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부쩍 챗GPT가 나의 일상을 침투하고 있다고 느낀다. 바로 민원인과 대화를 할 때다. 우리 기관에 방문한 민원인이 담당자인 나보다 챗GPT를 더 신뢰하기 때문이다. "A를 신청하려면 B를 제출하셔야 해요."라고 설명하면 "챗GPT는 C만 있으면 된다고 하던데요?"라고 답하는 식이다.예전에는 5분이면 끝날 일이 10분, 20분이나 걸리는 이유다. 챗GPT로부터 잘못 안내받은 내용을 하나하나 정정해주느라 불필요한 시간소모가 늘었다. 나를 못 믿겠다며 눈앞에서 챗GPT에게 다시 질문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오픈AI CEO를 찾아가
작년 이맘때였나. 회사 선배랑 점심을 먹다가 선배의 아내분이 임신했다는 이야길 들었다. 워낙 오래 노력했다는 걸 알아서 진심으로 축하 인사를 드렸다. 그리고 선배도 육아휴직 생각이 있는지 물었는데 의외의 반응을 보였다. 기자회견에서 마약 루머가 사실이냐는 질문을 받은 스포츠 스타처럼 당황해하는 것이다. 난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몇 주 전, 난임병원에서 우리 아이의 심장 소리를 처음 들었다. 3센티도 되지 않는 녀석의 심장이 어찌나 우렁차게 뛰는지 아내 몰래 눈물을 훔쳤다. 감격 이후 떠오른 건 선배와의 대화였다. 내 일이 된다고 생
서울 반포동에서도 가장 비싼 아파트로 유명한 원베일리에서 결혼정보업체를 차렸다고 한다. 이 아파트에서는 일명 원결회(래미안원베일리 결혼정보모임회) 주관으로 아파트 입주민끼리 단체 소개팅을 갖곤 했는데, 최근 11호 커플이 결혼식을 올리는 등 상당한 인기를 자랑했다. 이 기세를 몰아 ‘원베일리 노빌리티’라는 법인을 설립하고 본격적으로 결혼정보 사업을 시작한 것이다.학력, 직업, 소득 등을 꼼꼼하게 따져 회원을 선별적으로 받는 것이 원칙이라고 한다. 원베일리 안에서 ‘그들만의 리그’를 구축해온 노하우를 살려 앞으로도 상류층끼리만 매칭한
지금 방영 중인 드라마 서초동의 주인공은 변호사들이다. 변호사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선망받는 전문직 중 하나다. 거기에 비주얼 배우로 유명한 이종석과 문가영이 나온다길래, 치열한 법정공방이 이어지는 드라마 아닐까 생각했다. 전문성으로 무장한 카리스마 넘치는 변호사들의 이야기를 예상했다.막상 시작된 드라마에는 엘리트 변호사 대신 평범한 직장인이 등장한다. 하기 싫은 일도 해야 하고, 인성이 개차반인 직장상사를 견뎌야 하는 직장인 말이다. 퇴근 뒤 맥주를 마시며 스트레스를 푸는 모습은 바로 어제의 나의 모습이었다. 먼 곳에서 나와 다른
인사발령의 시즌이 돌아왔다. 순환 근무가 원칙인 우리 회사는 7월과 12월마다 인사이동이 뜬다. 보통 2년에 한 번 부서를 옮기기 때문에 많은 직원이 긴장하는 시기다.언젠가 직장인에게 가장 큰 스트레스를 주는 원인 중 첫 번째가 인사이동이라는 설문조사를 본 적이 있다. 부서가 바뀌면 일을 새로 배워야 해서 처음 몇 달은 신입사원으로 돌아간 기분이 든다.진짜 신입사원이라면 실수가 어느 정도 용납된다. 하지만 어느 정도 연차가 쌓인 상태라면 주변의 기대치가 다르다. 더 빨리 적응해야 한다는 압박감은 또 다른 실수를 유발한다. 만약 나뿐
