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객칼럼=곽진학]지루한 장마가 계속되던 어느 날, 초췌하고 야윈 한 노인이 긴 병원 복도를 힘겹게 걸어가고 있었다. 중증질환자로 진단을 받아 무서운 터널 속의 검사를 받기 위해 힘든 걸음을 옮기던 그는 이제 영혼마저 잿빛으로 시드는 자신을 발견하였다. 창밖에는 여리고 잔잔한 빗물이 빛과 어둠을 헤매고 있었고 갑자기 쏟아진 천둥 같은 통곡은 절망에 갇힌 내 가슴을 요란스럽게 두드렸다.나는 누구며 이 순간 나는 어디로 걸어가고 있는 것일까?허공을 가로질러 칠흑 같은 미로를 찾아 헤매는 이는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나 자신이었다. 생명
[오피니언타임스=곽진학]나는 재학생수가 1백오십여 명 남짓한, 막 설립한 시골 사립중학교를 다녔다. 가난한 농촌이라 월사금을 제 때에 또박또박 납부하는 학생은 불과 이삼십 여명 밖에 되지 않아 학교재정이 어려운 때문인지 선생님은 얼굴 익힐 만하면 늘 바뀌곤하였다.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늦게 입학한 동급생 중에는 나이가 나보다 여섯 살이나 많은 친구도 더러 있어 젊은 선생님들은 그 학생들을 대할 때 무척 어색해하고 조심스러워 했다.내가 졸업한 초등학교(전체 졸업생 28명)에서 중학교로 진학한 친구가 10명 미만이었으니 당시 농촌의 피폐한 삶
[논객칼럼=곽진학] 봄바람이 여울져 흐른다. 따뜻한 햇살이 그늘진 골목을 찾아 나서고 안산(鞍山)언덕에 핀 샛노란 개나리가 온 산을 곱게 채색해 간다.어쭙잖은 내 글을 읽은 소꿉친구가 30년 만에 소식을 전해 왔다. 글을 쓴다는 것은 양지 바른 곳에 빨래를 말리는 것처럼 자신을 바깥에 다 내놓는 일인가 보다. 정직하게 투영(投映)하지 않고는 글 한자도 옮길 수 없겠다.“글이 곧 그 사람이다(文如其人)”라는 말이 있다. 글을 보면 그 사람의 삶과 존재를 읽을 수 있다는 의미이다. 글에도 생명이 존재한다. 굴절과 왜곡을 배제하고 진실과
[오피니언타임스=곽진학] 사람은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가끔 뒤를 돌아보게 된다.세월이 눈썹에 하얀 안개를 덮는 절망의 시간에는 아득한 그리움이 한 여름의 뭉개구름처럼 솟아오른다. 세월은 추억과 애절함의 흔적이다. 개구리가 잠에서 깨어난다는 경칩, 우수와 경칩이 되면 새싹이 돋아나고 옛날 고향마을에서는 농사철 준비로 한참 채비를 할 때다.다들 건강하지? 여기는 모두 잘 지내고 있다. 이곳에 사업하는 분들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하는데 너희들 사정은 어떤 줄 모르겠구나.내 용돈을 보내고 싶다며 전화를 주었을 때 선뜻 내키지 않아 무척 망설이
[오피니언타임스=곽진학] 한가롭기만 하던 냇물이 몸을 풀고 달음박질하듯 달려가고 소들이 평화롭게 풀을 뜯던 방천(防川)에도 새싹이 드문드문 고개를 내밀었다.꼬불꼬불한 논과 밭 이랑사이로 푸석한 먼지만 일렁이는 가난한 농촌 마을, 소문난 과일 하나 나지 않고 오직 벼와 보리만을 생명처럼 가꾸고 살았던 초라하고 삭막한 벽촌, 아버지와 어린 아들이 꽃 속의 바람처럼 먼 신작로를 걸어가는 모습은 신비로운 사랑의 북소리 같았다. 난생 처음 아버지 따라 읍내 장터로 향하는 어린 아들의 마음은 마냥 기쁘고 하늘을 날듯이 즐거웠다. 어찌 아들뿐이랴!
