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세화가 떠났다. 그는 낯선 타국에서 택시 운전을 하며 겪은 일과 얻은 통찰을 묵직하면서도 유려한 문장으로 직조해 냈다. 경기고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를 두 번이나 입학했을 정도로 수재였던 그는 꽤 오랜 세월 ‘난민’으로 살아가야 했다. 그가 ‘똘레랑스(관용)’라는 키워드를 한국 사회에 제시한 지 30년 가까이 흘렀다. 지금 한국 사회는 어떠한가. 똘레랑스는 사라졌다. 정치가 됐든, 경제가 됐든 극단으로만 치닫는 이 사회에서 똘레랑스가 자리할 공간은 넓지 않다. 홍세화는 똘레랑스가 앵똘레랑스(불관용)를 용인하는 순간 사라진다고 말했다
직장에서 열정을 품는 게 가능할까.내가 즐겨보는 미드 Bones의 한 대사다. 그 회차의 에피소드는 가물가물한데 이 대사만은 머리에 남았다. 아마 내겐 가능하지 않은 일이라 저 대사를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곰곰이 생각을 해보았다. 현재 직장에서나 다른 직장을 다니고 있는 내 주변 사람들 중에 저런 예가 있었던가. 딱히 떠오르는 사람이 없다.며칠 전, 직장 동료와 회사 메신저로 업무에 관한 얘기를 하다가 화제가 살짝 번졌는데 새삼 조직생활에 대한 적성 문제였다. 우리 둘 다 최근 몇 년 사이에 벌어진 일이 없었다면 그냥 이렇게 사는
출근 전 샤워를 하는데 갑자기 숨이 턱 막히며 호흡이 어려워졌다. 가슴과 등에는 극심한 통증이 느껴졌다. 단순한 월요병이 아니라는 확신에 식은땀이 흘렀다. 혹시 심장에 문제가 생겼나 싶으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발가벗은 채로 쓰러지면 큰일인데. 빨리 옷부터 입자."하루가 지난 지금 옆구리에 흉관을 삽입하고 병원에 누워 있다. 다행히 심장엔 이상이 없었고 기흉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가슴에 차 있는 공기를 빼내면서 폐에 생긴 구멍이 아물길 기다리고 있다.생전 처음 겪는 고통에 머리가 하얘지는 경험을 했지만, 상상했던 최악의 상황은 면
별다를 것 없는 하루하루와, 인파로 가득한 출퇴근의 나날에서 활기를 찾을 수 있는 게 무엇이 있을까. 운동이나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등 신선한 취미로 일상을 환기시키려고 하지만 그 마저도 스트레스로 다가오는 순간이 있다. 그냥 뭔가를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질 수는 없을까? 이런 내게 친구들은 색다른 것을 추천했다. "좋아하는 사람을 만들어 봐", 여기서 좋아하는 사람이란 닿을듯 닿을 수 없는 TV 속 존재들을 의미한다. 30세 전후로 친구들이 이렇게 갈린다는 말이 있다. '우리 아이 돌보기'와 '우리 아이돌 보기'. 최근 주변
