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경북 경주에서는 흥미로운 세미나가 열렸다. ‘역사도시 유적 주변의 공공건축, 도전과 과제’가 주제였다. 신라 천년의 고도(古都) 경주에서는 요즘 황룡사역사문화관이 논란을 빚고 있다. 황룡사가 자리잡은 곳은 신라시대에는 경주 왕경의 한복판이었다. 하지만 지금 황룡사 터를 비롯한 일대는 거대한 폐허나 다름없다. 절집 주춧돌과 불상 대좌만이 쓸쓸하게 드러나 있다. 그런데 농촌마을의 논 한복판에 세워진 나홀로 아파트같은 인상을 주는 전시시설이 이런 옛 절터의 분위기와 어울리느냐 하는 것이다. 시인 장석남은
인간의 존엄성을 갉아먹으며 성장과 성공을 외쳤던 사회는 더 이상 빼앗을 게 없던 모양인지 한 사람의 삶을 앗아갔다. 고강도 노동에 시달리다 죽은 혼술남녀 신입 조연출 故이한빛 PD의 이야기다. 그는 10분짜리 영상에 자막을 달기 위해 몇 시간을 꼼짝없이 자리에 앉아 일하고, 불과 몇 시간 전에 퇴근한 다른 동료들을 깨워서 일터로 데리고 나와야만 했다. 그 과정에서 느꼈을 육체적, 정신적 고통은 감히 글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났을 것이다.더 큰 문제는 다른 한편에선 일 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은 벌써 오래 전에 안국동 아름다운 가게 앞쪽에 있다가 삼청동으로 옮긴 사주풀이, 인생상담 집이다. ‘통집’ 주인장은 전직 국회의원이자 ‘꼬방동네 사람들’로 유명한 L(69) 전 국회의원이다.세상에 가장 불쌍한 것이 전직 국회의원이요, 세상에 가장 새빨간 거짓말이 ‘전직 의원이 바쁘다는 것’이라는 말처럼, 전직 의원들은 별도의 전문직이나 현장을 지키는 사람이 아닌 다음에야 정말 한가하다. 현역일 때 워낙 바빠서이겠지만, 이젠 전직 의원이란 묘한 수식어 마저도 민망할 만큼 세월이 지났다. 65세가 넘으면서부터 대한민국 제헌
흔들리는 지하철.출근길 노동자들은 각자의 삶을 살아내고 있다. 앉은 사람도 서 있는 사람도 온화한 기색은 없다. 그저 오늘도 무사히 지나가길 바라는 마음인 듯한. 그래도 개중에는 이어폰을 휘두르고 네모난 상자 속 움직임을 쳐다보며 미소를 머금는다. 그의 하루에 신의 가호가 있길.멀리서 미세한 소리가 들린다. 분명 둔탁한 지하철의 쇳소리는 아니었다. 백발의 할머니가 천천히 걸어오시며 좌중을 압도하는 호소를 하고 있다. 한 손 가득 움켜쥔 껌을 권하는 모습이 마냥 동정을 불러일으키는 몸짓은 아니었다. 할머니의 얼굴에는 여유가 묻어났고,
취임 전 후보 시절부터 트럼프의 행보는 믿음을 주지 못했었다. 잦은 막말과 인종 차별, 여성 비하 및 미국과 오랜 적대 관계였던 러시아와의 내통 의혹 등으로 절반이 넘는 국민들로부터 외면을 당할 때부터 불안했었다. 그럼에도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정치적으로는 이미 검증된 것으로 평가받던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을 꺾고 대통령에 당선된 것은 기성 정치인들에 대한 반발과 새 정치에 대한 기대 때문으로 풀이됐다.그런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 9일 제임스 코미 연방정보국(FBI) 국장을 해임했다. 1주일 뒤인 16일에는 ‘트럼프 대통령이