선거일 아침, 투표소에 가는 대신 공원에 나갔다. 이른 아침부터 많은 사람이 저마다의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 사이좋게 달리는 MZ커플도 보이고, 멈춰 서서 길가에 핀 꽃 사진을 찍고 있는 아주머니도 보였다. 커다란 나무 그늘 아래 벤치에는 어르신 한 분이 한가로이 책을 보고 있었다. 새들은 지저귀고 하늘은 푸르렀다.이 평화로운 광경을 보며 느낀 감정은 위화감이었다.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과열된 분위기로 한껏 피로감을 느끼던 차였다. 온갖 어지러운 소식과 날 선 말들로 가득한 세상에서 갑자기 다른 세계로 넘어온 느낌이었다.계엄령부터
최근 부동산카페에서 핫이슈가 된 글이 있다. 대치동 유명 수학학원을 아동학대로 인권위에 접수했다는 내용이다. 그 학원은 수학 학원계의 에르메스라고 불리며, 초등 의대 입시를 위해 거치는 관문으로 알려진 곳이었다.글쓴이는 해당 학원이 아이들에게 정서적 학대를 자행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초등학생 수준에 맞지 않는 어려운 문제를 출제해 스스로 부족하다는 자의식을 심어주고, 등급제를 도입해 친구들 사이에 급을 나누는 분위기를 만든다는 것이다.또한, 테스트 결과에 따라 학원에서 퇴출하는 시스템이 과도한 압박감과 스트레스를 주고, 정확한 하원
직장생활 10년 차가 되니 주변에 집을 가진 사람이 늘어났다. 몇 명은 결혼하면서, 몇 명은 아이를 낳을 즈음 집을 샀다. 청약에 당첨된 동기도 있고, 싱글인데도 고양이와 함께 살겠다며 집을 산 친구도 있다.서울에 아파트를 장만했다는 건 그만큼 많은 걸 포기했다는 의미다. 계약금과 중도금을 마련하기 위해 먹고 싶은 것과 입고 싶은 걸 참으며 살아왔을 텐데, 주택담보대출 원리금을 갚으려면 이제 인간관계와 문화생활까지 줄여야 한다.작년 말 기준 서울아파트 중위가격은 9억 8333만 원으로 10억 원에 가깝다. 10억 짜리 집을 산다고
인사팀에서 일한 지 2년이 지났다. 처음 발령공고가 났을 땐 의아했다. 순환근무가 일상인 공공기관이라 이동발령은 놀랍지 않았다. 스스로 인사팀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업무가 맞고 안 맞고의 문제는 아니다. 회사를 대하는 태도에 관한 문제였다. 내가 생각한 인사팀은 회사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가는 곳이었다. 회사에 대한 프라이드가 몸에 박혀 있고, 조직의 이익을 위해 한 몸을 기꺼이 희생하는 사람들 말이다. 실제로 날 제외한 다른 부서원들은 그랬다.한 번은 차장이 최근 있었던 인사이슈 때문에 주말 내내 잠도 못
시험관 시술을 시작했다. 1년 가까이 자연임신을 시도하다 고심 끝에 결정한 일이다. 그러나 난자채취 다음 날 우린 이 결정을 바로 후회했다.난자채취 과정이 힘들다는 얘긴 많이 들었다. 사람마다 편차가 크다니까 우린 괜찮겠거니 생각한 게 실수였다. 아내는 난소과자극증후군으로 배가 심하게 붓고 복수까지 찼다. 통증과 구토감으로 1주일 넘게 잠도 못 자고, 음식도 거의 못 먹었다.그나마 직장이 공공기관이어서 휴가를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이 다행이었다. 아내는 유급 난임 휴가 2일에 더해 증상이 심한 날에는 연차도 사용했다. 나 역시 수시로