얼마 전 조카의 졸업식에 참석하기 위해 휴가를 냈다. 하루를 온전히 쉬는 걸로는 올 해의 첫 번째 연차였다. 학교도 아닌 유치원 졸업식에 고모가 휴가까지 내고 간다는 게 오버인가 싶었지만, 참석여부에 대한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첫째 조카가 다니는 유치원에는 둘째 조카도 다니고 있어 졸업식뿐 아니라 수료식도 거행되었고, 양가의 첫 손녀 유치원 졸업식 축하를 위해 양가 어르신들을 비롯한 (조카의) 이모까지 출동한다는 말에 질 수 없었다. 나는 집안의 첫째지만 여태(?) 시집을 못 간 탓에, 나의 첫 조카는 우리 집에서 (둘째 조
가능하다면 카카오페이를 쓰지 않는다. 10원도 안 되는 포인트를 주며 캐릭터가 호들갑 떨던 기만을 기억한다. 11번가는 탈퇴했다. 업체 측 표기 오류로 결제 금액 일부를 돌려 받을 때, 그들이 런칭한 페이로 돌려 줄테니 페이에 가입하라고 했다. 괘씸하고, 귀찮았다. 지마켓을 주로 이용했지만 결별 수순을 밟는 중이다. 스마일클럽에 가입되어 있는데도, 네이버로 지마켓에 접속했을 때 같은 상품이 더 저렴한 경우가 잦았다. 스타벅스 생태계 때문에 스마일클럽을 유지할 수도 있겠지만, 신뢰가 깨진 지마켓은 더이상 내 마켓이 아니었다. 잡힌 물
매일 아침 일어나 씻기 전부터 하는 일이 있다. 홀로 굳게 밤을 지킨 문을 열고 나와 우체통에 꽂힌 신문을 찾으러 가는 일이다. 신문, 매일 새로운 것들을 듣는 일. 나의 하루가 새로울 일이 없기에 신문이라도 읽으며 깨달음을 얻으려는 것이다. 신문을 손에 쥐는 순간 얼굴이 일그러진다. 가장 중요한 1면의 뉴스는 유쾌함보다는 불쾌함을 유발하기 때문이다.신문을 가지고 들어오는 발걸음은 편치 않다. 그렇게 책상에 앉아 신선놀음하듯 신문의 행간을 읽는다. 기사들을 읽다 보면 이번에는 애잔함이 가슴에 내려앉는다. 어렸을 적 수많은 꿈이 있었
적당히 어울려 노는 척하는 괴롭힘이 늘어났다. 애들은 싸우면서 크고 친해진다는 옛말이 좋은 방패막이 되어준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이런 교우관계, 학교폭력을 담은 드라마가 최근 성황리에 마무리됐다. 바로 동명의 네이버 웹툰이 원작인 이다. 티빙 오리지널 시리즈 은 투표를 통해 매달 왕따를 뽑는 과정을 적나라하게 담아냈다. 피라미드처럼 계급을 나눠 F등급인 아이를 학급 전체가 동의 하에 괴롭히는 것이 이야기의 중심 축이다.지난해 큰 화제가 됐던 가 가해자와 피해자를 심도 있게 담아냈다면
뜬금없이 친구에게 이혼 소식을 들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냐는 말에 묵묵부답이다. 평소 결혼생활이 힘들다거나 아내에 대한 푸념을 늘어놓은 적도 없는 친구였다. 둘이 충분히 이야기하고 내린 결정이라며, 그 과정을 동네방네 떠들고 싶지 않았다고 했다.장밋빛 결혼생활이 없다는 건 나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살면서 겪은 희로애락의 절반 이상은 결혼 이후에 경험했으니까. 혼자일 땐 맞닥뜨리지 않아 연습해본 적 없던 새로운 국면들에 우린 서툴렀고, 그때마다 여러 가지 감정에 사로잡혔다. 기쁨과 즐거움은 즐기면 됐다. 문제는 슬픔과 노여움이었다.