어느 후보도 ‘문화’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4년 전, 대선 때와 마찬가지로 TV토론에서조차 단 한 번도 문화에 대해 듣지 못했다. 문재인 대통령도 그랬다. 취임사에서도, 불과 열흘 만에 파격의 민생현장행보와 신선한 충격의 인사로 국민의 박수를 받고 있지만, 아직 ‘문화’는 없다.그렇다고 새 정부의 문화 목표와 정책이 없다는 얘기는 아니다. 있다. 대선공약집에. 10여 쪽으로 많은 분량은 아니지만 그것도 압축적이면서도 명료하게. ‘문화가 숨 쉬는 대한민국’이다.문화는 살아있는 생명체와 같다. 숨이 멈추거나, 숨을 막은 문화는 문화가
‘누가 돼도 상관없어’라는 식의 정치 무관심의 싹을 틔운 건 정치뿐만이 아니다. “제가 반장이 되면 반 친구들에게 햄버거 세트를 돌리겠습니다!”라고 연설했던 초등학교 반장선거부터, 선거와 투표의 가치를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행해졌던 중·고등학교 담임의 반장 임명, 행사와 축제에만 열을 올리고 장애인, 성소수자의 인권이나 시국에 대한 발언과 활동은 ‘정치적’이라며 거리를 두려고만 하는 총학 모두 일상이 비민주적임을 철저히 보여줬다. 학창시절 무관심의 싹은 착실히 꽃을 피웠다. 초등학교 6년 중학교 3년. 의무교육만 해도 9년이다. 고등
1980년대 중반, 캐나다 대사관 만찬에 참석했을 때였다. 본국의 장관급 인사 방한을 기념해 마련한 만찬에서 만난 캐나다 정부측 과장급 인사들은 명함을 주면서 한결같이 이렇게 말했다. “사실 이 일은 얼마 전까지 여러 명이 맡았었습니다.” 공공부문 개혁으로 종래엔 두세 명이 맡았던 일을 혼자 하게 됐다는 것이었다.공공부문의 생산성이 민간부문보다 떨어지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각국 정부가 공공부문 개혁에 힘을 기울이는 것도 관공서나 공공기관의 비효율성을 줄여 생산성을 높여보려는 노력임에 틀림없다. 지난해 5월 국내 공공기관을
세상이 바뀌었다. 엊그제까지 어느 것 하나 부럽지 않던 사람들이 이제 짐을 싸고, 또한 많은 사람들이 세를 얻어 귀하신 몸이 되고 있다. 힘을 얻은 이들에게는 밀물처럼 사람이 모여들고 뒤꼍으로 물러나는 사람들에게는 어쩔 수 없이 썰물처럼 사람들이 빠져나갈 터이다. 바야흐로 세월과 권력, 인생의 무상함이 저리게 느껴지는 때이다.무릇 높은 데서 떨어질수록 더 아프고 충격이 큰 법이다. 모든 것이 자기를 위해서 돌아가는 듯 보였던 세상으로부터 버림을 당하고, 문득 아웃사이더로 튕겨져 나왔을 때의 절망감은, 당해 보지 않은 사람은 그 처량
대통령, 과학자, 판사, 경찰관, 선생님…학창시절의 그 많던 꿈들은 누가 앗아갔을까. 주변을 둘러봐도 여전히 그 꿈을 움켜쥐고 사는 이는 없다. 버스가 오면 타고, 급행열차가 도착하면 환승한다. 점심을 먹으면 저녁을 먹고, 어두워지면 침대에 머리를 대고 내일을 맞이한다. 술 한 잔 걸치는 날이면 품고 있던 꿈의 잔재를 슬며시 꺼내들지만 다음 날이면 보란 듯이 사라진다.우리는 단 한 번도 상의한 적이 없지만, 순간의 오차도 없이 다 함께 꿈을 숨겨버렸다. 조직적 은폐. 어떤 용기 있는 자가 판도라의 상자에 구멍을 낼 것인
