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사이에 밤공기가 확연히 달라졌다. 열어 놓은 창 너머로 들어와 맨살을 스치는 바람이 차가워 홑이불을 끌어다 덮는다. 더위가 지나갔다는 안도감과 함께 가을이 주는 아련함이 마음속에 피어오른다.계절의 변화를 느낄 때면 어쩔 수 없이 세월을 인식한다. 그러고는 습관적으로 삶을 돌아본다. 거기에 항상 따르는 질문이 있다. “나는 지금 제대로 살고 있나?”올해엔 세월의 흐름을 의식할 수밖에 없는 이벤트가 유난히 많다. 연초에는 칠순 생일과 고등학교 졸업 50주년 기념행사가 화살처럼 빠른 시간의 흐름을 절감케 했다. 그리고 이제 한 달쯤
얼마 전 학교 동기 등산 모임인 ‘용천회’에서 수원 광교산을 다녀왔다. 그동안 몇 차례 가본 길인데, 이번 산행에서는 유독 내 눈에 밟히는 광경이 있었다.때아닌 3월 중순 폭설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여기저기 쓰러져 있는 토종 소나무(적송)들이었다. 커다란 가지들이 부러져 여기저기 뒹구는 정도는 약과였다. 내 나이보다 더 오랜 세월 그 자리에 서 있었을 노송의 몸통이 뒤틀려 찢겨 있는 것을 눈으로 보고도 믿기질 않는다.반듯하게 위로만 뻗어 멋이 덜한 북미산 리기다소나무는 하나도 다치지 않았다. 동양화에서 튀어나온 듯 산자락에 뿌리를
젊었을 때 내가 아내로부터 듣기 가장 무서워한 말은 “당신 회사 앞으로 갈 테니 차 한잔 같이해요”였다. 무슨 얘기를 할지는 모르지만 무조건 피하고 싶었다. 둘이 조용히 마주 앉아 이야기한다는 것 자체가 일단 두려웠다.조금 나이를 먹은 지금은 “당신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똑같아. 조금도 변하지 않았어”라는 말을 들을 때가 가장 절망스럽다. 나의 정체성이 여지없이 흔들리는 느낌이다.흔히 “사람은 절대로 바뀌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데 이 말이 사실인가?사람은 바뀌지 않는다는 말은 대부분 부정적 의미로 사용된다. 그 속에는 기대와 다르게
감미로운 피아노 전주가 잔잔하게 흐른다. 내 안 가득 숨을 불어 넣고 눈을 들어 지휘자를 바라본다. 그 순간 정겹고 귀에 익은 아기 목소리가 객석에서 날아와 내 귀에 꽂힌다.“하지이~”나는 그게 누구를 부르는 소리인지 금방 알아차린다. 나의 사랑스러운 손자가 악보를 펼쳐 들고 무대 뒷줄에 서 있는 나를 발견하고 고사리손을 흔든다.조금은 긴장된 모습으로 지휘자의 노래 시작 사인을 기다리던 나의 입가에 살며시 웃음이 번진다. 나도 손을 들어 아이에게 답한다.이번 가족음악회가 나에게 선물한 특별하고도 소중한 장면이다. “하지이~”를 외치
내가 합창단에 들어온 게 언제지? 큰아들 결혼 전이니까 분명히 4년은 넘었는데….외출했다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계속 기억을 더듬어봤지만, 생각이 잘 나지 않는다. 그래서 집에 들어오자마자 스마트폰 갤러리에 저장된 사진들을 찾아봤다.합창단 친구들과 함께 찍은 사진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게 2019년 10월로 돼 있다. 내가 합창단에 합류한 게 벌써 5년이 넘었다는 얘기다.내가 속한 합창단은 고등학교 동기들로 구성된 ‘Y-glee’다. 52년 전쯤 음악적 재능이 뛰어난 이석철이라는 친구가 합창을 좋아하는 동급생들을 모아 창단했다.워낙 노