[오피니언타임스=곽진학] 봄을 이기는 겨울은 없나보다. 깊은 계곡마다 잔설(殘雪)을 숨겨 두었지만 봄은 이미 우리 곁에 서성이고 있다. 저만치 묻혀 진 겨울이 서러워 왜가리 한 마리가 빈 들녘에 서서 잿빛 하늘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다. 멀지 않아 황량한 나무 가지에는 새 순이 돋고 강변의 버들강아지도 하아얀 솜털을 내밀며 겨울잠을 털고 화려한 외출을 하리라.2월은 겨울에서 봄, 죽음에서 부활로 잇는, 가고 오는 세월의 모습을 침묵하며 서 있지만 찬란한 3월의 향연을 기대와 희망으로 기다린다. 겨울이 지나면 봄
[오피니언타임스=곽진학] 산비탈의 그늘진 응달에는 두터운 고드름이 여기저기 희끗희끗 흩어져 있다.소한이 지나고 음력 설이 다가오는 이 시간, 봄의 그리움은 벌써 우리 곁에 서성이고 있지만 아직도 매정한 찬바람이 겨울을 품에 안고 놓지 않고 있나 보다.황량한 칼바람만 일렁이는 산기슭에는 모진 겨울을 이겨내야 할 생명들이 따스한 봄날의 햇살을 손짓하며 재촉하고 우리들의 곤고한 삶속에도 무지개 앞에 가슴 뛰던 노령의 워즈워드처럼 희망의 새 생명은 자라고 있다. 잎이 진 나목 한 그루가 새 싹을 소망하며 찬 겨울을 맨 몸으로 홀로 견디고, 동토
[오피니언타임스=곽진학] 성탄절과 년 말, 이 맘 때면 누구나 그 장엄한 “헨델의 메시아”를 한 두 번은 듣곤 한다. 헨델의 메시아는 그리스도의 탄생과 수난, 그리고 부활을 노래한 오라트리오이다.헨델은 영국과 유럽에서 온갖 명성을 다 누렸던 당대의 뛰어난 작곡가이다. 새로운 곡이 발표될 때마다 많은 사람들이 갈채를 보내고 영국 왕실에서도 최고의 영예를 안겨 주었다.1741 겨울, 음산한 런던 거리 한 모퉁이에서 지친 다리를 끌며 꾸부정하게 굽은 허리에다 심한 기침으로 걷던 길을 자주 멈추어야만 했던 초췌한 한 노인이 있었다. 실의와 절망
[오피니언타임스=곽진학] 세월은 가고 오지만 바람처럼 흩어져버린 시간들을 생각하면 아쉽고 허탈하기만 하다.차가운 바람이 대지를 휩쓸고 있는 12월, 한 해의 끝자락에 서서 지난 세월을 뒤돌아본다.걸음마를 배우던 세 살의 나이에 광복을 맞았지만, 해방의 기쁨을 알리 만무했고 6.25 동족상잔의 참혹한 광경도 어렴풋이 기억되기는 해도 여덟 살의 미명(未明)의 나이라 피난민들과 섞여 살았으면서도 그들의 삶이 얼마나 처참한지 가늠할 수 없었다. 4.19와 5.16을 거쳐 10.26의 변란과 군사문화의 종식에 이르는 험난한 과정, 감히 상상도 못
[오피니언타임스=곽진학] 며칠 전 집수리를 한다고 하여 집에서 키우던 강아지 조이를, ‘맡아서 보호해 주는 곳’에 맡기고 왔다. 조그만 방들 안에 몸집이 큰 개도 있었지만 나머지는 올망졸망 앙증스러운 강아지들이었다. 우리 조이는 보기와는 달리 몹시 겁이 많다. 그 어미가 유기견이라 ‘풍찬노숙’도 하고 여기저기 숨어다니기도 하며 살아남았을 것이다. 험상스러운 사나운 개들과 굶주린 고양이들의 위협 앞에 어떻게 견디었을까? 긴장도 하고 두려워했을 것이다.그 때문인지 조이는 두 살이 다 된 지금도 횡단보도에 서면 달리는 차들이 무
[오피니언타임스=곽진학] 쿠바에 여행을 가면 암보스 문도스 호텔에 묵고 싶다.헤밍웨이가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를 집필한 511호 방을 찾아보고 싶어서이다. 20세기 최고의 작가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노인과 바다’로 더 유명하다.누에가 고치 안에서 신비스러운 변신 끝에 나비가 되듯이 평범한 한 인간이 자신만의 가치를 지닌, 거듭난 새로운 인간을 찾는 과정을 그린 소설이다. 84일 간이나 한 마리의 물고기도 잡지 못한 어부 산티아고는 이 절망과 위기의 순간에 그 깊고 험한 걸프 해안까지 망망대해 끝으로 자신을 시험하는 놀라운 선택을
[오피니언타임스=곽진학] 조이는 우리 집 강아지 이름이다. 딸이 상하이에서 살다 오면서 데리고 왔다.길가에서 해산(解産)하고 있던 개를 발견한 어느 착한 분이 동물병원에서 무사히 출산시킨 뒤 딸에게 키워보라며 ‘억지로’(?) 맡긴 강아지이다.아내는 물론 나도 강아지는 내키지 않아 그곳에 두고 오길 바랐지만, 손자들이 울고불고하여 데리고 왔을 것 같아 싫은 내색을 차마 하지 못했다.환경이 낯설어 오자마자 여기저기 배변을 하며 무척 성가시게 하였으나 여섯달이 막 지난 강아지가 낯선 이국 땅에서 겪어야 할
[오피니언타임스=곽진학] 내가 살고 있는 서울 서대문에서 큰 길을 건너면 안산에 이르는 길에 바로 닿는다. 안산은 높이가 295.9m로 인왕산에서 서쪽으로 뻗어 무악재를 이루고 조선건국 초기 도성 터로 거론될 만큼 명산이다.안산은 말이나 소의 안장과 같이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영조가 무악재 고개를 넘을 때마다 아버지 숙종의 명릉(明陵)을 바라보며 그 생전을 추억했다 하여 추모재라고도 불린다.몇년 전 구청에서 새 길을 내어 바닥에 나무를 깔고 목책을 세워 편안한 자락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