리로 주변 민가들을 향해 외친다.“죄송합니다(죄성합니다아~~) 저희들(저희드을~~) 조금만(쪼금마안~~) 놀게요(놀께요~~)”이는 약 1개월 전 SNS상에서 화제가 됐던 짧은 영상의 내용으로, 촬영자는 운동회에 참여한 아이 중 한 명의 학부모였다. 해
살다보면 ‘자격’이라는 게 문제될 때가 생각보다 많다. 앞서 유명을 달리한 MBC 기상캐스터 고(故) 오요안나씨의 사례만 봐도 그렇다.격분한 여론에 떠밀리듯 조사에 나선 노동당국은 고인이 직장 선배들로부터 괴롭힘을 당한 사실을 인정하는 동시에 그가 근로기준법상 근로자는 아니라고 판단했다. 프리랜서인 고인은 근로기준법상 근로자가 아니므로, 같은 법에 명시된 직장 내 괴롭힘 관련 규정의 적용 대상도 아니라는 논리다. 직장 사람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다 죽은 건 맞지만, 직장 내 괴롭힘은 아니다.이쯤되면 나도 내가 무슨 말을 쓰고 있는건지
국민(國民) : 국가를 구성하는 사람. 또는 그 나라의 국적을 가진 사람초등학생 시절, 멍하니 뉴스를 보다 대뜸 엄마에게 물었다. 국민이 뭐냐고. 저녁 준비로 바쁘던 엄마는 사전적 정의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답변을 해줬다. 엄마와 나, 그리고 길거리서 마주치는 모든 사람이 전부 국민이라는 꼬맹이 맞춤형 설명까지 곁들여서.“근데 갑자기 그건 왜? 학교 선생님한테 국민이 뭔지 안 배웠어?”“배웠지. 근데 저 사람이랑 저 사람은 왜 국민에 대해 말하는 게 달라?”당시 내가 보던 뉴스 속에선 여야 각 대표들이 연단에 올라 ‘국민 여러분!
삶이 유독 내게만 모질다 느껴지는 날엔 유튜브에 접속합니다. 불치병·시한부 환자, 가정폭력 생존자, 고액 임금체불 피해자 등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나 브이로그, 강연을 시청하기 위함입니다. 이름과 성별, 사연 전부 제각각인 이들을 아우르는 공통점은 단 하나, 그날의 나보다 압도적인 불행에 처해 있다는 점 뿐입니다.고통을 대하는 개개인의 반응은 생각보다 다양합니다. 한 젊은 암환자는 악화일로를 걷는 병세를 영상에 소상히 담아내면서도 자막으론 끊임없이 농담을 해댔고, 이제 아빠가 된 가정폭력 피해자는 연단에 올라 자신의 과거를 토대
얼마 전 한 지인이 링크를 하나 보내왔다. “이거 너 문체랑 비슷하더라”라는 짤막한 메시지와 함께였다. 클릭해보니 생성형 AI가 썼다는 칼럼이었다. 일단 제목부터 ‘작가의 밥줄은 어디까지일까’였다. 문장을 따라가다 보니, 정말 내가 쓴 칼럼이 아닌가하는 착각까지 들었다. 잠깐, 이건... 나 아닌가?위 글의 작성자는 내가 아닌 챗GPT(이하 AI)다. 나는 AI에게 △스스로 가장 나답다고 여기는 칼럼 3편을 읽히고 △문체·주제 의식·주요 감정 등의 특성을 전부 분석하도록 시킨 뒤 △‘작가로서 AI의 발전을 바라보며 느끼는 밥벌이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