오래전 일이다. 여러 명이 함께 해외여행을 하는데, 유독 눈에 띄는 친구가 있었다. 그의 외투 주머니에는 카메라 대신 항상 수첩이 들어 있었다.그는 가는 곳마다 수첩을 꺼내 보고 들은 것들을 빠짐없이 기록했다. 다른 사람들은 새로 만나는 장소와 풍물을 자기 모습과 함께 사진에 담았지만, 그는 그보다는 늘 무언가를 열심히 적고 있었다.유적지의 안내판 내용을 열심히 기록하고 안내자의 설명을 꼼꼼히 받아 적었다. 그는 모든 여행을 그런 방식으로 하는 것 같았다. 나와 같은 또래의 공중파 방송 경제부 기자였던 그의 그런 모습이 존경스럽기까
"사모님이 코디해 주시나요?"몇 번 들어 본 인사말이다. 옷차림이 나쁘진 않았던 모양이다. 공치사로 하는 소리인 줄 알면서도 어깨가 펴진다. 하루의 옷차림도 나의 작은 선택인데, 그것이 누군가의 눈에 들었나 보다.아내가 내 옷차림을 코디하진 않는다. 서로 취향이 달라서다. 아내는 내가 클래식한 정장을 입는 것을 좋아했다. 하지만 나는 캐쥬얼한 스타일의 옷을 즐겨 입는다. 그러니 아내가 내 옷을 코디할 일은 거의 없다.그런데도 아내는 지금도 내 차림새에 꽤 신경을 쓴다. 내가 집을 나설 때면 어김없이 내 옷차림을 빠르게 스캔한다. 그
계절이 바뀌면 삶의 모습이 바뀐다. 새로운 계절에 맞는 옷을 꺼내 입고, 새로운 계절에 맞게 생각하고 행동한다.인생의 계절도 다르지 않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지만 계절의 변화를 무시하며 살아갈 수는 없다.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환경과 여건의 변화는 내 삶에 새로운 옷을 입힌다.그래서 늘 스스로 묻고 일깨운다. 지금 나는 어느 시즌을 지나고 있는가.지금 나의 계절은 아마 늦가을쯤 되지 않았나 싶다.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시즌이다. 한동안 나는 이 계절이 주는 축복을 누리며 살아갈 것이다.그러나 세월은 이 순간에도 흐
“우리가 언제까지 이렇게 모여서 산에 오를 수 있을까?”친구들과 함께 산길을 걸을 때 자주 이런 질문을 하는 친구가 있다. 그는 그러면서 ○○이 아버님은 84세까지 매일 청계산에 오르셨다고 하니, 우리도 그때까지는 가능하지 않을까 하며 자문자답한다.그러다 우리보다 10년쯤 연배로 보이는 어르신들이 등산배낭을 메고 지나가는 모습이 눈에 띄기라도 하면 내 일처럼 반갑다. 나의 가능성을 눈으로 확인하는 것 같아서다.언제부터인가 우리의 관심사가 몇 살까지 사는지에서 언제까지 건강을 유지할 수 있을지로 바뀌었다. 나이 든 사람 대다수가 행여
‘지하철 타기 전 꼭 화장실에 들러야 하는 분은 읽어보세요!’서둘러 전철 승강장으로 향하는데 벽면에 붙은 쪼끄만 광고지 제목이 눈앞을 스친다. 시간이 급해 내용을 읽어보지 못하고 열차에 오른 게 못내 아쉽다. 뻔할 것 같은데도 꽤 궁금증을 유발한다는 생각에 피식 웃음이 난다.민감성 방광이나 절박뇨 치료 약이거나 의원 광고였을 가능성이 크다. 지나가다 멈춰서서 그것을 읽는 사람이 있다면 분명 내 연배 남자일 것이다.그러고 보니 내가 친구들과 가장 쉽게 공감하는 장소가 전철역 아닐까 싶다. 일단 친구들과 함께 이곳에 들어서면 누가 먼저
