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델 카스트로. 쿠바를 49년간 통치한 ‘영원한 사령관’. 그가 타계(11월 25일)한지도 한 달 이상 흘렀습니다. 그러고 보면 제가 쿠바에 다녀온 지도 딱 그만큼 지났습니다. 공교롭게도 제가 쿠바에서 돌아오자마자 그가 눈을 감았습니다. 그런 이유로 그 즈음 가장 많이 들은 말이 “쿠바 국민들은 카스트로를 어떻게 생각해요?”였습니다. 하지만 여행자인 내가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은 아니었습니다. 현지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확인할 재간도 없거니와, 설령 물어본다고 해도 그 나라 국민의 총의를 듣는 건 불가능하기
정육점, 떡 가게, 화장품 가게, 꽃집, 오래된 이발소…. 고만고만한 점포들이 줄줄이 늘어서 있는 골목길이었습니다. 습관처럼 여기저기 해찰하다가 신기한 광경에 걸음을 멈췄습니다. 오토바이 하나가 느린 속도로 앞질러 가는데, 그 위에 탄 청년의 손에서 카드 같은 게 튀어나가더니 점포들 문 앞에 하나씩 뿌려졌습니다. 어찌 보면 나비처럼 사뿐히 앉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천천히 간다지만 달리는 오토바이에서 무엇을 어떻게 저리 정확하게 뿌릴까?궁금증을 못 참고 주워봤더니 명함 크기의 전단지였습니다. 청년은 그걸 집집마다 서너
먼저 사죄부터 드리겠습니다. 그날 광화문 광장에서 어른을 뵈었을 때 살짝 고개를 갸웃거렸거든요. 더 솔직하게 말씀 드리면 “가스통은 어쩌고 여기로 나오셨지?” 이런 발칙한 생각까지 했습니다. 제 가벼운 성정 탓입니다.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다시 뵈면 막걸리 한 잔이라도 올리고 싶습니다. 어른과 아이, 남자와 여자가 따로 있을 수 없는, 국민만 존재하는 그 자리에서 어찌 그런 막돼먹은 생각을 했는지, 발등을 찍고 싶습니다. 어려운 시절을 건너온 제 아버지 세대들이 그렇듯, 어른의 얼굴에도 거친 세월이 깊은
1강원도는 요즘 ‘공사 중’입니다. 느닷없이 무슨 소리냐고요? 말 그대로입니다. 2018 평창동계올림픽을 준비하느라 곳곳에서 공사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특히 가장 활발한 게 도로공사입니다. 어느 길은 확장하느라 파헤쳐져 있고, 어느 구간은 직선화 공사를 하느라 분주합니다. 좁았던 길이 훤하게 넓어지고, 구불구불하던 길이 다림질한 듯 반듯하게 펴지니 상전벽해라는 말이 실감납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고즈넉한 길을 달리던 날이 은근히 그리워지기도 합니다.저는 공사구간을 지날 때마다 생뚱맞게도 지난여름 끝머리에 함경북도를 강타한 수해가 그
그녀는 스물세 살이라고 했습니다. 그 나이 특유의 풋풋함이 아니더라도, 선이 무척 고운 얼굴이었습니다. 조금은 인색해 보이는 미소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카메라 셔터를 누르면서도 감탄하기 바빴습니다. 8월 한낮의 열기가 세상을 뜨겁게 달구고 있었습니다. 그 열기 속에서 그녀는 작업복을 껴입고 장갑을 끼고 마스크를 썼습니다. 작업복은 우주복에 가까울 만큼 두텁고 둔중해보였습니다. 그냥 서 있어도 숨이 턱턱 막힐 것 같은데, 저렇게 옷을 껴입으면 얼마나 더울까.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등에 땀이 흘렀습니다.준비를 마친 그녀가 작업대 앞에 섰습
벌써 2년 가까이 지난 ‘옛 이야기’가 됐습니다. 신문사에서 퇴직하고 소위 프리랜서 작가가 된 뒤, 처음 맡게 된 일이 경상북도 지역을 다니며 취재를 하고 책을 한 권 쓰는 것이었습니다. 거의 가본 적 없는 낯선 도시를 찾아가 낯선 사람들과 인터뷰를 하고 사진을 찍는 건 제법 고된 과정이었습니다. 고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마음 보여준 흑백사진어느 도시였는지 정확한 기억은 남아있지 않습니다. 길을 가다 잠시 차를 세우고 물을 사기 위해 길 옆 가게에 들렀을 때입니다. 가게 문을 열자마자 시선이 자연스럽게 벽
교장실 칠판에는 97이라는 숫자가 쓰여 있었습니다. ‘오늘의 총 학생 수’였습니다. 안내를 담당한 선생님은, 많을 때는 재학생이 1500명이나 됐다고 지난날을 추억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97이라는 숫자조차 가벼워 보이지 않았습니다. 바닷가 작은 면소재지의 중학교에 아직도 학생이 이만큼이나 남아있다니…. 마침 수업시간이라 학생들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학교 건물이 더욱 커보였습니다. 정말 학생들이 있기는 한 걸까? 초여름 햇살이 유난히 날카롭게 쏟아지는 날이었습니다. 시인·가수와 하나 된
지난 겨울 오로라 취재를 위해 유럽으로 떠나면서 휴대전화 데이터 로밍 차단 신청을 했습니다. 돈을 아끼겠다는 목적도 있었지만 잠시라도 스마트폰 중독에서 벗어나보자는 심사도 없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게 얼마나 무모한 짓이었는지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호텔 같은 곳에 묵으면 와이파이를 쓸 수 있으니 그럭저럭 견딜 만했을 텐데, 캠핑카에서 먹고 자는 일정은 세상 모든 것과의 단절을 뜻했습니다. 내 나라에서 들려오는 뉴스는 안 보고 안 들어도 그만이지만, 글 쓰는 데 필요한 자료 검색 수단까