마포에서 홍어 삼합을 먹었다. 그동안 내가 먹어온 홍어는 홍어가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됐다. 강렬했다. 대만에서 도전했던 취두부의 풍미가 떠오를 정도였다. 취두부는 입에 들어가기 직전이 절정이라면, 홍어는 씹으면 씹을수록 코를 진하게 적신다는 점이 달랐다.같이 홍어집에 간 이들은 첫 직장 동기다. 회사는 겨우 2년을 다녔는데 동기들은 10년째 만나고 있다. 모쏠이었던 형은 가장 먼저 결혼해 아이가 둘이나 있다. 어떤 동기는 경쟁사로 이직하고, 어떤 동기는 공기업으로 이직했다.'동기' 대신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건 이들이 마지막이
우리 부부는 내년에 갈아타기를 준비하고 있다. 메인 타겟을 정한 뒤에도 더 나은 곳은 없는지 매주 임장을 다닌다. 지금까지 추려진 후보군을 보면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모두 교육환경이 좋은 곳이다.우리 부부는 학군지라고 말하기 어려운 곳에서 자랐다. 특히 난 교육으로는 명함을 내밀기 어려운 인천에서도 열악하기로 유명한 학교를 나왔다. 화장실엔 항상 담배를 피우는 아이들이 있고, 대학교 수시를 쓰는 대신 수시로 맞짱을 뜨는 곳이었다.방과 후에는 학원을 가기보다 노래방과 피씨방에 가는 친구들이 많았으니, 그야말로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게
회사에서 가입한 동호회가 딱 하나 있다. 바로 독서동호회다. 회원들이 돌아가면서 책을 추천하고, 다음 모임 때 감상평을 공유하는 방식이다. 점심시간에만 모이기 때문에 술자리가 없는 유일한 동호회다.저번 모임에는 내가 추천한 책이 선정됐다. 김애란 작가의 이었다. 일 년에 한 번은 다시 읽는 최애 책이다. 사실 이 책을 추천목록에 넣을지 말지 망설였다. 회사에 사적인 나를 드러내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냥 적당한 베스트셀러로 채울까 한참을 고민했다.세 번의 직장을 거치며 회사에선 개인적인 이야기를 거의 안 하게 됐다. 마음을
안방 도배를 직접 했다. 벽지가 올드한데다 여기저기 들뜬 상태였다. 언젠가 갈아엎겠다고 벼르던 참에 재고 벽지를 싸게 파는 곳을 찾았다.화이트 실크벽지와 초배지, 풀, 본드를 주문했다. 그리고 창고 구석에 고이 모셔놓은 장비를 꺼냈다. 작년 도배학원에 다닐 때 사놨던 아이들이다.다음 할 일은 안방 비우기였다. 화장대와 장롱을 낑낑대며 작은방으로 옮겼다. 매트리스까진 거실로 뺐는데 프레임은 도저히 옮길 수가 없었다. 비닐로 보양하고 작업하기로 했다. 남은 날은 도배사들의 유튜브와 블로그를 보며 공부했다.대망의 토요일 아침, 아내와 난
오랜만에 청첩장을 받았다. 대학시절 같이 취업준비를 하던 동기였다. 결혼에 관해 잊지 못할 말을 남겼던 친구라 다소 뜻밖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언젠가 결혼을 하게 되면 고아랑 하고 싶다는 얘기였다.워낙 극단적인 표현에 처음엔 무슨 말인가 싶었다. 이유인즉슨 이랬다. 항상 가족과 엮이는 순간 연애가 안 좋게 끝났다는 것이다. 동기는 잘 나가는 외국계 대기업에 입사했다. 성격도 좋고 외모도 수려했다. 내가 보기엔 항상 건강한 연애를 했다.결혼의 문턱에서 매번 고배를 마신 건 상대방 부모님과의 갈등이 '예상'되어서였다. 둘일 때 마주한
