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타임스=이호준] 언뜻 봐도 병색이 완연했습니다. 오랫동안 볕을 못 본 것처럼 창백한 얼굴, 굽은 등과 어깨… 세상 구경 처음 나온 아이처럼 자꾸 두리번거렸습니다. 처음에는 한 마디쯤 하려고 했습니다. “거기는 제 자리인데요?” 이 말을 입안에 몇 번 굴리다 옆자리에 그냥 앉고 말았습니다. 모처럼 타는 무궁화호 열차였습니다.일부러 창가로 예매한 내 자리에 그 노인이 앉아 있었습니다. ‘노인들은 왜 남의 자리에 앉는 걸 예사로 안담? 창가자리에 앉고 싶으면 표를 끊을 때 그렇게 달라고 하든지….’ 혼자 속으
[오피니언타임스=김철웅] 눈치 챈 사람도 있겠지만, 이 칼럼 제목은 015B가 부른 ‘아주 오래된 연인들(1992)’의 패러디다. “저녁이 되면 의무감으로 전화를 하고…”로 시작하는 노래는 연애 기간이 길어져 서로 심드렁해진 연인들의 심리를 꿰뚫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게 쇄신할 생각은 없이 흘러간 레퍼토리만 반복해 틀어대는 우리 보수우파랑 꽤 닮았다. 무엇이 어떻게 닮았나.지난 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대한민국 수호 비상국민회의’ 창립대회가 열렸다. 2000여 명의 인파가 모였는데, 이 모임의 성격은 참석자들 면면을 봐도
10. 기록을 지우는 괴물“ 박사님, 큰일 났습니다.”새벽 2시. 김 박사는 전화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남해 연구소에 있는 D-U 프로젝트 책임 연구원 K의 목소리는 다급했다. 새벽에 이런 전화는 불길하다. 연구원 영상이 나왔다.“ 무슨 일인가?”“ 박사님, 저로서도 뭐라고 설명을 드려야 할지... D-U 프로그램이 오늘 오후 4시부터 작 동하지 않습니다. 마치 갑자기 기억 상실증에 걸린 것처럼 백지가 되어버렸습니다..”“ 뭐라고? 그게 무슨 말인가, 백업 파일은?”김 박사는 어안이 벙벙했다. 무엇보다 최신의 고성능 슈퍼컴퓨
[오피니언타임스=김호경] 어떤 책이 베스트셀러(BS)가 되면 출판사 사장들과 편집자들 역시 충실한 독자층이 된다. “왜 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었는지?”를 좋건 싫건 분석해서 “우리도 그런 책을 만들어보자”는 욕구를 갖거나 혹은 목표를 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출판사를 순회하면 편집자 책상에 반드시 BS가 놓여 있고, 그 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책의 평가는 두 부류로 나누어진다. 먼저 칭찬이다.“시대의 흐름에 맞게 독자의 마음을 꿰뚫은 책입니다. 충분히 BS가 될 가치가 있어요.”하지만 똑같은 책에 대해 비판을 가하는 사람도
[오피니언타임스=동이] 아파트 생활이 장독을 밀어낸 지 오래됐습니다. 대신 가공장류들이 그 자리를 차지했죠. 물론 사먹는 장류가 미덥지 않다며 직접 담가먹는 이들도 제법 있습니다.60~70년대까지만해도 장 담그기는 한해 농사였습니다. 장맛이 제대로 들어야 걱정없이 한해를 날 수 있었으니까요. 된장 간장 고추장...장의 시작은 콩으로 메주를 쑤는 일이죠. 지난해 텃밭농사로 지은 콩을 메주로 만들어놓은 지 석달째 어름. 단양 죽령산골에 두고 온 메주덩어리들이 ‘장담글 때가 됐다’며 ‘빨리 오라~’고 아우성입니다. “그렇지
[오피니언타임스=이지완] 당신들이 떠나고 두 번째 봄이 왔던 때에 나는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있었다. 그날 나는 독일 돼지고기 요리 학센을 먹었고 과일향이 나는 맥주를 마셨다. 식사를 마치고 근처 프랑크푸르트 대성당으로 향했다. 30일간의 여행이 모두 끝나가는 때였다. 종교는 없었지만 이 긴 여행을 무사히 마치게 해주어 감사하다는 얘기를 누군가에게는 하고 싶었다. 인사를 마치고 나오는 순간이었다. 당시 한국의 날짜가 4월 16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초를 하나 사서 아기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마리아상 앞으로 갔다. 불을 피우고 고개를 숙였는데
9. 문지의 사랑[오피니언타임스=써니] 문지는 너무 바빠 요정을 본 것을 잊었다. 기말고사 때문에 학교 도서관 열람실로 갔다가, 우연히 한 남학생이 눈에 들어왔다. 프로필이 일단 근사했다. 남학생 책상 위에 책 몇 권이 눈에 띄었다. 기말고사 기간이라 학생들은 전공서적에만 빠져 있는데 그 자리에는 뀌도 미나 디 쏘스피로의 '나무 회상록'과 르 클레지오의 '사막'이 펼쳐져 있다. 문지가 좋아하는 책들이었다.‘ 얘, 괜찮은데. 4차원에 현실 초월? 후후.’문지의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든 남학생이 웃는 눈으로 인