조선업황에 대해 제대로 된 진단이 있었나?‘밑빠진 독에 물붓기’ 비판에도 아랑곳않고 대우조선을 살리기 위해 1년 반새 10조9000억원이라는 천문학적인 자금이 투입됐습니다. 추가 지원에 난색을 표했던 국민연금마저 당국의 '끈질긴 공세’에 손들고 말았습니다. 국민연금은 대우조선 채무(회사채) 재조정으로 2682억원의 손실을 떠앉게 됐습니다.대우조선의 급한 불은 꺼졌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내연(內煙) 중입니다. 당국 의도대로 대우조선이 회생의 전기를 마련할 지 불확실합니다. 회생의 대전제인 업황개선이 따라주지 않는 한 또 다시
우리 국민, 그동안 참으로 수고 많았다. 그 수고의 코드는 누가 뭐래도 불이었다. 이 불은 특별했다. 대상을 태우는 폭력적 불이 아니라 자신을 반성하며 태우는 자성의 불이었다. 국민들은 작년 10월부터 시작해 한겨울의 추운 칼바람 속에서도 광장으로 모였다. 한사람 또 한 사람이 모여 1700만이 불을 들었다. 촛불은 횃불로 커져 타올랐다. 아시아 대륙 동쪽이 민주와 주권을 향한 불로 타올랐다. 비폭력 자성의 불을 든 나라가 어디 있던가! 달라지는 불(火)의 한국5월 9일, 새 정부가 들어섰다. 공화(和)국
짐 정리를 하다 벽장 속에서 빛바랜 노트 뭉치를 발견했다. 초등학교 시절 쓴 일기장이었다. 엄마는 참으로 꼼꼼한 분이었다. 유년의 기록들을 쉬이 버리지 못하고, 내가 나중에 어린 시절을 추억할 수 있도록 차곡차곡 모아둔 것이다. 요즘 아이들도 학교에 일기를 써 가는지 모르겠다. 나 때는 반 아이들 모두가 일기를 썼다. 일기장 페이지마다 담임선생님이 찍어준 도장이 남아있었다.또박또박 큼직한 글씨체에 담긴 사연을 읽고 있자니 어린 내가 눈앞에 서있었다. 나는 내가 성장했다고 생각했는데 잃은 것도 있었다. 바람에 개미가 날아갈까 걱정하는
3~4년 전 TV 코미디프로그램 ’개그콘서트’의 한 코너에서 “우리 언니, 지금 가실께요”라는 말이 한동안 화제였다. 그 코너에서 스타의 전속 스태프들이 외치던 “우리 언니 지금 가실께요”는 연예인병에 걸려 과한 대접에 익숙해진 진상 스타를 풍자하는 상징어였다. 코미디 속 ‘웃기는 유행어’ 정도로 여겼던 말투들은 이즈음 우리 생활 깊숙이 파고들어 통용되고 있다. 얼마 전 극장에서 영화가 끊기고 관객들이 항의하자 관계자가 나타나서 하는 말이 “상영을 도와드릴께요”였다. 영화가 빨리 상영될 수 있도록 조치해야
SNS를 통해 10년 전 알고 지내던 친구를 찾은 지 벌써 반년이 되어간다. 유년시절의 8할을 함께한 친구였다. 그 애는 내 생애 첫 이사와 전학에 나보다도 많이 울었다. 그토록 찾아 헤맸는데 막상 친구를 맺고 온라인으로 연락을 주고받으니 기분이 묘했다. 우리는 몇 달에 거쳐 서로를 기억하고 있음에 감동하고 보고 싶다는 말을 전했다. 소식을 주고받으며 애정 어린 댓글을 남기기도 했다.그런데 차마 나는 이 친구를 만나지 못하겠다. 모르는 사이도 아니면서 얼굴을 볼 용기가 나지 않는다. 너무 다르게 변했을까봐, 혹은 현재의 내 모습에