내겐 여러 개의 이름이 있다. 평일 9-6 에는 본명으로 산다. 회사에서 크게 모난 데 없이, 적당하게 열심히 일한다. 퇴근 뒤에는 남편이 된다. 아내보다 퇴근 시간이 30분 빨라 저녁준비는 내 몫이다. 청경채 된장국을 끓이고, 본가에서 얻어 온 돼지 주물럭을 볶다 보면 아내가 도착한다.저녁식사 후에는 논객닷컴과 브런치에 칼럼을 쓰는 고라니가 되었다가, 부동산 투자 포스팅을 올리는 공인중개사 블로거가 되었다가 한다. 재작년에는 방통대 법대생이기도 했고, 작년엔 도배를 배우는 도배실습생이었다.처음엔 단지 견디기 위한 목적이었다. 애정
출근 전 샤워를 하는데 갑자기 숨이 턱 막히며 호흡이 어려워졌다. 가슴과 등에는 극심한 통증이 느껴졌다. 단순한 월요병이 아니라는 확신에 식은땀이 흘렀다. 혹시 심장에 문제가 생겼나 싶으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발가벗은 채로 쓰러지면 큰일인데. 빨리 옷부터 입자."하루가 지난 지금 옆구리에 흉관을 삽입하고 병원에 누워 있다. 다행히 심장엔 이상이 없었고 기흉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가슴에 차 있는 공기를 빼내면서 폐에 생긴 구멍이 아물길 기다리고 있다.생전 처음 겪는 고통에 머리가 하얘지는 경험을 했지만, 상상했던 최악의 상황은 면
뜬금없이 친구에게 이혼 소식을 들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냐는 말에 묵묵부답이다. 평소 결혼생활이 힘들다거나 아내에 대한 푸념을 늘어놓은 적도 없는 친구였다. 둘이 충분히 이야기하고 내린 결정이라며, 그 과정을 동네방네 떠들고 싶지 않았다고 했다.장밋빛 결혼생활이 없다는 건 나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살면서 겪은 희로애락의 절반 이상은 결혼 이후에 경험했으니까. 혼자일 땐 맞닥뜨리지 않아 연습해본 적 없던 새로운 국면들에 우린 서툴렀고, 그때마다 여러 가지 감정에 사로잡혔다. 기쁨과 즐거움은 즐기면 됐다. 문제는 슬픔과 노여움이었다.
장례식장에서 때아닌 웃음이 터졌다. 강남에 갔다가 어떤 매장에서 말 한 마리가 학대당하는 걸 보고 마음이 안 좋았다는 작은삼촌의 이야기 때문이었다. 요즘도 그런 곳이 있냐며 다들 핸드폰을 검색했고, 알고 보니 탬버린즈 매장에 홍보용으로 전시된 말 모형을 보신 거였다.아내의 외할머니께서 설 연휴가 시작되기 전날 돌아가셨다. 부랴부랴 밤 버스를 끊고 내려가 장례식장에서 명절을 보냈다. 명절이어서 조문객은 많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모여 앉아 가족끼리 술잔을 기울이는 분위기가 됐다.결혼한 지 4년이 지났지만, 아내의 친척들과 제대로 이야기
내겐 열등감이라는 오래된 친구가 있다. 평소에는 뭘 하고 지내는지 잊고 살다가, 어쩌다 연락이 닿으면 지지고 볶고 싸우는 친구다. 그때마다 다신 보지 말자고 절교를 선언하지만, 어느새 다시 나타나 하이에나처럼 내 곁을 빙빙 돈다.솔직히 말하면 이 친구에겐 신세 진 게 많다. 날 떠나지 않고 주변을 맴도는 건 그래서인지 모른다. 아쉬울 때 또 자길 찾으리라는 걸 알기에, 언제까지 버티는지 보겠다며 기다리는 것 같다.고등학교 땐 나보다 성적이 좋은 짝꿍을 이기기 위해 놈을 이용했다. 짝꿍은 운동도 잘하고 잘생겼는데 공부까지 잘했다.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