‘잎을 피우기도 전에 꽃을 먼저 피우는 목련처럼,삶을 채 살아보기도 전에 나는 삶의 허무를 키웠다.’류시화 시인의 시 『목련』 중에서[오피니언타임스=표재분] 이른 봄이면 집 근처 언덕배기 목련나무는 어김없이 꽃 봉우리를 먼저 터뜨렸다.어스름 밤 목련 꽃이 핀 나뭇가지 위에 처연하게 걸린 초승달을 볼 때면 어린 마음에도 왠지 모르게 가슴이 아렸다.“내 인생은 외로운 달밤이야.”생전에 아버지는 술 한잔 하시면 독백처럼 내뱉으셨다. 저녁 무렵 마을 끝자락 구멍가게 탁자에 앉아 소주 한잔 하시던 아버지는 목련나무에 걸린 초승달만큼이나 외로워보였
8. 네마조네스의 불안시간이 조금 더 흘러 문지는 대학생이 되었다.하교 길, 문지의 가방 안에서 요정들이 만났다. 네마조네스가 요정들을 호출한 것이다. 부키가 가방 안에 들어 있던 책에서 쓰윽 나왔다. 노타모레는 녹색의 전공 노트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먼저 말을 꺼낸 건 부키였다. 퉁명스럽게 네마조네스에게 물었다.“ 왜 불렀어? 사이베르 생활은 어때?”“ 뭐, 제 인기는 어제 오늘 일이 아니죠...ㅋ. 아니 사실은 그것보다.”부키가 잽싸게 말을 끊었다.“ 그럼 뭐해? 요정인데 날개가 없으니 벌거숭이 같은 걸. 게다가
7. 사막의 샘을 꿈꾸는 문지 시대마다 기록과 기억을 유난히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정말로 소중하여 기억하는 것들을 기록으로 남겼는데 네마조네스 이전 과거 시대에는 주로 일기라는 방식으로 남겼다. 그런 일기로 아름다운 이름을 남긴 소녀, 안네가 있었다. 유대인이었다. 게르마니가 국가적으로 아주 야만적인 학살 행위를 할 무렵, 가족과 함께 네덜란드로 피신한 소녀는 다락방에 숨어서 2년간 일기를 썼다. 13살에 선물로 받은 일기장에서 종이의 강인함을 발견했다고 쓸 정도로 일기를 사랑했다. 답답하고 외로운 다락방, 그 폐쇄된 삶
1넓은 단독주택에 사는 미국사람을 부러워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의 경우 단독주택을 유지하는데 필수적인 도구와 장비를 갖추고 웬만한 수리는 자신들이 한다는 것까지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미국 사는 동생네 집을 방문해서 잠시 머무는 동안 우리와 다르게 살아가는 생활방식이 눈에 들어왔다. 주말인데 이웃집에 삼대가 모여 분주하게 톱질을 하는 등 공사가 벌어져 의아한 생각에 물어보았던 적이 있다.뒷베란다를 만든다고 다른 곳에 사는 할아버지까지 모여 품앗이 작업을 하는 광경이었다.인테리어 비용이 비싸 자기들이 웬만한 집수리는
[오피니언타임스=서동철] 지난 2016년 가을, 서울지방경찰청은 도굴한 고려청자를 팔려는 사람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문화재청과 공조 수사에 들어간다. 청자는 충남 태안 앞바다에서 건져올린 것이라고 했다. 태안 안흥의 마도 해역은 2007년 이후 4척의 고려·조선시대 침몰선을 발굴 조사한 해양 문화재의 보고다.그런데 수사가 진척되고 청자 출토 지역을 확인한 문화재청 해양문화재연구소는 긴장할 수 밖에 없었다. 도굴 장소가 침몰선이 많았던 안흥 앞바다나 안면도 서쪽 쌀썩은여가 아니라 안면도 동쪽의 최북단인 천수만 당암포 해역이었기 때문이다
6. 네마조네스의 출현기술은 훨씬 빠르게 사람의 생각을 앞질러갔다. 이제 손가락으로 클릭만 하는 세계가 눈앞에 펼쳐지고 언제 어디서나 원하는 책을 사이베르 안에서 찾아 읽고 사이베르가 대신 판단해주었다. 페르푸메의 향을 그리워하는 것조차 어떤 이들은 고리타분하다며 비웃었다.요정의 세계에서도 의견이 분분했다. 신성한 나무를 기억하는 노타모레와 부키는 사이베르가 보여주는 가공된 세상을, 생각할 시간이 없이 너무 빠르게 변하여 품격이 떨어진다고 생각했다. 연륜이 있는 요정들은 위대한 기억 나무의 말을 되뇌었다. “세상은 늘 균형이 중요하
[오피니언타임스=임종건] 대한민국 인터넷 공간은 건전한 곳도 있지만 허위와 과장, 조작과 사기, 선정과 음란 등 온갖 사회적 질병들이 만연돼 있다. 이념과 지역, 정당 등 대립구조와 관련된 공간이 특히 그렇다. 인터넷이 건전한 담론의 장이 되어 민주주의를 꽃피울 것이라는 말은 오래 전에 역설(逆說)이 되었다.국민적 의혹사건으로 비화한 ‘드루킹’ 댓글 공감 수 조작 사건은 이런 병적 현상의 최신 버전이다. 이 사건은 종전의 진영 대결 패턴이 아니라 같은 진영 내부에서 발생한 자해 조작이라는 점이 특이할 뿐이다.‘김모 씨(48)’로만 알려진
[오피니언타임스=동이] 주말을 맞아 강원도 오지 산골의 흙집엘 다녀왔습니다. 경관이 뛰어나 황토방 마니아들 사이에선 알음알음 입소문이 난 곳이죠.“언제 한번 같이 가보자~”는 지인들과 의기투합했습니다.간만에 찾은 흙집, '산천은 의구했으나 인걸(흙집 주인장)은 바뀌어' 있었습니다. 이 곳은 본래 화전민이 일구었던 밭이었습니다. 생활이 어렵던 시절 이런 산비탈에도 밭을 만들어 곡식을 거뒀으니 그 시절 일상의 곤궁함이 어림되고도 남습니다. 물론 그 덕에 지금은 고즈넉한 흙집들로 새롭게 태어났지만...