아직 산의 매력을 모르는 나는 산보다는 바다가 좋다.바다가 왜 더 좋은지 이유를 생각해 본 적은 없는데, 산보다는 바다가 좋은 경치를 좀 더 빠르고 쉽게 내주는 것이 영향을 끼친 것 같다. 희한하게 산은 오를 때마다 목적 지점까지 빨리 도착해야 한다는 강박에 제대로 즐긴 일이 별로 없었다.이번 연수 장소는 사방이 숲과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단 몇 걸음만 걸어도 살짝살짝 등산하는 기분이 들었다. 특히 숲 테라피를 하기 위해 강사님과 동행한 짧은 산행에서 아무런 목표 없이 쉬엄쉬엄 산을 오가는 걸 처음으로 배웠다.강사님은 중간중간
연애 프로그램 시장에 큰 반향을 일으킨 ‘진주 PD’가 이번에는 남매의 연애를 담은 를 들고 돌아왔다. 남매와 연애의 조합만으로도 시청자의 호기심을 자극하기 충분했다. 같은 호적을 쓰는 남매의 연애를 가까이서 지켜봐야 한다는 점은 채널을 고정할 만한 소재이기도 했다. 사랑과 기침은 숨길 수 없다고 했던가. 사랑에 빠지면 사람은 참 유치해진다. 이는 대중들이 각 방송사의 말 많고 탈 많은 연애 프로그램을 열심히 챙겨보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는 연애 프로그램이 인플루언서들의 연예인 등용문으로 전락해 버렸
대한민국 최고 프렌차이즈는 단연코, ‘임대’다. ‘공’이 건물의 주연이 되는 부조리극은 빈부 구분 없이 절찬 상영 중이다. ‘엑스트라 공’(空)이 고도를 기다리는 듯, 임대의 시간이 끝날 줄 모른다. 사는(live) 곳도, 사는(buy) 곳도 공공(空空)하다.빈 것들이 채워지지 않은 상태에서 빌 것들이 성실히 쌓이고 있었다. 시공사, 건설사들은 비지 않길 바라겠지만, 대구 반고개역 어느 아파트 청약 경쟁률은 0.07:1이었다. 높은 분양가 탓만은 아니었다. 대구는 미분양 무덤으로, 전국 미분양 물량 17%가 몰려 있었다. 그나마도
얼마 전 서류를 올려놓으려고 지점장님의 자리에 간 적이 있다. 지점장 실이 따로 없어서 직원들과 같은 공간에 계시는데 그 자리에 서니 (기둥을 사이에 두고 옆에 앉는 중간 책임자를 제외하고) 지점 직원들 자리가 한눈에 보였다. 사무실이 크지도 않으니 이상할 것도 없었지만 생각보다 너무 잘 보여서 깜짝 놀랐다.상석의 view를 보고 나니 자리의 권력이 이런 건가 하는 실감이 들었다. 직원 전부가 회사에서 나눠준 잠바만 입고 있었다면 판옵티콘이 따로 없을 지경이었다. 창을 등지고 앉는 책임자들은 주식창을 수시로 열고 핸드폰 게임을 한다
처음에 논객에 글을 낸 게 8년 전이다. 청춘을 주제로 글을 써보라는 공모전이 시작이었고, 현대문학에 흥미가 떨어지며 에세이, 웹소설, 독립출판 등으로 시선을 돌렸던 내게 좋은 기회였다. 냅다 글을 써서 투고했다. 내용을 요약하자면 “청춘이 뭔진 모르겠는데, 그게 술자리의 ‘짠’이라면 죽어도 못 준다 이놈들아!”인 글이었다. 수상했다는 소리를 듣고서는, 대학교의 과제도서실에서 덩실덩실 춤을 췄다. 내 머리에 꽃만 꽂으면 완벽해보일 것 같았는지 심히 수상한 표정으로 쳐다봤던 후배들이 기억난다. 그리고 올해가 되면서 나는 스물 넷이 아
월요일부터 오늘까지 서울에서의 교육 연수 4일 차다.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전철에서 앉아 간 기억이 없다. 특히 첫날은 굳이 내리지 않아도 될 역에서 잘못 내려 출근길 2호선의 위력을 잠시 느끼기도 하였다. 텅 빈 지하철로 출퇴근을 해도 쉽지 않을 판에, 이 많은 이들은 대체 이걸 어떻게 매일매일 견디는 것일까. 단 몇 분만에 먹고사니즘과 heroism에 대한 숙연함을 느꼈다. 그리고 나는 어제 날짜로 에누리 없는 입사 13년 차가 되었다. 학생으로 따지면 초중고를 다 졸업하고도, 대학 1년이 지난 시간이다. 그 긴긴 세월 동안 그