파리에 머무는 동안 가장 힘들었던 건 카메라와 지갑을 지키는 일이었습니다. 도착해서 맨 먼저 들은 말이 “지갑을 조심하라”였기 때문입니다. ‘선진국’이라는 프랑스에서, 세계의 예술과 문화를 선도한다는 파리에서 지갑부터 챙겨야한다니…. 아이러니한 일이었지만, 현실이니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에펠탑에 가든 몽마르트 언덕에 가든 우선 신경을 써야하는 것은 지갑의 안전이었습니다. 그만큼 관광객의 지갑을 탐내는 자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배낭과는 별도로 작은 가방을 하나 사서 지갑을 넣고, 그 가방을 옷 안에 메고 다닐 정도
캠핑카를 타고 북유럽으로 오로라를 찾아 가는 중이었습니다. 그날은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묵을 계획이었는데, 조금 무리해서 ‘스웨덴의 관문’ 말뫼까지 달렸습니다. 느닷없는 일정 변경은 제 뜻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국민을 돌본다는 복지국가 스웨덴에서 하루쯤 머물고 싶었습니다. 무엇을 일러 복지, 복지 하는지 잠시라도 들여다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하루 이틀 머문다고 복지의 실체가 와 닿을 리는 없겠지만, 그들이 사는 모습을 보면 뭔가 느낌이 있을 것 같았습니다. 스웨덴 지인에게 들은 ‘부러
조금 생뚱맞기는 하지만 오늘은 개 이야기부터 하려고 합니다. 전에 산문집에도 잠깐 소개했던 내용인데요. 제 집에서 함께 사는 강아지들은 짖을 때와 짖지 말아야 할 때를 정확하게 구분합니다. 예를 들어 밤 12시 넘어서 집에 들어가면 반가운 표시만 할 뿐 절대 짖지 않습니다. 낮에는 10분만 나갔다 들어와도 반갑다고 극성을 떠는 녀석들이 말입니다. 日 의원, ‘위안부는 매춘부’ 망언··· 짖을 때 아는 개만도 못해참 신기한 일이지요? 강아지들은 사람들이 잠드는 시간을, 잠든 사람을 깨우면 안 되는 시간을 어
벌써 여러 날이 지났군요. 남쪽 지방을 여행하던 중 SNS에서 그 사진을 봤습니다. 처음엔 당혹스러울 정도로 낯설었지요. 검은 치마에 흰 한복저고리를 입은 한 젊은 여성이 손 팻말을 들고 서 있는 사진. 그녀의 얼굴에는 주변 상황과 조금 동떨어져 보이는 미소가 그려져 있었습니다. 더 눈길을 끄는 건 그 앞에 있는 노인의 표정이었습니다.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다는 듯 팻말을 바라보고 있는···. 마치 상황극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사진을 찍은 곳이 주한일본대사관 앞의 소녀상 근처라는 것과, 그 노인이 ‘어버이연합’ 같은 보수단체 회
#1겨울비가 내린 아침, 산에 올라갔다 내려오는 길이었습니다. 비가 말끔하게 씻어준 세상은 상쾌했습니다. 하지만 가벼운 걸음은 산 어귀 마을언저리까지였습니다. 연립주택들 사이 좁은 골목에 망연하게 서 있는 할머니 한 분을 봤습니다. 전날 저녁에 수거한 종이상자를 리어카에 실어뒀는데 밤새 젖어버린 모양이었습니다. 물 먹은 상자를 수집소로 가져가봐야 받아주지도 않을 테고, 그렇다고 버릴 수도 없는 일입니다. 하나씩 내려놓고 말려야겠지만 당장 다시 일을 나가야 하니 막막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노인의 그 막막한 눈길에서 막막한 우리
공권력에 의해 사경을 헤매는 노인[오피니언타임스] 며칠 전 일인데 벌써 아득한 옛날처럼 멀어 보이는군요. 저는 그날 광화문에 있지 않았습니다. 강의를 나가는 학교의 학생들과 지방에서 현장학습 중이었습니다. 커리큘럼에 명시된 행사였기 때문에 취소할 수도 미룰 수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광화문에 마음을 두고 간 건 분명합니다. 내내 뭔가 불편했습니다. 있어야 할 곳에 있지 않다는 것 또한 내가 살아가는 시대에 대한 부채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겠지요. 지난 14일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지금 와서 새삼스럽게 그날 벌어진 일에 대해 옳
[오피니언타임스]이 땅, 어느 계절인들 아름답지 않을까요. 하지만 사람마다 좋아하는 계절은 조금씩 다르기 마련입니다. 저는 가을을 유난히 사랑합니다. 저만치 물러나 유리처럼 맑고 투명해지는 하늘과 짙푸르게 여위어가는 강물, 그리고 이별을 앞둔 나무들이 보여주는 처연한 아름다움은 오로지 가을에만 누릴 수 있는 풍경이기 때문입니다.하지만 가을에 가장 아름다운 것은 따로 있습니다. 대지 위에 집 위에, 그리고 사람 위에 체로 친 듯 곱게 내리는 햇살입니다. 마치 비단실이 나풀거리며 내려오듯 세상을 부드럽게 감싸는 황금빛 향연. 그 속으로 걸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