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일이든 꾸준히 이어가면 그 자체로서 큰 힘을 발휘하는 듯하다. 진로가 훤히 보이는 알려진 일이든, 그렇지 않은 일이든 말이다.지금으로부터 약 10여 년 전, 아프리카TV(현 SOOP)에서 스타 프로게이머들의 방송을 즐겨 보던 때가 있었다. 당시에는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이 활성화되어 있지 않았던 터라 국내에서 라이브 방송은 아프리카TV가 대세였다. 나는 초등학교를 들어가기 전부터 스타크래프트를 좋아했었고, (물론 이때는 삼촌들 곁에서 구경만 해도 아주 좋았다. 7살의 고사리 손으로 하기에는 스타는 너무 어려운 게임이었다)20
누구나 살아가다 보면 인생의 중요한 분기를 만나게 된다.한 걸음 더 가볼 것인가?여기서 멈출 것인가?다른 길로 우회할 것인가?현재의 선택이 꽤 많은 걸 좌우하겠다는 실감은 있지만, 그 선택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를 예측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그래서 선택이 참 어렵다고 하는 듯하다.프랑스의 실존주의 작가 장 폴 사르트르는 "나는 언제나 선택할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선택을 하지 않은 것도 선택이라는 사실을 항상 의식해야 한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어느 한쪽을 적극적으로 택하는 것도 선택이지만, 어느 한쪽을 택하지 않는 것도 선택이라는
삶은 연극처럼 장과 막이 명확히 구분되어 있진 않지만, 살아가다 보면 인생에도 맺고 끊음이 있다는 걸 누구나 알게 된다.아직 지난 챕터의 연장선에 있는 것 같지만,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는 실감이 든다면 아마 그 분기점에 와 있다는 방증일 터다.그러한 순간에는 지나간 것들에 대한 아쉬움, 당장 피부에 와닿는 혼란스러움, 곧 다가올 것들에 대한 두려움 등 복합적인 감정이 들겠지만, 우리의 숙명은 어찌 됐든 한 걸음씩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유한한 시간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인 이상 별 수 없는 일이다. 온
무언가를 곧잘 하기 위해서는 일단은 그것을 꾸준히 해나가는 과정이 중요하다. 그것도 꽤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부단히.하지만 정말로, 정말로, 무언가를 오랫동안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극도의 즉흥적인 P로 대표되는, 이른바 나 같은 인간들이다.매번 해야 할 일들을 차곡차곡(혹은 뒤죽박죽) 쌓아놓은 다음, 데드라인을 코앞에 남겨놓고 그제야 울면서 손을 댄다. 그렇게 극한의 스트레스 속에서 얼마간 어찌저찌 해내고 나면, '역시 나야' 하며 뿌듯해하는 답도 없는 인간들. 그런 즉흥적인 존재들이 이 세상에는 꽤 많다.벼락치기가 효율이
최근 이탈리아 피렌체에 다녀왔다. 영화 로 세계적인 인기를 얻은 이곳은 도시 곳곳에 오래 묵은 낭만이 가득하다.태양이 내리쬐는 피렌체 대성당 앞을 거닐 때에도, 더위가 물러간 베키오 다리에서 노을을 바라볼 때도, 우연히 들어간 골목 풍경에 잠시 머리가 텅 비워질 때에도, 그 낭만을 느낄 수 있다.과거의 영광에 뿌리를 두고 있는 진한 낭만은 때로 미래를 향한 발걸음을 더디게 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이 도시가 가진 매력이 이 낭만에서 비롯된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울퉁불퉁한 중세의 돌바닥, 오래전에 지어
최근 글쓰기가 참 어려웠다. 누군가가 신체를 옭아 매는 것도 아닌데 마음이 잘 잡히지 않았다. 글을 쓰는 일이라는 게 참 그렇다. 언제나 내 마음 같지 않다. 뭔가 대단한 걸 쓰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마음속 자그마한 추 하나가, 어떨 때는 몇십 킬로짜리 모래주머니처럼 느껴진다. 글쓰기란 마음을 재료로 삼는 탓이다. 마음 하나로 뭐든 써 내려갈 수 있지만, 마음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못하기도 한다. 변덕스러운 마음이라는 녀석에 좌고우면하게 된다니, 글쓰기란 건 참 업으로 삼기 힘든 일이다.한때 꾸준히 글을 쓰기 위해선 나에게 무엇이