문득, 보았다.목련, 개나리, 아카시아, 탱탱하게 부푼 나뭇잎들...비가 온다는 예보가 있던 날이었고 그래서 대낮인데도 하늘은 눅눅한 이불보다도 더 무겁게 내려 앉아 있던 날이었다.세상은 돌아선 연인들의 등처럼 캄캄했고 적요했고 텅 빈 듯했다. 어떤 감정도 일어나지 않는 조용한 날이었다. 가고 있는 시간도 오고 있는 시간도 느껴지지 않는 홀로 서 있는 십 차선 횡단보도 앞처럼 그냥 어딘가에 붙박인 것 같던 날이었다.그때 보았다. 이미 만개한 세상! 30촉짜리 백열등 수만 개가 한꺼번에 점화되듯 꽃들이 피어
“정의? 대한민국에 그런 달달한 것이 남아 있기는 한가?” 화제를 모았던 영화 에 나오는 대사다. 위정자들과 기업인들의 부정부패 뉴스보도를 연일 접하다 보면, “청렴? 대한민국에 그런 달달한 것이 남아 있기는 한가?”라고 자조하게 된다. 사회의 모범이 되어야 할 자들의 파렴치한 독직과 부도덕에 ‘청렴’이 교과서에나 나오는 단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아진 듯하다. 비극이다.신문기사를 읽던 중 ‘청렴 생태계’라는 멋진 말을 우연히 접한 적이 있다. 법조인 출신인 성영훈 국민권익위원장은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청렴 생태계란
“대선 전야에 한국 보수의 앞날을 걱정한다.” 이 칼럼의 주제다. 처음에 솔직히 털어놓을 게 있다. 이 주제가 궁여지책이란 점이다. 마감일 때문이다. 마감일이 다른 날이었다면 얼마든지 다른 주제로 칼럼을 쓸 수 있었을 것이다. ‘오피니언타임스’이 지정한 마감일은 대선 전날인 8일이다. 칼럼은 대선일 오전 온라인에 뜬다. 그리고 한나절 뒤면 결과가 나온다.사상 최초의 대통령 탄핵에 따라 앞당겨 치러지는 대선일에, 선거와 상관없는 독창적 칼럼을 써낼 재주는 나한테 없다. 해서 궁여지책으로 짜낸 게 앞서 말한 보수에 대한 걱정이다.
어린이 날 전날, 아이와 아파트 놀이터에 갔다가 우연히 동네 초등학생들의 대화를 들었다. 어린이 날 선물에 대한 얘기였는데, 아이들은 이번에 받을 선물이 무엇인지 보다 얼마짜리인지를 먼저 얘기하고 있었다. 어떤 선물인지 보다 선물의 가격이 중요해진 아이들의 대화를 들으며, 아무 생각 없는 듯 해맑게 괴성(?)을 지르며 놀이터를 누비는 내 아이를 바라보면서, 마음이 좀 씁쓸해졌다.‘휴거’라는 말이 있다. ‘휴먼시아 거지’의 줄임말인데 공공임대주택에 사는 같은 반 친구들을 놀리며 부르는 말이라고 한다. 부산의 어느 지역에서도 근처 아파
지금으로부터 약 5년 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청년비례 국회의원 경선후보자가 되었다. 운 좋게 후보자가 된 후 가장 많이 했던 것은 ‘사람을 만나는 일’이었다. 지금은 TV에서 만나야하는 수많은 정치인들을, 당시에는 국회에서 직접 만날 수 있었다. 때로는 그들과 토론하는 자리도 주어졌다.그때 만난 정치인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은 문재인이었다. 말을 썩 잘하진 못하지만 온화한 미소 속에 진정성을 볼 수 있었고, 매 순간 자기주장을 펼치는데 주력하기보다는 타인의 말에 경청하는 모습이 인상 깊었기 때문이다. 문재인의 운명(가교