5. 사이베르한 손에는 시집을, 다른 한 손에는 습작노트를 든 거리의 장발청년은 이제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떨어진 낙엽과 꽃잎을 책 속에 끼워 말렸던 소녀들도 잘 보이지 않았다. 통학버스에서 손수 적은 단어장을 외우던 고등학생의 모습은 지난날의 풍경이 되었다. 주부들의 가계부와 육아일기도 엄지손가락 몇 번이면 끝났다. 지하철과 버스 안에서는 다들 고개를 숙이고 핸드폰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처럼 손 안의 화면만 쳐다본다. 옆 사람한테는 관심도 없었다. 이제 세상은 사이베르(Cyber) 세상이 되었고 도시는 페르푸메의 향이 매우 옅
4. 페르푸메가 옅어지고 있다.부키와 노타모레가 좋아라 수다를 떨었던 후로 세월이 더 흘렀다. 장난감 같았던 사진기가 더 발전했고 놀랍게도 텔레비라는 것이 나왔다. 인간의 기계 능력은 끝이 없었다. 모든 것이 작은 사각 상자 안에 담기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그 안에서 울고 웃고 떠들었다. 인간들은 이제 기계의 힘으로 거칠 것 없는 축소 능력을 구현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책을 읽고 노트를 하는 숫자가 분명히 줄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직 염려할 수준은 아니었다. 어른들은 텔레비가 바보상자이니 보지 말라고 했고 지식인들은 새 기계를 경멸
[오피니언타임스=심규진] 한 권의 책은 한 사람의 인생이다. 하나의 문장 안에 그 사람의 세계관이 펼쳐지고 현상에 대한 감정도 고스란히 묻어난다. 그래서 글은 지울 수 없는 내면의 기록이며 항상 숨 쉬고 있는 일상의 발로(發露)다. 최근 한 권의 책을 출간했는데 다양한 감정이 뒤섞인 채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출간 전에는 분명 기대로 가득 찼었는데 이제는 두려움 반, 부끄러움이 반이다. 솔직하게 써내려간 문장 중에 오류는 없는지, 내가 휘갈긴 문장으로 인해 혹 상처받을 사람들은 없을지,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보통 경제적으로 성공한 사
[오피니언타임스=김희태]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소재한 동구릉은 말 그대로 아홉 개의 능역이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의 역사를 담고 있는 동구릉에서 관심의 대상이 되는 능이라면 ‘건원릉(健元陵)’을 꼽을 수 있다. 건원릉은 조선을 창업한 태조 이성계(재위 1392~1398)의 능역으로 이후 조선왕릉의 표준이 되었다. 특히 건원릉에는 ‘신도비(神道碑)’가 세워져 있어 눈길을 끈다. 신도비란 해당 인물의 생애와 공적 등을 새긴 비석으로, 보통 종 2품 이상의 벼슬을 지낸 이들만이 세울 수 있었다. 현재까
3. 페르푸메노타모레와 부키는 위대한 기억의 신목이 마지막에 흘렸던 신비한 향을 떠올리면서 오랜 노력 끝에 마침내 페르푸메(Perfume)라는 향을 만들어 냈다. 겸손한 노타모레는 그 향이 자신들이 만든 것이 아니라 위대한 기억의 나무가 전해준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그가 전해준 뜻을 잊지 말자고 다짐했다. 노타모레는 핀란드 숲 쪽을 향해 존경과 사랑의 소리로 중얼거렸다.“ 위대한 기억의 나무님, 당신은 살아 있는 것이 틀림없습니다.”건조한 나무 향의 페르푸메는 처음에는 살랑거리는 바람이 불어야 맡을 수 있을 정도로 은은하여 쉽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