나는 콘텐츠 제작업에 종사하고 있다. 한때 소설가가 되고 싶어, 괜한 글을 주야장천 써대던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20대에 좋은 작품을 써서 등단에 성공한 여러 작가와 달리 나는 실패했다. 그리고 취업을 선택했다. 꽤 흔한 이야기다.그래도 글을 아예 놓진 못했던 것인지 잡지사와 언론사에서 몇 년간 일했다. 경력을 살려 페이가 나쁘지 않은 회사의 홍보팀에서도 일했었다. 하지만 조직생활이 잘 맞지 않았다. 돈 벌러 출근해서는 사내 인간관계에 천착하는, 흔한 기업 문화에 회의감을 느꼈다.회사가 아니면 정녕 굶어죽는 것인가, 라는 생각을
우리나라 사람들은 특히 소설을 잘 읽지 않는다.고도의 경쟁 사회에 살아가는 탓에 문제에 대한 즉시적인 해답만을 원하기 때문일까. 책을 많이 읽는다고 하는 사람들도 대체로 실용서 위주로 접하는 경우가 많다.그러던 중, 2024년 말 한강 작가가 영예로운 노벨문학상을 거머쥐며 조금은 달라진 풍경이 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삶과 내면을 다룬 소설에 다시 관심을 갖게 된 것. 비록 일시적인 현상이라 할지라도 그 의미는 대단히 크다. 이제는 다소 낡은 낱말이 되었지만, '순수소설'이라는 아픈 손가락이 미약하게나마 다시 움직이게 된 것 같다
옛말에 시절 인연(時節因緣)이라는 말이 있다. 모든 인연에는 때가 있다는 의미다.여기서의 인연은 불교적 개념으로, 비단 사람 간에 관계만을 일컫지 않는다. 불교에서는 만물이 인(因)과 연(緣)이 만나 생겨나는 것으로 보므로, 우리가 살아가며 마주하는 모든 것들이 '그 시기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정도로 풀이해도 좋을 듯하다.과거에 썼던 일기나 언제 찍었는지 모를 예전의 사진들만 보더라도 그렇다. 그땐 그게 그렇게 행복했나, 혹은 그게 그렇게 힘들었나 싶은 마음이 든다. 일기 속, 사진 속 우리는 제자리에 머물러 있지만, 지금의 우
'사랑'이란 정말 무엇인가요, 라고 누군가 물어온다면 어떤 대답을 내놓을 수 있을까.사랑에 대해 생각하면, 뭔가 흐릿하면서도 은은한 느낌은 들지만, 막상 말로 지어내기란 쉽지 않다. 실체가 없는 탓에 저마다 느끼는 바도 제각각이다. 모두가 사랑을 원하지만 서로가 생각하는 모양이 다르니, 과연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한다는 건 기적 같은 일이다.사랑을 좀 해봤다는 사람들도 그저, 사랑하는 사람요? 그냥 보면 알아요, 라며 흘리 듯이 넘어간다. 이래서야 사랑을 만날 기회가 없었던 사람들은 영원히 알 수 없단 말인가. 꽤 불공평하
누군가 올린 결혼 생활에 대한 온라인 글들을 보면 꼭 달리는 댓글이 있다.’그래서, 결혼 해요? 하지 마요?‘이제는 반쯤 밈처럼 여겨지는 이 물음에는 꽤 여러 심경이 담겨 있다.'나도 너처럼 만족스러운 결혼 생활을 할 수 있을까?''나는 너처럼 실망스러운 결혼 생활을 하지 않을 수 있을까?‘누구에게나 '결혼'이라는 중대사의 무게는 쉽게 여길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간접적으로나마 좋은 선택을 위한 정보를, 조금은 우스개를 담아 얻고 싶은 마음일 터다.물론 그 아래에는 언제나 스테디셀러처럼 달리는 댓글이 있다.'만나는 여자(남자)가
새해가 밝으며 또 한 살 나이를 먹게 됐다. 이제 엄연한 삼십 대 중반에 들어섰고, 나만의 가치관을 정립한 하나의 인격체가 되었다는 실감을 느낀 지도 꽤 시간이 흘렀다. 사람에게도 나이테란 게 있다면 스쳐간 수많은 사건과 기나긴 세월의 흔적이 차곡차곡 내면에 기록되었을 것이다.내게는 오래전부터 남몰래 홀로 품고 있던 꿈이 하나 있다. 인생의 어느 순간에는 넓고 깊은, 지혜로운 어른이 되는 것. 이 꿈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어서 누군가의 도움이나 영향 없이 혼자서 이루고 싶은 바람과도 비슷하다.그러다 보니 인생의 갖은 경험을 하면서
