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이란 상대적인 것이라 했다. 주식 투자자들의 프리미엄 친목회에 참석하는데만 수십만원을 냈다던 그가 몇 년전 술자리에서 불콰해진 얼굴로 했던 말로 기억한다. 내 돈을 은행에 차곡차곡 쌓아놔도, 다른 사람들이 더 많이 벌면 나는 가만히 앉아서 상대적 거지가 되는 거라고.
그때 떨어진 술맛의 뒤끝이 생각보다 오래갔던 걸까. 나는 그간 몇 차례 주식투자 광풍이 불 때조차 골드러시 행렬에 끼어들길 고집스레 거부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일종의 청개구리 심보 아니었을까 싶다. 나는 적은 돈으로도 행복할 수 있다고, 누가 묻지도 않은 말을 여기저기서 주워섬기고 다녔다. 그러나 이 다분히 철학과 출신다운 객기는 세파 앞에선 무력했고, 나는 언젠가부터 청춘이란 단어를 쉽게 입에 올리지 못하게 됐다. 작가 김연수의 말처럼, 이제 내 청춘의 절정도 지나간 셈이었다.
처음 진입한 주식시장은 별천지였다. HTS 화면엔 다 셀 수도 없는 숫자들이 열거돼 있었고, 그마저도 초 단위로 오르고 내렸다. 이 숫자가 실시간으로 변한다는 건 주식을 사든 팔든 뭔가 거래가 체결됐다는 뜻으로, 매순간 무수한 이들이 더 많은 돈을 벌고자 치열한 각축전을 벌인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이제 청춘이 아닌 나는 금세 이 치열한 전장의 논리에 익숙해져 갔다. 벌면 옳은 거고, 잃으면 틀린 거다.
A사의 주가는 내가 산 첫날에만 n만원을 급등하며 붉은색 장대 양봉을 그렸다. 월급을 하루치로 환산한 것보다 많은 돈을 단 두어 시간만에 번 것이다. 이 돈을 어디에 플렉스하면 좋을까. 왜인지 이제부턴 뭔가 그럴듯한 삶을 살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바로 다음날 A사의 주가가 n% 급락해 내 차트창에 서슬퍼런 고드름이 맺히기 전까진 말이다.
언젠가부터 잊고 있었다. 본디 내게 돈이란 몹시 귀한 무언가였다. 고통스러운 생업의 전장에서 쟁취해낸 이 돈으로 누군가는 연인이 좋아하는 가게의 마카롱을 사고, 언 몸을 녹일 소주와 뼈다귀 해장국을 주문하고, 분유를 사서 내 새끼에게 개어 먹인다. 이같은 행위를 가치 있다고 말할 때 그 근거는 오직 생업으로 돈을 버는 일의 고통스러움일 것이었다.
만약 내게 다음 날 장대 양봉을 그릴 주식만 족집게처럼 집어내는 능력이 있다면 어땠을까. 정말 많은 돈을 쉽게 벌었겠지만, 내가 물처럼 쓸 그 돈과 소비가 가치 있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는다. 개업식에서 받은 공짜 캔디는 버스 옆자리 승객에게도 아무렇지 않게 권할 수 있는 법이다.
내게 주식에 관한 천부적인 재능이 없다는 점은 분명해졌다. 물론 차트의 전장에서 몇 년쯤 구르다보면 남보다 많이 벌고 적게 잃는 요령을 알게 될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그때까지도 나는 돈의 귀함을 기억할 수 있을까. 부디 그런 어른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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