나이 들어 가면서 어느 날 불쑥 찾아오는 불청객 수가 하나둘 늘어간다. 오래된 고무주머니에서 물이 새듯, 70년 가까이 사용해 온 신체의 여기저기가 잔 고장을 일으키는 것이다.그것이 어느 정도 예상했던 것이라면 좀 낫다. 전혀 뜻하지 않은 곳이 말썽을 부리면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다. 기계는 고장 난 부품을 갈아 끼우면 새것처럼 되기도 한다. 그런데 우리 몸은 그럴 처지가 아니니, 사소한 고장도 사람을 여간 괴롭히는 게 아니다.그러다 보니 친구들 만나 수다 떨다 보면 빠지지 않는 게 있다. 노화되는 육체에 관한 푸념이 그것이다. 세월
동창 모임에서의 일이다. 이제 칠순이 되는 친구가 나를 보며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나이 먹는 게 뭐가 좋다는 거지? 나는 그 말이 도무지 이해가 안 돼….” 언젠가 내가 “나는 나이 먹는 게 너무 좋다”고 했던 데 대한 반박이다.“나이 먹어갈수록 더 행복해지니까 좋은 거지…”서드에이지가 시작되는 60대 초반부터 늘 그렇게 생각했다. 인생에서 가장 좋은 때를 맞았다는 기대가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 지난 10년 나의 행복감은 해마다 최고치를 경신하며 상승곡선을 그려왔다.정확히는 기억나지 않지만 오래전 어디선가 짤막한 기사 하나를 봤
얼마 전 둘째 아들 결혼식이 있었다. 나에게는 더없이 즐겁고 행복한 날이었다. 51년 전에 내 고등학교 동기들이 만든 합창단 ‘Y-glee’의 축가가 혼례의 화룡점정(畵龍點睛)이 돼 감동을 배가했다.결혼식장에서 축가는 대개 신랑이나 신부의 친구가 부른다. 간혹 전문 소리꾼이 초빙되어 축가를 선사하기도 한다. 그런데 20명이 넘는 아빠 친구들이 큰 사랑을 담아 두 사람을 축복하는 경우는 매우 이례적이다.축가를 부르기에 앞서 Y-glee를 대표해 김경호 목사가 전한 인사말이 아직도 귓가에 맴돈다.“결혼이란 것은 신랑이 가져온 세계와 신
“만약 네가 젊은 시절로 되돌아갈 수 있다면, 너는 그렇게 하겠니?”등산길을 함께 걷는 친구에게 불쑥 물었다. 나 자신에게 던진 질문이기도 했다.그는 당연히 돌아갈 것이라고 했다. 되돌아가면 해보고 싶은 일이 있다고 한다. 그게 뭐냐 물으니, 동대문 시장에서 옷 장사를 해보고 싶단다. 이유를 묻지는 않았지만, 바람이 소박하다.“너는?” 그가 되묻는다. 나는 지난날이 어떠하든 인생은 한 번으로 족하다는 생각이다. 인생의 고해(苦海)를 두 번이나 건너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런데도 뜬금없이 왜 내게 그런 질문이 떠 올랐을까. 내게도 뭔
나는 나이 먹는 게 좋다. 내가 조금씩 더 나은 사람이 돼 갈 것으로 기대하기에, 세월이 흐르는 게 즐겁다. 언젠가 내가 육체를 벗을 때, 나는 제법 괜찮은 사람이 돼 있을 것으로 기대하며 산다.삶에 더 많이 감사하고 더 쉽게 행복을 느끼는 게 내게는 큰 축복이다. 나를 버리는 만큼 더 가치 있는 것들로 채워지는 것을 느낀다. 그래서 인생이 감사하다.고등학교 동창들과 2박3일 가을 여행을 다녀왔다. 애초에 맛있는 남도 음식을 염두에 둔 여행이었다. 여행은 28인승 리무진 버스 3대에 동창들을 나눠 싣고 압구정역 공영주차장을 출발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