Y2K와 더불어 레트로 감성이 바짝 유행이었다. 옷이란 자고로 심플 이즈 베스트라고 생각하면서도 그 유행에 휩쓸리지 않기란 어려웠다. 결국 나도 모르는 사이 옷 몇 벌을 요즘 스타일에 맞춰 사입으니 부모님은 내게 이런 말을 했다."어? 그거 우리 때 유행하던 건데"확실히 예전 스타일이 인기라는 걸 실감할 수 있는 멘트였다. 그런데 과연 옷만 그럴까? 체감하기에는 거의 매일 새로운 곡이 쏟아져 나오는 음악 산업도 별반 다르지 않다. 최근 몇 년간 샘플링 곡이 사랑받아 온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샘플링이란 표절과 엄연히 다른 개념으
장례식장에서 때아닌 웃음이 터졌다. 강남에 갔다가 어떤 매장에서 말 한 마리가 학대당하는 걸 보고 마음이 안 좋았다는 작은삼촌의 이야기 때문이었다. 요즘도 그런 곳이 있냐며 다들 핸드폰을 검색했고, 알고 보니 탬버린즈 매장에 홍보용으로 전시된 말 모형을 보신 거였다.아내의 외할머니께서 설 연휴가 시작되기 전날 돌아가셨다. 부랴부랴 밤 버스를 끊고 내려가 장례식장에서 명절을 보냈다. 명절이어서 조문객은 많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모여 앉아 가족끼리 술잔을 기울이는 분위기가 됐다.결혼한 지 4년이 지났지만, 아내의 친척들과 제대로 이야기
내게는 4살 터울의 누나가 있다. 게임 회사의 VFX아티스트로 일하고 있고, 최근에는 이직을 위해 블리자드에 면접을 보고선 합격했다. 해외 회사들은 면접이 굉장히 긴 편인데 다행히 HF팀은 누나가 마음에 들었는지 마지막을 제외하곤 빠르게 면접 일정이 소화되었다. 다만 지금에야 이렇게 말하지, 1월 말에 누나는 내게 본인이 지원한 회사에 대해서 메시지를 보냈었다. “내 채용 담당 매니저 짤렸네. 왠지 이메일에 대답이 계속 없더라니.” 블리자드가 대량 정리해고를 단행했고 미국은 정리해고가 결정되면 그 날 바로 짐을 싸고 나가야 할 정도
‘얼죽아’가 민족문화라면, 나는 이민족이다. 나는 뜨거운 아메리카노만 마셨다. 이유는 단순했다. 실내 노동자로서, 커피를 마실 때 날씨 영향을 받지 않았다. 추울 때 따뜻했고, 더울 때 시원했다. 실외에서는 커피 마실 일이 없었다. 여름에 실외에서 무언가를 마셔야 한다면, 시원한 탄산음료이지 커피는 아니었다. 물론, 탄산음료에도 얼음을 넣지 않았다. 얼음은 음료를 마실 때 걸리적거렸다.식수도 미지근하게 마셨다. 물을 끓이든, 생수를 사든, 냉장고에 물을 넣지 않았다. 물을 마시는 이유는 수분 보충이었고, 찬물을 마시면 수분을 충분히
그날은 유난히도 힘든 날이었다. 아침 9시에 중요한 발표를 마쳤다. 수업을 다 듣고, 서울로 이동해 대외활동까지 마치니 저녁 10시였다. 돌아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서울역에 도착했다. 배차 간격이 긴 버스를 한참을 기다려 탔다. 출발지였던 만큼 승객은 얼마 없었다. 적당한 자리를 골라 앉았다. 의자는 뒤로 젖혀있었다. 전 사람이 원복하지 않고 내렸나 보다. 자리에 앉았다. 꼿꼿하던 옆 의자보다 편했다.서울역에서 신촌으로, 신촌에서 홍대로 갈수록 승객들이 많아졌다. 사람 많은 금요일 저녁이다. 송도와 서울을 오가는 버스는 몇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