[논객닷컴=박시형 칼럼니스트] 누군가를 위한 커피를 만든다는 것. 내게 이 행위는 꽤 오래전에 형성된 각별한 취미라 할 수 있다. 이제 막 혼자 라면을 끓여 먹을 수 있게 된 시절, 나는 매주 일요일 아침마다 누군가를 위해 커피를 끓였다. 커피포트가 없었던 터라 주전자에 물을 올린 다음, 김이 오르기를 기다렸던 기억이 난다.인스턴트커피 세 숟갈만 담은 이 커피는 나의 어머니를 위한 것이었다. 어머니는 블랙커피를 좋아했다. 그게 멋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때로는 우유와 올리고당을 조금 넣는 걸 좋아했는데, 그럴 때면 나의 일요일 오전
[청년칼럼=박시형]누구나 생존을 위해 매일같이 해야 하는 일이 있다. 우리가 일상이라 부르는 것이다. 일상은 삶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밥을 먹고, 밥을 벌고, 다음 밥벌이를 위해 잠시 쉬는 일. 심히 간추린 것 같지만 실상이다. 꿈 없인 생존할 수 있지만 밥 없인 살아갈 수 없다. 생명체로서 별 수 없는 숙명이다. ‘인간과 짐승이 다를 게 뭐냐’고 할지도 모르지만,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의 두 손과 두 발은 나란히 땅을 짚고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그렇다면 우리의 삶이 별 탈 없이, 좋을 것도 싫을 것도 없이 단순한 일상으
[청년칼럼=우달] 어느 시대를 살아가느냐에 따라, 중요시되는 가치는 달라지기 마련이다. 동양의 근세라면 충(忠)과 효(孝)가, 르네상스 이전의 서구 국가라면 신앙(信仰)일 것이다. 이처럼 한 시대를 아우르던 핵심 가치는 현대에 오면서 급속도로 변하기 시작했다. 우선 그 변화 주기가 무척 짧아졌다. 한 시대에서 한 세기로, 한 세기에서 일평생으로, 일평생에서 한 연대(年代)로, 지금에 이르러서는 채 5년이 걸리지 않는 것 같다.그렇다면 지금의 시대를 잘 살아가기 위해서는 과연 어떤 가치가 필요할까. 2020년대를 새롭게 맞이한 기념으
[청년칼럼=박시형] 지난 22일, 휴가 중 태국에서 성전환 수술을 받고 복귀한 부사관에 대한 전역 조치가 결정됐다. 육군 관계자는 해당 인원이 받은 '3급 심신장애'가 전역의 결정적인 이유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심신장애 3급은 군 생활을 지속하기 어려운 명백한 사유이며, 전역 판정을 피하는 게 오히려 이치에 어긋난다"고 말했다. 이에 A 하사는 "소수자들이 국가 지키고 싶은 마음 하나만으로 복무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고 싶다"며 끝까지 다투겠다고 밝혔다.위 사건을 두고 여론이 꽤 날이 서있다. 우리 사회에서
‘삼성도 까딱하면 10년 전 구멍가게 수준으로 돌아갈 수 있다.’ 지금으로부터 9년 전, 이건희 삼성 회장의 이해할 수 없는 발언이다. 당시로서도 글로벌 브랜드 가치 19위를 기록하던 삼성이었기에 더욱 그랬다. 그리고 2019년 현재, 삼성은 브랜드 가치 531억 달러(약 63조 원)를 달성하며, 포브스에서 발표한 ‘세계에서 가장 가치 있는 브랜드’ 7위에 당당히 자리매김하고 있다.그렇다면 이 회장의 지난 발언은 단순한 기우에 불과했던 것일까. 우선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렇지 않다.실제로 기업들의 수명은 점차 짧아지고 있다. 글로벌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게으른 자는 굶주리게 된다.하염없이 놀고 있는 누군가에게 우리가 농담반 진담반으로 하는 말들이다. 위 문구들은 성서에서 인용했지만, 비슷한 말들은 동서고금 막론하고 숱한 성인들의 입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정말 일을 하지 않으면 꼭 먹지도 말아야 하는 걸까. 그리고 하필이면 왜,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못한다’가 아니라 ‘먹지도 말라’일까. 이 근원을 찾기 위해서는 먼저 현대판 노동의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농경이 시작되기 전 수렵 사회에서는 누구에게나 그랬다. 우리 몸은 그때에도 일정량의 에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